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녀의 생일은 모레였다. 왜 아빠가 올라오셨는지 이제야 깨달은 세연은 식탁에 라면 냄비를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
“더 있다가 내려가세요. 서울 구경도 하시고요.”
“안 돼. 아빠도 바쁜 사람이야. 넌 피곤할 텐데 어서 자.”
그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아빠를 따라갈 자가 없을 듯했다. 설득해도 먹히지 않는 대화의 중점을 알기에 세연은 힘을 빼지 않았다.
“알겠어요. 다 드시고 이 방에서 주무세요.”
아빠가 잘 곳으로 마땅치 않았지만 옷 방으로 쓰는 작은 방이 있었다.
아빠가 주무실 이부자리를 깔아 주며 세연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 * *
“딸.”
으음. 잘 떠지지 않는 세연의 눈에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아빠…….”
“밥 차려 놓을 테니까 그동안 씻어.”
아직 알람이 울릴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일찍이 딸을 깨운 아빠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세연은 멍한 정신을 차리려 기지개를 쭉쭉 켰다.
“흐으응!”
맛있는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나갔다가 보게 된 아침상에 세연의 입술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아빠, 내일이 내 생일이에요.”
미역국만 없다 뿐이지 이른 아침에 먹기엔 심히 부담스러운 요리들이 식탁을 꽉 채울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대체 몇 시부터 일어나 하신 거야?
“천천히 먹고 가라고 일찍 깨운 거니까 든든히 먹고 가.”
“아빠…….”
아빠 딸은 잠이 고픈데…….
그러나 아빠의 정성을 생각해서 안 먹을 수 없는 세연은 이른 아침부터 폭식했다.
* * *
집을 나선 세연은 몇 걸음 못 가 눈빛을 굳혔다.
처음 보는 차에서 진형이 내렸다.
“세연아!”
“하아…….”
한숨부터 나오게 하는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세연은 못 들은 척 뛰었다. 그러나 남자의 신체 조건을 제칠 순 없었다. 세연의 앞을 가로막은 진형이 양팔을 벌렸다.
“잠시만!”
때문에 멈춰 서게 된 세연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배. 이러지 말아요.”
“나도 알아. 이러면 안 된다는 거.”
고개를 숙이며 진형이 보이는 행동에 세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선배……!”
진형이 무릎을 꿇었다.
“내가 널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내가 왜 모르겠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진형을 힐긋거리자 세연은 미칠 것 같았다.
“일어나세요!”
“딱 한 번만 나와 만나 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서 일어나요. 지금 선배가 하는 행동, 정도를 넘어섰어요.”
그녀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행동하는 진형이었다.
“만나면 뭐가 달라져요? 선배도 내게 실망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끝인 거예요.”
“어젠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근데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잘못했더라. 네가 서운할 짓을 많이 했어. 그래서 네 생일만큼은 좋은 추억으로 남겨 주고 헤어지고 싶어.”
이마를 짚던 세연은 진형이 알 것이라고 생각 못 한 자신의 생일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놀란 표정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정말 못된 애인이었구나. 네 생일을 왜 몰라. 네게 무심했던 건 인정해. 하지만 널 좋아한 감정은 부정하지 말아 줘. 어떻게 네 생일을 잊겠어”
고개를 숙였던 진형이 대뜸 무릎을 폈다. 빠르게 일어난 진형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 무언가를 꺼내 왔다.
“받아 줘.”
“제가 이걸 왜 받아요.”
“네 선물이니까. 몇 주 전부터 사다 놓은 거야. 구두인데 낼 나와 만날 때 신고 와 줘.”
“선배!”
사람이 이렇게 단기간에 싫어질 수도 있구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을 줘. 너라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냉큼 감정 정리가 되겠어?”
도무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진형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진형의 마음을 어떻게 단념시켜야 할지 머리가 터질 것 같던 세연은 고요히 생각에 잠기었다.
“난 무리야. 우리 아름답게 이별하자.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말이야. 다른 건 더 안 바라.”
“……알겠어요.”
진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형이 헛된 희망에 매달리기 전에 세연은 다음 말을 멈추지 않고 이었다.
“제 조건을 들어준다면 내일 만날게요.”
“뭔데?”
“지금 하는 말, 지킨다고요.”
세연은 핸드폰을 들어 녹음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녹음한다는 거야?”
“네.”
“알았어.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러자.”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만날 일은 없다고 못 박자 진형이 불만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세연이와 만나는 것으로 우리의 연애 기간은 끝납니다.”
“202x년도 8월 23일.”
자신의 목소리도 저장한 후 세연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내 선물도 가져가야지.”
진형이 내민 것을 억지로 가져가야 했다.
세연은 쇼핑백을 열어 보지 않고서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진형이 뒤로 그녀를 따라붙으며 빠르게 얘기했다.
“내 차 타고 가.”
“아뇨. 걸어갈게요. 내일, 어디서 만날지 메시지 넣어 줘요.”
“푸후, 알겠어. 이따 보자.”
멈춘 진형의 고개가 숙여졌지만 위로해 줄 마음이 없는 세연은 쌩하니 그를 지나쳤다.
버스에 올라타고서 세연은 쇼핑백에 든 상자를 열어 보았다. 분홍색 구두가 차장의 햇빛을 받아 물결처럼 반짝거렸지만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귀여운 애인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네.”
진형의 이상형에 맞게 그녀를 재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면서 사랑?
짜증이 실린 손으로 상자를 닫던 세연은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N호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29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