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온갖 인종들이 모여들어 부귀영화를 꿈꾸는 제국의 수도. 해가 지지 않는 도시 드란델.
드란델의 남쪽, 인파가 득실거리는 상업 지구에 흑색 사륜마차가 들어섰다.
이륜마차도 보기 드문 상업 지구에서 저렇게 사치스러운 사륜마차라니. 휘둥그레한 눈으로 마차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마차에 부조되어 있는 가문의 문장을 보고 더욱 커다랗게 눈을 키웠다.
성채의 탑, 그 아래 장미 덩굴이 우아하게 새겨져 있는 문장은 귀족에 문외한인 제국 사람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한 가문이었다.
가장 오래된 성의 주인이자 제국을 수호하는 화이트룩.
아이기스 공작가.
찬탄 어린 시선을 의식하듯 마부가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속도를 늦췄다. 마차에 앉아 있던 에리얼은 잿빛투성이의 세상을 바라보며 창가에 바짝 몸을 붙였다.
회색, 회색, 검은색, 또 검은색.
그림자와 암흑으로만 이루어진 풍경이 지루할 법도 하건만 에리얼은 개의치 않고 눈을 반짝이며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데 열중했다.
그렇게 상업 지구를 지나 예술가의 거리 너머, 마차가 들어선 곳은 부호들이 산다는 다이아몬드 힐즈에서도 가장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화이트 하우스란 별칭으로 유명한 흰 저택이 새까만 마차와 대비를 이루듯 더욱 하얗게 빛났다.
긴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다다르자 커다란 분수가 마차를 반겼다. 세차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 가운데에는 천칭을 든 세이렌이 조각되어 있었다.
“와… 예쁘다.”
에리얼이 조각의 유연한 실루엣을 보고 작게 감탄을 뱉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집사인 빌헬름입니다.”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와 사용인들이 깊숙이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에리얼은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심스레 밖으로 발을 뻗었다.
얀셀가가 부호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본가도 아닌 수도 저택이 이 정도의 규모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긴장하지 않으려 했건만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에리얼은 손에 쥔 지팡이를 다잡고서 발끝에 힘을 주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장 집무실로 안내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안내해주세요.”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에리얼은 괜스레 헛기침을 내뱉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집사의 뒤를 따랐다.
적막한 복도 위에 탁탁거리는 지팡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반면 한 발자국 앞에서 걷는 집사는 인기척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에리얼이 쾌활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택이 굉장히 크네요. 관리하려면 힘들겠어요.”
“부끄럽습니다. 공녀께서 계셨던 아이기스 공작성에 비하면 별장 수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공작성은 성주민들이 같이 사니까 큰 거예요. 수도 저택은 여기보다 훨씬 작은걸요.”
작은 소리로 반박하자 집사는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며 작게 웃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공녀께서 이 저택의 주인이 되실 테니 되도록 빨리 익숙해지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파하르에 있는 저택은 이곳보다 훨씬 더 크답니다.”
집사는 웃으며 말했지만 에리얼은 웃을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설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이곳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결혼을 한다는 사실도, 그리고 이곳의 주인이 된다는 것도 모두 현실감이 없었다.
흔들리는 결심을 다시 단단하게 다지며 에리얼이 가볍게 숨을 뱉었다.
베르트발드 얀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 지 두 달이 지났고, 오늘 에리얼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저택에 찾아왔다.
“가주님. 공녀께서 오셨습니다.”
층고가 높은 만큼 집무실 문도 엄청나게 컸다. 집사가 문을 열고서 들어가 보라는 듯 물끄러미 에리얼을 응시했다.
에리얼은 치맛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펴 땀을 닦아냈다.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되뇌며 집무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럼에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발치만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방 한가운데에 섰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사적인 장소에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베르트발드입니다.”
듣기 좋은 저음이었지만 에리얼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지팡이만 만지작거렸다. 도무지 긴장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꾸 긴장되는 이유는 아마도… 저 색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리얼이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백작님.”
끼익, 의자를 미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꽤 의연한 성격이시라 들었는데 공녀께서도 낯선 곳은 영 꺼림칙하신가 봅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죄송해요. 그, 제가 조금 낯을 가려서. 저번에 뵙고 오늘 두 번째 뵙는 거라….”
실소와 함께 그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땅 파고 들어갈 것 아니면 자꾸 가리지 말고 얼굴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제부터 매일 대면할 텐데 그렇게 숙이고 있어서야 부부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
긴장에 동조하듯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 안에 가득 찼다.
긴장하지 말자. 긴장할 필요 없어. 에리얼은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독하게 어두운 핏빛 인영이 무채색 시야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자신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역시. 그날 연회에서 본 것과 같았다.
붉은색….
아니, 정확히는 붉은색도 아니었다. 어둠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어두컴컴한 핏빛 실루엣은 붉은색에게 실례가 될 만큼 음울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저런 색을 뭐라고 할까. 분명… 이름이 있을 텐데.
세간에서는 그 색을 와인색이라고 불렀지만 색에 대한 정보가 단편적인 에리얼로서는 그저 ‘어두운 붉은색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붉은색.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회색빛이었다. 저렇게 따로 색을 가진 사람은 무척 드물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하필이면 저런 붉은색이라니. 그것도,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 저런 색이라니.
불안함에 마음이 술렁였다. 심경을 대변하듯 에리얼의 잿빛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운 빛에 잠겨 들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거든 질문하십시오. 기꺼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붉은 인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불온하게 일렁이는 붉은색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한 음절로 귓가를 스쳐 갔다.
에리얼은 기이한 모양으로 일렁이는 붉은색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 말씀하세요.”
“결혼식은 차주 금요일에 치를 겁니다. 앞으로 사교 시즌마다 수도에 올라와야 할 테니 결혼식 전까지 이 저택에 익숙해지시길 빕니다. 대충… 열흘 정도겠군요.”
“열흘이요?”
“예.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백작령으로 이동할 겁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에리얼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세웠다.
결혼식까지 고작 열흘밖에 안 남았다니. 이렇게 빨리 떠나는 줄 알았으면 이것저것 미리 준비해 왔을 텐데.
“바로 이동하는 건가요? 여기, 수도에 더 있지 않고요?”
“사교 시즌도 아니니 수도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달리 영지에 내려가기 싫은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어두워진 안색을 숨기려 고개를 떨궜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어둠 속으로 감췄다. 잿빛 눈동자가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잘게 흔들렸다.
베르트발드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숨을 토해냈다. 차마 담지 못한 말미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닫고 에리얼을 살피다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공녀께서는 이 혼담이 마음에 안 드시나 봅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설핏 탐탁지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생각하던 에리얼이 손을 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지체 높은 아이기스 공작가의 영애시니 낮은 신분의 남자와 혼인하는 입장이 썩 유쾌하지는 않으시리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신분을 운운하는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베르트발드 얀셀. 수석 집정관. 제국 내의 온 귀족들이 모인 원로원의 수장.
귀족의 정점에 오른 그였지만, 아이기스가의 상대로서는 다소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공녀와 백작의 혼인이라니.
공작가의 여식이라면 대부분 황족, 아니면 왕족들과 결혼하는 일이 대부분인 제국 사교계에서 에리얼과 남자의 혼인은 그야말로 귀천 상혼,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가도, 에리얼도 연이은 파혼으로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없었다. 그녀의 문제를 아는 귀족들 또한 에리얼보다 백작이 아깝다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뭐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니까.
그녀는 상대가 백작이든 자작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에리얼이 고민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미흡한 저를 받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에리얼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두덩이를 쓸어보았다. 검은색과 회색, 흰색으로만 이루어진 무채색의 시야 속에 까만 손바닥 모양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해 못 할 시야를 남에게 설명할 재간도 없고 마녀라고 매도당하기도 싫었다.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맹인이라 자처했다.
에리얼은 시선을 아래로 낮추며 말을 이었다.
“제 별명이 장님 공녀라는 소문은 백작님께서도 들으셨겠지요.”
장님 공녀, 에리얼 아이기스.
아이기스 공작가, 하면 귀족들은 ‘그 장님 공녀 아직도 결혼 못 했나?’로 운을 떼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 집 영애가 장님이라던데’로 시작한 농담들은 이내 ‘그 장님 공녀 또 파혼당했다더라’로 이어졌고, 이내 ‘그 아이기스 공작가에서 어떻게 그런 하자품이 나왔을까’로 매듭지어졌다.
그 하자품인 에리얼의 존재 때문에 개국공신이자 북부의 가장 강대한 지배자였던 아이기스 공작가는 귀족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해야 했다.
공작가조차 그런 조롱을 감내해야 했는데 하물며 얀셀 백작가라니.
“청혼을 수락한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백작님께서는 집정관까지 오르신 분인데… 저 같은 사람이 백작 부인이라고 하면 괜히 가문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