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67)화 (67/70)

67화

“녹취 증언이 있습니까.”

“네?”

“구진형 씨가 성주아 씨를 협박했다는 물증이 있어야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 신변 보호와 스마트 워치 발급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구진형 씨의 협박에 내가 엮였다는 진술밖에 없습니다.”

초연한 도하의 표정과 덤덤한 말투에서 사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론 안 되나?

“너무 무서워서……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주아는 남자의 음심을 자극할 수 있도록 눈물이 맺힌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지금 하면 됩니다. 구진형 씨에게 전화를 걸어요.”

“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주아의 ‘네? 네?’ 소리에 도하는 귀찮은 기색을 내비쳤다.

“성주아 씨의 일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죄, 죄송합니다.”

“당장 전화 연결해서 통화 녹음해요.”

이상하다. 왜…… 호랑이굴에 들어온 것 같지?

제 발로 늪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주아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저…….”

“뭐 합니까.”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주아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아는 일단 도하의 말을 따랐다.

‘제발, 제발……. 받지 마.’

바람이 닿았는지 신호음만 가다가 이윽고 부재중 안내 음성으로 넘어갔다.

“……저, 안 받는데요…….”

“할 수 없군요. 다시 전화 올 때 잊지 말고 음성 녹음하세요.”

“네에. 그럴게요.”

“확인 차 다시 물어보죠. 구진형 씨가 성주아 씨에게 날 유혹하라고 한 게 맞습니까.”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도하의 눈빛에 주아는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핥으며 진실과 거짓이 섞인 말을 토해 냈다.

“네! 대표님을 유혹하라고 했어요. 하, 하지만 절대 전 그런 마음으로 대표님을 찾아온 게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휴.’

“나눈 대화는 녹음했습니다.”

“넷?!”

“증인 진술서로 제출할 겁니다. 동의하시죠.”

안 된다고 했다간 자신이 가담했음을 증명하는 판이라 주아의 입에서 ‘그, 그럼요.’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걸로 용건은 끝났군요.”

이게 아닌데…….

“……큼. 저어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어깨를 좁혀 아담한 체구를 더 작게 만들어 보였다. 주아는 가슴에 두 손을 겹치며 촉촉한 눈빛으로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도하가 몸을 돌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주아가 앉은 테이블에 물병을 내려놓은 손길과 목소리가 가차 없었다.

“들고 나가요.”

이, 이러면 안 되는데.

* * *

시간이 흐를수록 몸속을 누비던 키스의 감각은 희미해졌지만, 머릿속을 부유하는 도하의 얼굴만은 선명해졌다.

‘자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도하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날이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그 결이 달랐다.

딩동.

‘대표님?’

이 한밤중에 누군가가 누른 벨 소리에 세연은 성급하게 실수를 저질렀다.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무방비하게 연 것이다.

“대표…….”

그리고 눈에 닿은 얼굴에 세연의 얼굴이 확연하게 일그러진 채 굳어졌다.

“대표라고 생각했나 봐.”

화가 나 있어야 할 진형이 히죽 웃었다. 소름이 돋은 세연은 얼른 문을 닫았다.

“윽!”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닫히는 틈새로 진형의 팔이 쑥 들어왔다.

“……!”

세연이 놀란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이었다. 문틈에 낀 진형의 팔이 핸드폰을 쥔 상태로 흔들거렸다.

“대표가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세연의 시선이 진형이 켜 둔 핸드폰 액정에 닿았다.

“누구 집일 것 같아?”

화면상으론 여자의 얼굴밖에 안 보였지만 문가를 짚은 손가락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현관 안으로 들어가는 다음 사진만 봐도 무슨 정황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지? 대표는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의심이 갈 만한 증거를 보아도 세연의 동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쉬워 보이니까 잘해 준 거야.”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면서 세연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나지막이 흘렸다.

“하. 진짜 웃기네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대표님 말고 구 선배 당신이요.”

진형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못 믿나 본데 팰리스 아파트 C동 3701호로 가봐!”

물귀신처럼 세연의 팔을 잡는 진형이 무섭기보다는 오물이 묻은 것처럼 끔찍하기만 했다. 세연은 있는 힘껏 진형을 뿌리쳤다.

“어어……!”

진형이 넘어지든 말든 상관없는 세연은 황급히 문을 닫아 체인을 걸어 잠갔다.

쿵쿵!

“정세연.”

“…….”

“이 문 열어!”

등 뒤로 전해지는 진동이 거셌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아빠와 도하가 제 곁에 없을 때 진형을 어떻게 퇴치해야 하는지 터득했다.

-네. 신고 사유 말씀해 주세요.

“스토커가 집까지 쫓아왔어요.”

세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진형의 발광이 멈췄다. 그러나 집 앞을 떠나는 기척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주소지 말씀해 주세요. 

“XX빌라 401이에요.”

-순찰차가 출동할 겁니다.

“네.”

발길을 돌리지 않는 진형의 객기는 세연이 진짜로 신고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몇 분 뒤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진형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멀어졌다.

“경찰입니다. 신고받고 도착했습니다.”

세연은 문을 열어 주며 두 명의 경찰관에게 겸연쩍게 고개를 숙였다.

“경찰관분들이 오시니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면식입니까.”

인상착의를 묻는 경찰관들에게 세연은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후 문을 잠갔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만 믿습니다. 세연 씨와 내가 오늘 일로 틀어지기엔 추억거리가 워낙 많아서 안 되겠네요.]

부끄럽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녀는 간사한 수에 속아 넘어갔을 거였다.

도하의 아픈 상처를 알게 된 시간만큼 그녀를 도와주고 믿어 준 그와의 기억들이 한순간의 의심도 들지 않게 했다.

진형의 일로 진을 뺐더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가물거리는데 침대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잤어요?

도하의 목소리에 세연의 감긴 눈꺼풀이 반쯤 떠졌다. 미소가 어린 입술이 벌어졌다.

“자려고요.”

-잠이 옵니까. 나는 안 오는데.

타박하는 목소리조차 가슴을 간지럽게 해 세연은 키들거리며 자꾸만 처지는 눈꺼풀을 비볐다.

“그렇지만 잠 와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우웅, 찾…… 갈……게요…….”

내일 찾아갈게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다물어지는 잇새로 뭉개졌다.

-잘, 자요.

내리뜬 눈과 반듯한 이마 그리고 다물어진 입술을 떠올리게 하는 음색이었다. 

“네에…….”

잠을 설치게 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세연은 헤실 웃고서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반짝, 세연의 눈이 알아서 떠졌다.

분주히 집을 나설 채비를 마친 세연은 택시를 타고 도하의 집으로 향했다.

[못 믿나 본데 팰리스 아파트 C동 3701호로 가 봐!]

진형의 입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정보였다.

팰리스 아파트에 도착한 세연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아파트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세연은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잘 잤어요?

그를 놀라게 하려던 그녀의 계획을 알지 못한 그는 약간의 감정이 담긴 듯한 목소리를 비딱하게 냈다.

“저, 지금 대표님 아파트 앞이에요…….”

-…….

응?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못 들었나 싶어 세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대표님?”

-지금 이 시각에 말입니까.

놀란 듯한, 아니 믿기지 않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네. 대표님 보러 왔어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아 세연은 자그맣게 웃었다.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일단 공동 현관 번호는 c3701#입니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들어가 있으라는 소리에 그가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디냐고 묻기 전, 서두르는 음성이 이어졌다.

-지금 집이 아니고 호텔입니다.

도하는 집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려 주었다.

하지만 집주인 없이 들어가기가 어색해 세연은 현관문 앞에서 도하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연 씨.”

다급한 보폭으로 세연에게 다가온 도하의 얼굴엔 미소의 흔적이 없었다.

“들어가 있지. 다리 아프게 왜 서 있어요.”

딱딱한 말투와 서늘한 표정이었지만, 저를 걱정하는 도하의 마음을 알아 세연은 은근히 웃음이 났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말은 그래도 기분이 풀렸는지 수려한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빠르게 현관 키패드를 누른 도하의 뒤에서 세연은 미소를 품은 입술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럽시다.”

그녀를 힐긋 돌아본 그가 신발을 벗고 현관과 이어진 거실로 쭉 걸어갔다.

깔끔한 집 내부는 어쩐지 대표실을 연상시킬 만큼 단조로웠다. 통창이 보이는 널찍한 거실 중앙에 긴 소파가 놓여 있고 벽걸이 TV가 벽면을 가득 채운 것 외에는 구경할 만한 게 없었다.

“편하게 앉아 있어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는 도하의 목울대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아침 먹었어요?”

소파에 앉은 세연은 나직한 물음에 그제야 허기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대표님은요?”

“원래도 아침은 잘 안 먹습니다.”

“아……”

“그렇지만 세연 씨하곤 먹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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