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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69)화 (69/70)

69화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고막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놈이 되는데 내가 안 될 이유는 없어.]

또한, 이물질처럼 망막에 걸린 그의 표정이 눈을 깜빡여 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해도 진형과 다시 만날 생각이 없지만, 도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왜지?

“구진형 선배와 다시 만날 일은 없어요.”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차 속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진형 씨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겠죠.”

“…….”

“그리고 나에 대한 마음도 식었겠고.”

허탈한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옭아맸다.

‘사랑해서…… 내가 진형 선배를 좋아해서 사귀었다고 알고 있었던 거야.’

도하에게서 도망치듯이 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충격적인 사실로 인해 절망했었다.

그에게서 몇 통의 전화가 와도, 그로 인해 상처받은 모습을, 나약해진 마음을 보여 주기 싫었다.

웃기게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감정이 정리된 후 그를 보고자 했던 선택에 후회가 일었다.

무작정 그를 외면하려고 했던 행동이 그와 자신에게 나은 선택이었나, 되짚어 보게 된다.

“나, 구진형 선배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겠죠.”

“후, 정말 아니에요.”

과거형으로 치부하는 도하에게 세연은 한숨을 실어서 속마음을 드러냈다.

“좋아서 사귄 게 아니라고요.”

그럼, 하고 그녀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한겨울처럼 차가웠지만 이대로 오해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세연은 이어서 말했다.

“좋아질 것 같아서 사귀었는데…… 마음이 가지 않았어요.”

“…….”

그에게서 별말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곧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제 손을 덮은 그의 손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차가웠다가 따뜻했다가.

변화하는 그의 체온이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게 했다. 공백보다도 그 체온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나, 뭐 한 거야.’

실수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 몰래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자존감을 갉아먹었었다.

그녀가 내심 두려워했던 일을 목격하자 도하를 믿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 여자 속옷은 뭐란 말인가.

본 게 있으니 안 좋은 상상을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할까.

그는 진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딩동!

“세연아……!”

슬리퍼도 신지 않고 현관문을 연 진형은 눈앞에 있는 주아를 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세연아?”

주아가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리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게 맞았네.”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바람을 피워.”

진형은 습관이 되어 버린 고갯짓을 했다.

어떻게든 주아를 구슬려 내쫓아야 한다.

“그거야 모르지.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 둬. 날 배신하면 오빠한테 안 좋을 거라는 걸.”

“…….”

뭐지?

왜인지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진형이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주아가 진형의 상체를 밀쳤다.

“비켜. 들어가게.”

기어코 현관 안으로 몸을 들인 주아를 강제로 밀어낼 수 없었다.

‘세연이가 오기 전에 해결을 봐야 해.’

“왜 전화 안 받았어?”

“그거야, 일이 있어서 못 받은 거지.”

진형은 주아의 목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갈까 급히 현관문을 닫았다.

“웃겨. 내가 그런 거짓말에 속을 바보로 보여?”

주아는 시뻘게진 눈으로 진형을 노려보았다.

‘또 속을 줄 알고.’

진형의 계획엔 도하와 밤을 보낼 수 없으면 속옷을 침대에 숨겨 두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들고 나가요.]

[……네에.]

느리게 일어나면서 배를 움켜잡았다.

[으, 죄, 죄송한데 화장실을 좀…….]

불쾌한 시선이 닿은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그렇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안에 들어왔는데 그냥은 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저쪽입니다.]

그의 눈길이 닿은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이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손톱을 탁탁, 깨물며 생각했다.

손쉽게 풀린다고 생각한 일이 막판에 틀어지자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네. 시간 괜찮습니다.]

그때 기척이 닿았다.

닫힌 문가에 바싹 붙어 그의 말소리를 들었다.

[지성 미디어랩 사에서 받은 자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5분 정도면 됩니다.]

누구와 통화하는지 모르겠지만, 업무 처리를 위해 거실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인기척이 멀어지자마자 주아는 얼른 나와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거실과 가까운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침실이었다.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했다면 발목이 잡힐 일을 하지 않았을 건데…….

소기의 목적만이라도 달성시켜야 한다는 마음에 야한 속옷을 이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대표의 집에서 나왔던 그녀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밤새도록 곱씹을수록 실수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이 덤터기만 쓸 수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진형이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자 더욱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와 봤더니.

딴 여자의 이름을 불러?

‘이 대표와 무슨 앙금이 있는지 몰라도 날 이용해서 복수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리고 날 버리려고?’

그렇게 둘 것 같아? 진형의 속셈을 알아 버린 주아는 이를 갈았다.

구진형 너도, 당해 봐.

“그거 모르지? 이 대표가 내게서 오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녹음했다는 거.”

“뭐?! 너 돌았어? 우리 비밀을 말하면 어떡해!”

“그러기에 내 전화를 받지 왜 피해? 다 오빠 때문이잖아!”

“이…….”

진형이 손찌검을 하려는 듯 팔을 쳐들자 주아가 턱을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때리게?”

그거야말로 주아가 원하는 거였다.

“후.”

치밀어 오른 화를 급히 삭인 진형은 눈치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그리했다는 건 네 말뿐이니까.”

“풋, 등신.”

“뭐?”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알아.”

“너…….”

주아가 그와의 대화를 녹음 중이라는 걸 깨달은 진형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주아의 핸드폰이 보이지 않아 방심한 탓이었다.

진형이 주아의 몸을 수색하려는 순간, 인터폰 소리가 크게 울렸다.

딩동.

“뭐, 뭐 하는 거야!”

진형이 다급하게 주아의 입을 막으며 등을 밀었다. 그러고 나서 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해. 일단 내 방에 들어가 있어.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거야.”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면 같은 배를 탄 처지였다. 지켜보겠다며 눈을 부라린 주아가 진형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안방 문이 닫히자마자 진형이 현관을 열었다.

“세연아, 나가서 이야기…….”

눈앞에 보인 남자의 몸체에 진형의 입이 다물어졌다. 

“씹…….”

도하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된 진형은 욕설을 작게 뇌까렸다.

* * *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 겁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굳은 진형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며 세연이 말했다.

“어제 내가 본 걸 다시 보여 줘요.”

“……그래. 못 보여 줄 건 없지.”

진형은 소파에 둔 핸드폰을 가져와 도하와 세연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여자와 아는 사이입니까.”

선명한 화질로 인해 똑똑히 찍힌 여자의 얼굴을 주시하는 도하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압니까. 대표님이 아는 사이겠죠.”

“그렇군요.”

가타부타 말없이 도하가 진형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뭐 하는……!”

제 물건을 지키지 못한 진형이 바락 외치는 순간이었다.

띠링! 띠링!

세연은 진형이 당황하며 그도 모르게 힐끗거리는 방을 보았다.

벨 소리가 다급하게 끊겼다. 도하가 싸늘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안에 다른 사람이 있나 보군요.”

누가 있냐고 물어보려던 세연은 도하가 이 상황을 유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오면 어제의 녹음본을 지워 주죠.”

저 방에 숨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 듯한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문밖으로 나온 여자는 진형이 보여 준 사진 속의 사람과 동일 인물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세연은 이렇게 된 경위를 알 것 같았다.

“성주아 씨 입으로 사정을 실토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진형의 고개가 주아라고 불리는 여자에게로 돌아갔다.

“성주아!”

“저는 진형 오빠의 애인이에요.”

자신과 사귀고 있는 동안 진형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세연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하고 김빠진 소리를 낸 세연은 저를 보고 있는 도하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알고 있었어요?”

“고백하기 며칠 전.”

“…….”

“그때 알았습니다.”

흐름의 순서를 맞춰 보면 진형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이제 내 입장을 말할 차례군요.”

그녀를 생각해서, 구진형에게 상처 받을까 봐 말 못 했던 거겠지.

차인 것과 차는 것은 다르니까.

“저들의 속내를 이용하고자 속아 주었습니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눌러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비딱하게 주아와 진형을 보던 도하가 세연을 압박했다.

“내 집에서 뭘 봤던 겁니까.”

닥쳐올 자신의 미래를 알아 세연은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여자 속옷이요…….”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증명하면 되겠군요.”

“아아뇨! 안 그러셔도 돼요……. 믿어요.”

“믿어져요?”

나중에 딴말할 것 같은데, 하고 읊조린 말이 세연의 목을 내리치듯이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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