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세연은 모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나가서 먹을까요?”
“대표님은요?”
아파트 주변에 음식점이 많았지만 나가서 먹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세연은 집주인의 의향에 맞추기로 했다.
“나는 시켜 먹었으면 해요. 세연 씨는요?”
“저도요.”
그러자고 세연이 활짝 웃자 주방에서 움직이지 않던 도하가 픽 소리를 내며 흔쾌히 결정지었다.
“아침은 가볍게 먹고 저녁은 나가서 사 먹어요.”
잠시간 그의 손과 시선이 핸드폰에 고정되었다. 주문을 마친 그가 아일랜드 식탁을 돌아 나와 침실로 보이는 문으로 몸을 틀었다.
“30분 안에 배달이 도착할 겁니다. 그동안 샤워하고 있을게요.”
“씻지 않으셨어요?”
도하의 모습이 말끔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자, 그가 멋쩍은 듯한 신음을 냈다.
“음, 세안은 했지만, 헬스장을 이용하고 왔더니 아무래도 신경 쓰이네요.”
말하지 않았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도하에게는 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안 씻으셔도 돼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낮아진 목소리에 담긴 정욕을 감지한 세연은 홧홧한 얼굴을 끄덕였다.
이도하가 어떤 남자인지 알아 버려 키스 다음으로 이어질 행위가 저절로 연상되었다.
“심심할 테니 구경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돼요.”
주저 없이 들려오는 긍정에 세연은 헤실 웃었다.
“그럼, 침실에도 들어가도 될까요?”
다른 곳보다 그의 침실이 어떨지 궁금했다.
눈에 보이는 인테리어와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그가 자는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었다.
“세연 씨에게는 언제든 열려 있다고 했잖아요.”
그가 그녀의 시야에서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샤워하는 모습도 궁금하면 봐도 됩니다. 욕실 문은 닫지 않고 있을게요.”
그 말을 던지고 침실로 들어간 도하는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욕실 문은 열어둔 채였다.
“……은근히 장난기가 심하다니까.”
진짜로 욕실 안을 훔쳐볼까 보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옷도 다 벗으셨겠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그의 침실에 박혀 있었다.
“들어갈게요.”
욕실에 있을 도하가 듣지 못할 건데도 이러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세연은 굳이 말소리를 높이며 침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너른 침대와 사무용 테이블이 보였다.
온전한 도하의 공간에 입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세연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샤워하는 소리를 들은 순간, 해변에서 본 도하의 훌륭한 몸이 떠올랐다.
“나 이렇게 밝히는 여자였나.”
그녀는 도하를 만나기 전까지 성에 관심이 없었다.
어쩌다 야한 영화를 봐도 살짝 고양감이 들기는 했지만, 남자를 만나 깊은 행위를 하고 싶은 성욕은 일지 않았었다.
그런데 도하로 인해 그녀는 육체적인 쾌락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아 버렸다.
“이게 다 대표님 탓이야.”
그녀의 삶은 도하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머릿속이 온통 그로 도배되는 듯했다.
“세연 씨.”
물소리를 뚫고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왔네요.”
욕실 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세연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이후로도 물소리가 들리자 세연은 도하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됐어.
욕실로 들어가 똑같이 놀래 주고 싶었지만, 그의 나체를 봤다간 빼도 박도 못하고 잡아먹힐 것을 알아서 시도도 못 해 봤다.
도하와 자고 싶다고 해도 그가 주는 자극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움츠러들게 된다.
도하의 말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세연은 다른 식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침대에 앉아 보고 이불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욕실을 다시금 쳐다본 세연은 안심하고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도하의 체취를 기대했지만 섬유 유연제 향밖에 나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여기서…….”
하게 되는 건가.
이불을 움켜쥔 세연은 엎드린 채로 두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발을 흔들었다.
벌어질 첫 관계가 무섭기는 했지만 설레는 마음은 막을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도하, 그라서.
눈을 감고 있던 세연은 어느새 끊긴 물소리에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도하가 이 모습을 보기 전에 일어서려던 세연의 두 눈에 이질적인 색이 보였다.
‘분홍색?’
이불 커버 사이로 삐져나온 색깔이 하얀 침구와 어울리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였다.
끈 모양의 원단을 쭉 빼 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몸과 분리되듯이 뚝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 이게…….”
여성의 언더 커버였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그녀의 것이 아닌 속옷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세연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세연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 * *
“세연 씨.”
들리는 대답이 없자 도하는 바지만 대충 걸쳐 입고서 욕실을 나왔다.
눈에 닿지 않는 세연을 찾아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도하는 당연히 그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샤워 도중 생각난 것을 내뱉었다.
“청소 업체를 불러…….”
그러나 세연은 거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드물게 당황한 도하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녀가 갈 만한 곳을 찾아 거실에 딸린 작은 화장실 문을 두들겨 보았지만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딩동.
그녀인가 싶어 월 패드를 확인했지만 주문한 음식이 도착한 것이었다.
현관문 앞에 놔두고 가라고 주문 요청을 체크해 두었다.
일단 침실 드레스 룸에서 꺼낸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다음 그녀가 없다는 것을 방문을 다 열어 확인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세연에게로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았다. 더는 잠자코 기다릴 수 없었다.
침실 서랍 맨 위 칸을 열어 차 키를 꺼낸 그는 발 빠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지 않아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어깨와 차 시트를 적셨다.
어디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