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63)화 (63/70)

63화

세연의 발목에 발찌를 채운 도하가 고개를 들어 마음에 드느냐는 시선을 보였다.

“난 마음에 드는데.”

내려다보게 된 도하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세연이 흠칫거리자 발목 아래 늘어진 포인트 액세서리가 흔들거렸다. 그에 흡족한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생각한 대로 잘 어울리네요.”

도하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된 세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

“이미 몇 번이고 머릿속에선 실행했지만요.”

상상으로나마 그녀를 가졌을 그의 욕망은 뚜렷했다.

뜨거운 애무 끝에 녹아내린 그녀를 품었을 그는 너를 가졌노라고 거리낌 없이 밝혔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상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를 수가 없어 세연은 멋대로 뻗어 가는 의식을 날리고자 고개를 저었다.

그게 도하의 눈에는 거절로 보인 모양이었다.

“싫습니까?”

“아아뇨!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렇지만 비싸 보여서…….”

“비싸 봤자 세연 씨보다 못합니다.”

상체를 편 도하가 세연과 시선을 맞췄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니 받아 줘요. 내일 차고 오면 더 좋고.”

값비싼 액세서리보다 빛나는 도하의 마음이 세연을 더없이 기쁘게 했다.

“고마워요. 선물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녀의 말이 더한 선물인 것처럼 도하의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가 선명하게 짙어졌다.

“내일이 여러모로 기대가 되네요.”

* * *

얇은 옷 속으로 그의 손이 들어간다. 그리고 손안에 가득 차는 말랑한 가슴과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정점.

‘아래도, 만져 줘요…….’

달콤한 숨결을 흘리는 입술을 겹치며 긴 손가락이 그가 들어갈 자리를 찾듯이 벌어진 사이를 어루만진다.

처음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손에 달라붙는 감각에 미쳐 거칠어졌다.

‘아흣.’

그 반복 행위에 따른 야릇한 소리.

“……돌아 버리겠네.”

하지만 팽팽해지는 건 도하의 하체일 뿐, 지독한 갈증만 선사한 세연은 그의 욕망을 마주하곤 놀라 달아나듯이 흐려지다 사라졌다.

낮이면 그나마 참을 만한데 밤엔 몇 달째 참아 온 욕망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 도하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세연을 돌려보내기가 갈수록 힘들어진 도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썼다.

차가운 물을 한껏 끼얹자 그녀의 허락 없이 멋대로 망상을 이어 나간 머릿속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후, 다른 생각을 하자.”

세연의 생각을 이어 나갔다간 혼자만의 욕망에 삼켜져 꼬박 밤을 지새울 게 분명했다. 도하는 의식적으로 음심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을 떠올렸다.

‘구진형.’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녀에게 사과했으니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요?

아직 잠들지 않은 혜선에게 전화를 건 도하였다. 그는 시선이 닿은 전면 유리창으로 싸늘한 미소가 맺힌 자신의 표정을 마주 보았다.

“선배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진형을 치우려면 혜선의 협조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선배라는 호칭을 입에 담는 순간, 혜선은 이 일이 도하의 개인적인 일임을 눈치껏 알아차렸을 것이다.

“파일을 보낼 테니 들어 봐요.”

-뭔데 그러니?

고개를 갸웃거렸을 혜선의 목소리가 잠잠해지다가 다시 들려왔을 때는 크게 화가 나 있었다.

-허, 정말 못쓸 사람이었네. 구 대리.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어?

“구진형 씨 일 잘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할 것 같지가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보고하려고 했는데, 카피라이터 서포터즈 17기 멘토링을 성의 없이 지도한 모양이야. 참가자들의 불만이 상당히 많아.

한 사람 때문에 제이온의 명성이 흠집 나도 진형을 해고할 수 없으니 제작 팀을 이끄는 혜선은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혜선의 근심을 듣게 된 도하는 전면 창으로 걸어가 자신의 표정을 숨김없이 비춘 유리에 손을 댔다.

“따로 불러내서 구진형의 변명을 들어 보세요.”

-그리고?

“하던 짓대로 거짓말만 늘어놓을 겁니다. 선배는 세연 씨를 불러들여서 구진형이 한 말들이 거짓이었다는 걸, 그녀가 밝힐 수 있게 도와주세요. 물론 방청객들이 있으면 좋겠죠.”

도하의 입가를 가르는 미소가 한파처럼 차디찼다.

* * *

“안녕하세요.”

구두를 신은 세연의 발목에서 돌고래 꼬리 모양의 액세서리가 찰랑찰랑 흔들거렸다.

“세연 씨. 어서 와요. 응? 발찌네요!”

“예뻐라.”

눈썰미가 있는 직원 몇몇이 세연이 찬 발찌를 알아채곤 호기심을 드러냈다.

“구 대리하고 화해했나 봐.”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마음을 능숙하게 감춘 채 세연은 마침 출근한 진형이 듣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구 선배와는 헤어졌어요.”

“뭐? 그럼 이건…….”

“다른 분에게 선물 받았어요.”

“다른 누구……?”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질문 공세를 방긋 웃는 얼굴로 차단한 세연은 자리로 돌아가 PC전원을 켰다.

“10시까지 업무 보고서 올리세요.”

혜선의 목소리가 키보드 소리가 가득한 사무실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구 대리. 이리 와 주세요.”

“네.”

유달리 딱딱한 혜선의 목소리를 눈치챈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세연도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혜선의 책상 앞에 서는 진형을 응시했다.

“전주 업무 진행 현황을 살펴보았어요. 그런데 내가 전달받은 사실과 전혀 다른 상황이 기재되어 있더군요.”

“예? 그럴 리가 없는데요?”

“구 대리. 내가 없는 말을 지어서 한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제 말은, 착오가 있는 듯하여…….”

“카피라이터 서포터즈 17기 참가단의 항의가 들어왔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나요?”

책상 위에 올린 양손을 교차한 혜선의 목소리가 더욱 서늘해졌다.

“한 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두 명 정도야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다지만 참가 전원이 클레임을 걸었어요.”

“…….”

“구 대리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제이온의 평가 점수가 내려갔다는 겁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진형의 머리가 숙여졌으나 혜선은 진심이 우러나지 않은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과실도 있더군요. 심각한 사안이니 구 대리의 입장을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대화를 나누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회의실로 이동하죠. 먼저 가 있으세요.”

“예…….”

기운이 확 죽은 진형이 복도로 나가자 혜선의 시선이 세연에게로 돌아갔다.

“정세연 씨도 5분 있다가 들어오세요. 대표님과 상의한 일입니다.”

도하가 혜선에게 전날의 일을 설명했음을 알게 된 세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아연 씨.”

“앗! 네.”

“커피 세 잔 부탁할게요. 10분 뒤에 가져와 줘요.”

“예!”

가만히 있다 불리게 된 직원이 한껏 긴장한 표정을 빠르게 풀었다.

내심 회의실 안에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혜선이 부드럽게 웃고선 부서를 나서자 제작 팀원들이 속닥거렸다.

“구 대리가 대체 뭔 짓을 저질렀기에 혜선 팀장님이 저러시지?”

“그러게요. 대표님도 알고 계신 거 보니 사소한 실수가 아닌 듯한데…… 세연 씨. 뭐 들은 거 없어요?”

“네?”

“그래도 진형 씨와 사귀었으니까 들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무슨 사정인지 들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런다고 하니 더 물어볼 말이 없게 된 제작 팀원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세연의 신경은 혜선이 말한 시각에 쏠려 있었다.

겨우 1분이 지나 있었다.

* * *

한편, 세연이 출근한 후, 명한은 꺼내 입었던 옷들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딸. 아빠 집에 간다.
케이크 사 두었으니 먹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