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가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세연 씨에게도 아버님께도 더 잘하겠습니다.”
사윗감으로 원치 않는다는 명한의 뜻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그를 대하는 말투와 태도는 더없이 정중하고 예의가 발랐다.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딸의 짝으로 인정하기 싫지만, 눈앞의 청년은 세연의 상사였다. 더는 싫은 티를 낼 수 없어 명한은 적당하게 말을 돌렸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러지 않아도 됩니다. 버스 타면 금방입니다.”
세차게 고갯짓한 노력이 소용없게 대표의 고개가 겸손하게 숙여졌다.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혼자 가셨다는 걸 알면 세연 씨가 슬퍼할 겁니다.”
자신에게 이러는 것도 세연을 위해서리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마울 수밖에 없는 아비는 미래의 사위가 열어 주는 차 안에 올라탔다.
* * *
“진형 씨.”
“팀장님.”
앉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서 있던 진형은 혜선의 차가운 표정을 마주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팀장님……!”
핏기가 빠진 진형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혜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견책 처분이 내려질 겁니다. 마음 준비하세요.”
“이럴 수 없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뭔 말이 필요하죠?”
혜선은 아랫사람들에게 엄한 상사가 아니었다.
부하 직원들이 잘했을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실수를 해도 넓은 이해력과 포용력으로 직원들을 품어 주었던 혜선이 가차 없자 진형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제 입장을 들어 보지도 않으시고 징계하신다니 드리는 말입니다.”
혜선이 올 동안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었던 진형은 그녀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 필사적이었다.
“구 대리가 일으킨 문제가 대체 몇 번째죠? 더구나 고작 실수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더군요.”
눈매를 뾰족하게 굳힌 혜선이 진형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제의 일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대표가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구나!’
이 일을 무마하지 못한다면 승진에서 더 멀어지게 될 거라고 여긴 진형은 잘근 깨문 입술을 부들거렸다.
“제 사정을 들어 보시면 조금이라도 이해되실 겁니다. 세연 씨가, 바람을 피워서…….”
진형의 입에서 혜선이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세연이는 저 몰래 대표님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성을 잃어 세연이의 부친께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던 겁니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네.”
진형은 진실로 그리 믿고 있었다. 도하가 끼어들어 세연과 자신이 헤어지게 되었으니 엄연히 피해자는 자신이라고 여겼다.
“그래요. 그렇다면 정세연 씨의 말도 들어 보죠.”
“예?”
“구 대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니까요. 양쪽 입장을 들어 보고 판단하죠.”
그때였다.
똑똑.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온 세연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혜선이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열어 두세요.”
“네.”
“확인할 게 있어서 세연 씨를 불렀어요.”
“네. 말씀하세요.”
“구 대리가 말하길 세연 씨가 바람을 피웠다는데 사실인가요?”
세연의 경멸 어린 시선이 진형에게 꽂혔다.
“저는 구 대리님과 사귀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정세연. 너와 대표님이 부적절한 만남을 이어 가는 모습을 내가 똑똑히 사진으로 남겨 두었어. 둘이서 포옹했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며칠 전, 도하와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도 진형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이별한 뒤예요. 잊었어요?”
“순진한 소리 하네. 이별하자마자 대표님과 포옹을 한다고? 나와 헤어지기 전부터 그런 사이니 가능한 거지!”
진형은 혜선이 있는 것도 잊은 채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구 대리님에게 더는 할 말 없어요.”
“왜 말 못 해? 내 말이 사실이니까 할 말이 없는…….”
“구 대리.”
진형의 말허리를 자른 혜선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저번 휴가, 아파서 낸 게 아니라죠.”
“……!”
제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입을 나불거렸던 진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세연 씨를 몰래 따라다녔고, 이를 알게 된 세연 씨의 아버님께 협박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헉!”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진형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 선아연 씨가…… 젠장!’
소리를 낸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는 직원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자폭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형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가 한 짓이 걷잡을 수 없이 널리 소문이 날 것을, 입이 가벼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 * *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승차감에 명한은 절로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됩니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깜빡 잠들 뻔한 명한이 무거운 눈을 부릅떠 자신을 쳐다보는 도하를 응시했다.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인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남들은 그의 얼굴을 보면 움찔하길 마련인데 도하에게서 어떠한 경련조차 보이지 않자 명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자고로 남자란 강단이 있어야지.’
명한이 원하는 딸의 남편감은 처자식을 먹여 살릴 근성과 아내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건강을 갖춰야 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도하는 합격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몸 관리를 꽤나 하는지 체격이 다부졌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됩니까.”
명한은 제일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고자 시동을 걸었다.
“친조부와 부모님 그리고 누나가 있습니다.”
“가족분들과 살고 있습니까.”
“본가에서 나와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하고도 현재 사는 집에서 신혼 생활을 보낼 겁니다.”
“커흠!”
명한의 의중을 정확히 캐치하여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내놓는 도하의 센스는 카피라이터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하듯 명불허전이었다.
고이 키운 딸이 시집살이를 면했으면 하는 아비의 속을 들킨 것이다. 명한이 헛기침을 몇 번이나 이어 나가다 슬쩍 욕심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어른들을 모시고 몇 년간은 살아야 정이 드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는 건 아닙니다.”
“예. 세연 씨에게 먼저 허락을 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닌데.
되레 도하에게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어 명한은 괜히 퉁명스럽게 목소리를 울렸다.
“그건 그렇고 세연이는 회사에서 잘하고 있습니까.”
세연의 생각을 하는 도하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
“직원들 사이에서 세연 씨의 실력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 회사에 없어서 안 될 재원이지만 몇 년 안에 훌륭한 카피라이터가 될 겁니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도하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져 명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딸이 왜 이 대표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딩동. 도착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도착 지점을 알렸다. 분식 가게 앞에서 차가 멈추고, 이내 도하와 명한이 내렸다.
“들어가서 차 한잔이라도 하지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다음에 세연 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딸을 향한 그의 마음이 갸륵해 명한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도하에게 전했다.
“내 딸 잘 부탁합니다.”
웃지 않아도 출중한 얼굴이 명한의 말을 듣자마자 신수가 훤해졌다.
“예.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대표님을, 아니 자네만 믿겠네.”
“예. 아버님.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던 도하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정 씨!”
멧돼지가 달려오는 듯한 발소리와 귀를 찌르는 목청이 동네방네 퍼졌다.
씩씩거리는 아주머니를 본 도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 씨!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미간을 한껏 찡그린 도하는 이를 악무는 명한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럽니까.”
명한의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번졌다.
“선량한 손님을 잡는 것도 유분수지!”
“무슨 일입니까.”
명한을 생각해서 상황을 주시하려던 도하는 나서지 않을 수가 없어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 그쪽은 누구기에?”
명한에게 대거리하면서도 신경 쓰였던 남자였다. 눈앞의 남자가 명한의 일행으로 보이자 박 씨의 혀가 절로 굳었다.
“이분의 사위입니다.”
“정, 정 씨의?”
박 씨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으로 도하와 명한을 번갈아 보았다. 딸 하나 있다는 건 알지만 결혼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예.”
그러나 신뢰성 있는 도하의 얼굴과 단호한 음성이 박 씨의 의심을 싹둑 잘랐다.
“……사위가 맞나 본데 정 씨와 나 사이의 일이니 끼어들지 말게.”
어른의 위엄을 잡으려 박 씨가 주눅이 든 어깨를 쫙 펴며 명한에게 눈을 부라렸다.
“정 씨. 정 씨가 경찰에게 날 꼰질렀지!!”
“나 아닙니다.”
“그럼 누가 그랬어? 정 씨밖에 더 있어욧?”
“아니라고 했잖소!”
“누가 그 말을 믿을 줄 알아요?! 암만 생각해도 정 씨밖에 없어! 사실대로 말하라니까!”
박 씨는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았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주장하고 계시는군요.”
“뭐? 뭐요?”
새파랗게 젊은이에게 이런 막말은 처음 들어 본 박 씨의 입이 벌레가 들어가도 될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장인어른. 제가 해결하고 올라가겠습니다. 안에 들어가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