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무슨 소식?”
에리얼이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비에타가 뺨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 마님께서는 가주님보다 하루 앞서서 도착하셔서 모르셨나 봐요. 가주님께서 저택에 도착하시자마자 칙령이 내려왔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라흐주를 시찰하러 내려오신다고요. 그것 때문에 가주님께서는 지금 라흐주에 계세요.”
생소한 지명에 에리얼이 고개를 옆으로 비딱하게 세웠다.
라흐주. 분명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던 이름인데.
“동쪽에 있다는 자유 무역항 말하는 거지?”
자유 무역항 라흐주. 없는 게 없다는 제국의 가장 거대한 항구였다. 비에타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흐주에도 백작가 소유의 별저가 있는데 하필이면 폐하께서 거기 머무르신다고 해서… 엄청 바쁘신 것 같아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리얼은 머릿속에서 얀셀 백작과 황제와의 관계를 떠올렸다.
“폐하와 백작님이 꽤 긴밀한 관계라고 듣긴 했는데. 신기하네. 집정관들은 원래 황실하고 사이가 안 좋잖아.”
“뭐, 가주님께서 워낙 수완이 좋으시니까요. 다른 집정관들 두 명하곤 여전히 사이가 안 좋대요. 또 원로원과 자문위원회 양쪽에서 평이 좋은 사람은 가주님이 유일하다고 하더라고요.”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지식을 나불나불 읊으며 비에타가 자랑스레 허리를 세웠다.
귀족들의 집합소인 원로원과 황제의 측근 세력으로 이루어진 자문위원회는 원래부터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그 둘 사이를 능숙하게 오간다는 것만으로도 베르트발드 얀셀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긴, 그 사이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에 최연소 집정관이 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공작성에서도 얀셀 백작의 소문이 종종 들려왔던 터라 에리얼 입장에서 새삼 신기할 건 없었다.
“황제 폐하를 수행하고 계신다면… 당분간은 저택에서 뵐 수 없겠구나.”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에리얼은 얀셀 백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두운 붉은색.
꿈속에서 봤던 수려한 외모와 달리 그가 자신에게 지닌 감정은 붉은색을 끝없이 덧칠해놓은 듯한 불길한 핏빛이었다.
에리얼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색을 꼽으라면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단박에 붉은색을 꼽을 것이다.
붉은색은… 에리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색이었으니까.
까마득한 어린 시절,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장면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붉은 기운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장면이었다.
그때는 모든 인간이 붉은색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색이 노랗게, 하얗게, 혹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바뀌고 나서야 그 붉은색이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얼마나 자신을 싫어하길래 온몸을 붉은색으로 도배한 걸까.
너무너무 하기 싫은 결혼이었는데 이해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려와서? 그래서 나를 증오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봐도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 껄끄러운 남자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무뚝뚝한 남자는 드물게 마주칠 때마다 묘한 느낌으로 자신을 쳐다보기만 할 뿐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공통된 화제도, 관심도 없으니 그로서도 할 말이 없는 거겠지.
어차피 서로 가문만 생각해서 한 결혼이었으니 정이 없다 한들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 게 나아.
생각을 마무리하며 에리얼은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입에 머금었다. 입 안에 퍼지는 오렌지 향이 무척 싱그러웠다.
* * *
자유 무역항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라흐주의 항구 내에는 웅장한 크기의 갤리온과 북동부를 오가는 소형 캐러벨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항구를 따라 이어져 있는 시장은 다양한 색의 인종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소통을 나누고, 좌판 위에는 각국의 특산물과 희귀한 물품들이 손과 손을 넘나들며 새로운 문화를 전파했다.
혼란 속에서도 늘 아슬아슬한 규칙을 넘지 않는 라흐주의 풍경은 대륙의 전시장이라는 이명에 걸맞도록 정신없고 또 매력적이었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은행과 무역상들의 사무소가 즐비한 로퍼 라흐주 스트리트가 있다.
화려한 장식들로 재력을 과시하는 사무소들 사이에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다국적 무역 연합 세퍼에이드의 사무소였다.
6층으로 이루어진 사무소는 사교 클럽과 은행을 겸하고 있어 사무소라기보다는 고급 살롱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대의 발 닿는 곳, 그대의 것이 되리라.’ 바다의 개척자라 불리는 뮤체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 명판 아래,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손님의 신분을 확인하고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호위관님 오셨습니까.”
곰처럼 커다란 덩치에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늘 백작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백작가의 가신이자 그의 호위관을 맡고 있는 바이온 쉬크네치드였다.
“백작님은? 청사로 가셨나?”
“보좌관님과 함께 집무실에 계십니다.”
평소 베르트발드는 세퍼에이드의 사무소보다 청사에서 일할 때가 많았다. 그의 공적인 신분은 라흐주를 다스리는 판무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일들은 보안 유지를 위해 이쪽 사무소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방금 전 새로운 칙서가 도착해 집무실로 올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백작님 앞으로 도착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만….”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간 직원이 두 뼘 정도 되는 크기의 납작한 상자 하나를 갖고 돌아왔다. 벨벳으로 감싸인 네모난 상자는 척 보기에도 꽤 고급스러운 티가 났다.
바이온은 옆구리에 상자를 끼고서 집무실로 향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계단 가운데에 3단으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한낮의 태양보다 더욱 밝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영구히 빛을 내는 최고급 백열석이 아낌없이 들어간 탓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백작가의 가신으로 살아왔으니 얀셀가의 돈지랄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까닭은 바이온이 평민 출신이기 때문일 터였다.
바이온은 벽면에 걸린 그림과 도자기 따위를 감흥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바이온입니다.”
문을 열어젖히자 잉크 냄새와 오래 묵은 양피지 냄새가 성큼 다가와 바이온을 반겼다.
서랍과 책장이 빼곡히 늘어선 벽면 끝에, 라흐주의 제국판무관이자 파하르의 영주인 베르트발드 얀셀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의 보좌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좌관인 셰인 비체도 말없이 베르트발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를 떠돌던 삭막한 공기가 바이온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왜 저러고 있을까. 울적한 분위기에 바이온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폐하께서 시찰을 취소하셨다는군.”
일주일 가까이 격무에 시달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한 어조였다. 반면 셰인은 책상에 머리를 쿵 박고서 발작하듯 주먹을 쾅쾅 내리쳤다.
“취소할 거면 좀 빨리 말하지! 엊그제가 약혼녀 생일이었는데!”
바이온은 누구를 먼저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셰인에게 다가가 툭툭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셰인이 동정할 거면 돈으로 달라며 되레 바이온에게 핀잔을 주었다.
바이온은 지그시 의자를 밀어 꽥꽥대는 셰인을 구석으로 밀어낸 뒤 베르트발드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의 주군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백금발 아래 가늘게 뜬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며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저렇게 짜증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찰령을 내리신 것도 꽤 갑작스러웠습니다만… 왜 취소된 겁니까?”
셰인이 푹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가로챘다.
“2황녀께서 다리를 다치셨답니다.”
“쿠델라이야 황녀가?”
황녀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베르트발드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셰인이 한탄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맞아요. 애초에 폐하께서 시찰하러 오신다는 것도 2황녀의 부탁 때문이었다던데요. 좋다고 백작님 쫓아다닐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는데! 지금 공녀님과 결혼했다고 심술부리는 거 아닙니까?”
일찍부터 베르트발드를 제 남편감으로 낙점한 2황녀는 성인이 되자마자 끊임없이 베르트발드에게 청혼을 요구했다.
딸을 아끼는 황제 또한 결혼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젊은 집정관을 견제하려던 원로원의 일부 세력들 또한 베르트발드가 황녀의 부마가 되어 정치에서 손 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황녀를 거절하고 베르트발드가 선택한 사람이 하필이면 장님 공녀로 유명한 에리얼 아이기스였다.
제 것이라 믿었던 남자가 그런 하자품과 결혼했으니, 자기애가 넘치는 황녀로선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2황녀 성격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방법이 없을까요?”
베르트발드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는 듯 마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말이야.”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서 창가 언저리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낮은 음성으로 말문을 뗐다.
“슬슬 참기가 힘들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바이온과 셰인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곤란하다든가 짜증 난다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막상 튀어나온 건 ‘어떻게 없애버릴까.’ 하는 살벌한 문장이었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셰인이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눈동자만 움직여 둘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지. 됐고, 서신이나 전해줘.”
“뭐라고 보낼까요?”
“뻔하지 않나. 황녀의 무탈을 빈다고. 다음번에야말로 폐하께서 방문해주시기를 고대하고 있겠다고 쓰게.”
말을 마치고, 베르트발드는 집무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가를 문질렀다.
급작스러운 황제의 시찰령으로 인해 일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녀 때문에 남부로 내려오는 거라는 셰인의 추측도 어느 정도는 맞겠지만 그게 전부일 리가 없었다.
황제가 베르트발드를 찾아오는 목적은 영지 관광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해군에서 쓸 새로운 무기와 함선들,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