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 >
1화
곳곳에 놓인 샴페인과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향수 냄새와 섞여 콧속을 향긋하게 물들였다.
아직 겨울의 잔재가 남은 바깥과 달리 연회장 내에는 때 이른 봄이 활짝 피어 있었다. 휘황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발을 놀리는 귀족들의 모습은 제국의 번영을 몸소 보여주듯 우아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왈츠와 폴카로 달아오른 연회장이 젊은 남녀들에게 점령되어 핑크빛 기류를 자아냈다. 한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사교 시즌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젊은 사람들이 많네요.”
“그렇죠? 레이디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네요. 춤 기다리다가 날이 저물겠어요.”
소곤거림에 귀 기울이고 있던 다른 부인이 부채를 펴며 싱긋 웃었다.
“그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얀셀 백작이 초대객으로 온다고 해서 이렇게 붐비는 거겠죠.”
하얗게 분칠한 부인들의 뺨 위로 은은한 홍조가 떠올랐다. 얀셀 백작, 아마도 현재 제국 사교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남자일 것이다.
“그렇군요. 어쩐지… 저도 초대객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 얀셀 백작이? 싶더라구요.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불참하려고 했는데 결국 올 수밖에 없었네요.”
“어머, 저도요. 너무너무 뵙고 싶어서 남편을 졸라 겨우 참석했답니다.”
어린 귀부인의 순수한 본심에 다른 부인들 모두 입가를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조롱하는 게 아니라 다들 비슷한 목적으로 연회에 온 까닭일 터였다.
홀을 바라보고 있던 귀부인이 슬며시 몸을 기울이며 다른 부인들에게 속삭였다.
“부끄럽지만 저도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서 참석했어요. 멀리서 한 번 뵈었을 때도 정말이지….”
“그 외모에 배경까지 그렇게 화려하니 현혹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우습지 않나요? 사생아 주제에 작위를 계승한다고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 막상 집정관까지 오르니 사생아라는 말이 쏙 들어갔잖아요.”
“전 그분이 사교계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봐왔는데요. 그 얼굴을 보면 사생아든 뭐든 아무래도 좋아진답니다.”
한 부인이 ‘어머, 그 정도인가요?’ 하며 맞장구를 치자 모여 있던 부인들 모두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부인들의 입에서 얀셀 백작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원로원을 대표하는 삼 집정관의 수장, 젊은 나이, 백작가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그가 다스리는 영지까지.
와전된 소문이 또다시 왜곡되고 왜곡된 소문에 살이 덧붙여졌다. 이야기를 나누는 부인들의 눈 속에 별이 반짝거렸다.
“그 소문 들으셨어요? 공작가에 청혼장이 갔다는 얘기.”
부채를 팔랑거리던 귀부인이 주변을 살피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환담을 나누던 귀부인들의 안색이 크게 급변했다.
“장님 공녀 이야기 말이죠?”
장님 공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귀부인들의 얼굴 위로 혐오스러운 감정이 퍼져 갔다. 그렇게 한데 모인 험악한 시선들이 천천히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연회장 귀퉁이 한구석에, 작고 왜소한 체구의 여자 한 명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맞물려 결혼 적령기를 한참 지난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어려 보이게 했다.
새카만 흑발을 틀어 올린 여자는 어딜 봐도 추하기는커녕 차분하고 정숙해 보여서 소문처럼 음습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외모가 어떻든 저 여자가 장님 공녀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먼저 화제를 꺼낸 부인이 부채를 탁 접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얀셀 백작이 공녀에게 청혼했다는 얘기가 사실인가요?”
“저도 들었어요. 그 소문 때문에 엊그제부터 사교계가 시끌시끌하던데요.”
하아, 한숨을 내쉰 부인이 신경질적인 손길로 부채를 펴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하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공녀를 고른 걸까요.”
노골적인 비난이었지만 공녀를 두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난에 동조했다.
“썩어도 준치라잖아요. 당연히 아이기스 공작가의 딸이라서 그런 거겠죠. 공녀와 결혼하면 북부와도 연을 이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굳이 공녀를 고를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요? 얀셀 백작의 명성이라면 북부까지 노릴 필요 없을 텐데.”
“그건 그렇죠. 뭐 신사분들의 속뜻을 저희 같은 여자들이 짐작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북부는 너무 야만적이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부인이 갑자기 탄성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부인들도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인파가 갈라진 연회장 한가운데에서부터 서너 명의 호위를 거느린 남자가 부인들이 있는 홀 외곽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흑색 정장 위로 진청색 프록코트를 걸친 남자는 타이와 커프스, 구두, 행거치프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렇게 튀는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인파 속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옷매무새를 부각시키는 탄탄하고 늘씬한 몸 때문일 터였다.
호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느릿하게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홀 안쪽에서 부채를 편 채 남자를 지켜보던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차디찬 표정을 허물고 보일듯 말듯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황후에게 예를 표했다.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상대와 눈을 맞추는 모습은 좀 전의 무표정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근사하기만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느릿하게 고개를 틀어 귀부인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날카로운 눈매를 접어 야릇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부인들 사이에서 떠돌던 소음들이 자취를 감췄다.
침묵 사이로 서로의 눈빛이 바삐 오갔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자리에 그가 다가와 고아한 미소를 흩뿌렸다.
“연회장이 허전하다 싶더니. 꽃들이 전부 여기 모여 있었군요.”
나지막한 저음, 그 끝에 깊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묘한 여운을 남겼다. 남자는 느슨한 얼굴로 부인들의 면면을 훑었다.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그녀들을 휘감았다. 얀셀 백작을 처음 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부인들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지워졌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는 이질감을 동반한다. 저 선연한 외모가 옆에 서 있는 호위들과 같은 인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짧은 관찰 끝에 그가 아주 잘생긴 남자일 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 이후로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마치, 지금의 후작 부인처럼.
“백작님. 말씀 많이 들었답니다.”
니르케 후작 부인이 활짝 핀 얼굴로 남자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손등을 내려다본 남자가 차가운 표정을 지우며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황후 폐하께서 후작 부인께 신세를 많이 지셨던 모양입니다. 손이 무척 예쁘시다 극찬을 하시던데… 과연 듣던 대로. 손이 무척 섬세하십니다.”
백금색 속눈썹이 우아한 그늘을 자아냈다. 치켜 올라간 눈매, 그 안에 담긴 짙푸른 눈동자가 연회장의 빛을 반사하여 새벽녘의 창공을 연상케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깔끔하게 뒤로 넘긴 백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늘진 음영 아래, 날카롭게 빛나던 눈매가 천천히 접히는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혹적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모든 게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멍하니 그의 모습을 훑던 후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남자는 지그시 후작 부인을 바라보다가 살짝 눈시울을 휘어 웃어 보였다.
“베르트발드 얀셀입니다. 후작 부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르트발드가 깊게 허리를 숙여 후작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별거 없는 인사치레가 어찌나 달콤하게 들렸던지 후작 부인은 평소의 고아한 표정을 집어치운 채 입을 벌려 짧게 웃었다.
부채도 펼치지 않고 입가도 가리지 않는, 귀부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품위 없는 짓이었으나 후작 부인을 타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의 모든 부인들도 그녀와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수도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귀부인들이 체면도 잊고서 홀린 듯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물론, 베르트발드가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인종이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을 대표하는 세 명의 집정관,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신분인 수석 집정관.
현재 베르트발드 얀셀 백작에게 주어진 가장 유명한 수식어였다.
사생아로서 사교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던 남자가 이제는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의회를 쥐락펴락하는 이로 변모했으니 누군들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회 일로 바쁘실 텐데 오늘은 어쩐 일로 연회에 다 오셨나요? 아, 물론 저희야 백작님을 뵐 수 있어서 무척 기쁘지만요.”
이성을 수습한 후작 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말을 건넸다. 베르트발드는 가늘게 뜬 눈으로 후작 부인을 응시하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쁜 건 여전합니다만 오늘은 아이기스 공녀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 하여 결혼 전에 한번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뒷짐을 진 채 태연한 어조로 말하는 통에 부인들 모두 놀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어버버하는 부인들 틈에서 후작 부인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백작님께서 장… 아니, 아이기스 공녀와 결혼하신다는 게?”
부인들은 설마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베르트발드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니, 왜… 공녀와…?”
후작 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미를 흘렸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베르트발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려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까 부인들이 노려보았던 연회장 구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공녀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서서 연회장 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짝 말라 왜소해 보이는 몸, 단정하지만 지루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 외모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눈길을 끄는 단점이 너무 커서 얼굴 따위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
탁한 잿빛 눈동자는 제 아버지도, 어느 가족들과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초점마저 흐릿한 잿빛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에리얼 아이기스.
북부의 지배자인 아이기스 공작의 첫째 딸.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다.
“…글쎄요.”
베르트발드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결혼이란 게, 다 사랑해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흘리듯 중얼거린 말에 진실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한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베르트발드는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