7화
황제와 베르트발드는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단순한 충신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략적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 황제는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서 베르트발드를 선택했고, 베르트발드 또한 집정관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이중첩자나 다름없는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황제의 권위와 원로원의 행정력 둘 다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원로원과 황제 또한 서로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며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이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베르트발드는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수석 집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직무를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었다. 결혼식 이후부터 지금까지가 딱 그런 시기였다.
베르트발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저택에서 일할 걸 그랬지.”
느슨하게 턱을 쓸어내리며 바이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이온은 그의 시선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하며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창구에 있던 직원이 전해주더군요. 백작님 앞으로 온 물건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기울인 채 시큰둥하게 상자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물건의 정체를 떠올린 듯 아, 짧게 신음하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무감한 얼굴 위로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군.”
“무슨 물건입니까?”
“선물.”
그답지 않게 흥겨운 어조로 말하는 터라 바이온은 상자 속에 담긴 게 누구의 선물인지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눈치챈 건 바이온만이 아니었던 듯, 투덜거리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셰인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트발드에게 바싹 붙었다.
“공녀님께 드릴 선물입니까?”
“아니.”
“에이, 맞잖아요. 여기저기 대충 뿌릴 선물은 저 아니면 호위관에게 시키시면서. 직접 골라서 배달까지 시킬 정도면 공녀님 선물 맞네요.”
“…….”
“이렇게 절절하시면서 대체 왜 공녀님 앞에서는 목석같아지시는 걸까요.”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틀어 빤히 셰인을 쳐다보았다.
“막상 곁에 있으니 자꾸 긴장돼서. 부드럽게 대하기가 힘들더군.”
텅 빈 얼굴 속에 일순 부끄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오랫동안 그를 모신 보좌관이 아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감정이었다.
어지간하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베르트발드이기에 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셰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그를 놀리려던 찰나였다.
“여하튼, 목석같아도 자네보다 인기 많으니까 내 걱정까지 해줄 필요 없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몸소 실감한 셰인이 부릅뜬 눈으로 베르트발드를 째려보았다.
베르트발드는 셰인의 눈빛을 무시하며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향수를 들어 상자 위에 칙칙 뿌렸다. 달콤한 무화과와 싱그러운 흙내음이 섞인 휘기에 향이 집무실 전체를 향긋하게 맴돌았다.
‘우리 영주님은 센스도 좋으시지’ 비아냥거리며 부러운 눈으로 상자를 쳐다보던 셰인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베르트발드가 손을 휘휘 저어 셰인을 뒤로 물렸다.
“뒤로 좀 물러나 주겠나.”
“왜요?”
“향기 좋아지라고 뿌린 건데 자네가 다 들이마시면 어쩌라고. 그리고 자네 냄새나거든. 좀 비키지 그래.”
제 몸을 킁킁거리던 셰인이 벌게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일 때문에 며칠이나 못 돌아가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백작님도 냄새납니다!”
“나한테는 냄새 안 나.”
양팔을 벌린 베르트발드가 턱을 들어 올린 채 오만한 얼굴로 셰인을 내려다봤다.
다가가면 또 냄새난다고 밀어낼 거면서 어쩌라는 거야. 투덜대던 셰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바이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이온은 무뚝뚝한 얼굴로 슬며시 베르트발드의 어깨에 코를 갖다 댔다.
“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
“뭐? 그럴 리가 없는데!”
“진정한 신사는 체취까지 관리해야 하는 법이지. 향수 따위에 의존하면 매력 없어. 자네도 좀 더 분발해야겠군.”
셰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베르트발드를 쳐다보다가 할 말을 잃고 책상 뒤로 물러났다.
저런 헛소리에 반박하다가 말싸움에서 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억울하게도, 못생긴 사람의 바른말은 반박하면서 잘생긴 사람의 헛소리에는 관대한 게 세상의 법칙이었다. 베르트발드를 모시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사실이기도 했다.
“마무리는 내일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빨리 출발하면 저녁 식사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군.”
베르트발드가 펜대에 펜을 꽂고서 흐트러져 있던 서류들을 한편에 쌓아 올렸다.
짙게 피로감이 묻어나던 눈동자가 청량한 푸른색으로 변해 구석에 놓인 선물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를 준비시키기 위해 시종벨을 들려던 찰나, 셰인이 난처한 웃음을 띠고 베르트발드의 앞에 서류 한 장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쩌죠.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있었네요.”
곤혹스러운 얼굴과 달리 셰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유감도 묻어나지 않았다.
괜히 놀렸나 싶은 생각과 함께 베르트발드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들어 올렸다.
* * *
라흐주에서 저택이 있는 그랑파하르까지는 마차로 두 시간이 걸린다.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거리였지만 오늘만큼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베르트발드는 품 안의 상자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어렴풋이 남아 있는 노을이 낮과 밤의 경계를 알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겠군, 생각하며 베르트발드는 목을 감싼 타이를 다시 단단히 조여 맸다.
그녀는 식사를 했을까.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설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테고.
“에리얼.”
선이 고운 이마 사이로 얕게 주름이 일었다.
에리얼, 에리얼 아이기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불러본 이름이었지만 막상 입에 담으면 어딘지 껄끄러운 울림을 전하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괜히 겸연쩍어 베르트발드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마차가 멈추고, 베르트발드는 상자를 끌어안고서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오셨습니까, 가주님.”
현관 홀 앞에 서 있던 하녀장과 집사가 공손히 묵례하며 가주의 귀환을 반겼다.
베르트발드는 상자와 하녀장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에바에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부인께 좀 전해줬으면 싶은데.”
“이게… 뭔가요? 상자가 제법 큰데요.”
상체를 전부 가릴 만큼 커다란 상자는 완충을 위해 두꺼운 푸른 벨벳으로 둘둘 감싸져 있었다.
보석도 아니고, 드레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이나 장식품이라기에는 상자의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에바가 상자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부인께 선물하시는 거라면 가주님께서 직접 전해드리심이 좋지 않을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베르트발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보름 가까이 곁을 비우고 있던 남편이 대뜸 쳐들어와서 선물이랍시고 이상한 걸 내밀면 더 싫어하지 않을까.”
부인에게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을 거라던 에바의 예상을 깨부수고 베르트발드가 담담히 자책 섞인 말을 내뱉었다. 에바는 입매를 길게 끌어 올려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연륜에 힘입어 감히 충고드리자면 이런 상황에서는 남편이 직접 선물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크답니다.
담담한 충고에 베르트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보일 듯 말 듯 한쪽 입가를 끌어당기더니 실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할 것 같군. 솔직히 부끄러워서 말이지. 그냥 에바, 당신이 전해주도록 해.”
부끄럽다는 말과 다르게 시큰둥한 태도로 에바에게 선물을 넘긴 베르트발드는 집사를 대동한 채 2층의 집무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며칠 내내 업무에 시달렸을 텐데, 기껏 저택에 와서도 일하려는 건지 여전히 눈동자에 날이 서 있었다.
“…참. 도련님은 예나 지금이나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이렇게 야단이실까. 에바는 선물을 단단히 끌어안고 백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2층,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백작 부인의 방 앞에 여러 가지 책들이 가득 담긴 트레이가 주인 없이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게 뭐지? 부인은 책을 못 읽으실 텐데?
의아한 마음을 품고 에바가 조심스레 방문을 노크했다.
“마님, 에바입니다.”
‘들어와요.’ 대답을 듣고 문을 열자 낯선 풍경이 에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리얼과 비에타가 티 테이블 앞에 사이좋은 자매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티 테이블 위에는 티포트와 찻잔 대신 종이 뭉치와 연필이 굴러다니고 있고, 테이블 위에 바짝 엎드린 비에타가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저기… 아니. 지금 무슨.”
“비에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글을 모른다고 해서 알려주고 있었어요.”
에리얼이 눈매를 휘어 웃으며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비에타의 손끝으로 시선을 향한 채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슥슥 움직였다.
“이건 엣. 끝에 점을 잘 찍어야 해.”
“엣… 엣… 이렇게요?”
“어… 한 번만 더 써볼래? 응, 맞아. 그렇게 네모지게 쓰는 거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에리얼이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발음을 알려주면 비에타가 그걸 따라서 종이에 쓰는 상황인 듯싶었다.
에바는 방에 찾아온 목적도 잊은 채 홀린 듯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참견하고 말았다.
“아, 비에타! 그건 그렇게 쓰면 안 돼. 반대 방향으로 동그랗게!”
“이,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써야 글씨가 예쁘단다.”
비에타가 머뭇거리며 에바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비에타가 쓴 글씨의 궤적을 손으로 더듬던 에리얼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