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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8)화 (58/70)

58화

다음날 출근한 세연은 어리둥절한 상황을 맞이했다.

“세연아.”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진형이 세연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인사했다.

“어젠, 잘 들어갔어?”

둘만의 만남을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말한다?

갑작스러운 진형의 태세 전환에 어이가 없는데 그보다 기함할 일이 있었다.

“진형 씨와 세연 씨, 정말 잘 어울려.”

“네?”

“두 사람 사귀는 사이라며.”

서 있는 자세가 허물어질 것 같았다.

싸늘하게 식은 심장이 요동쳤다.

“비밀 연애라니. 정말 감쪽같이 몰랐다니까.”

“저도요. 구 대리님이 말 안 했으면 결혼 소식 들렸을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기가 막힌 세연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팀원들은 축하의 말을 쏟아 냈다.

“그러네! 좋은 소식 들리는 거 아니야?”

“하핫. 아직은 아니고, 곧 그렇게 되게 해 보겠습니다.”

진형이 쑥스럽게 웃으며 세연을 쳐다보자, 세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형 씨가 세연 씨를 엄청 사랑하는가 본데.”

“하하하.”

“아니…….”

질렸다는 표현보다 잘못 걸렸다는 말이 맞을 듯했다. 두려움이 온몸을 건드리자 세연은 하려던 말도 제대로 끝맺을 수 없었다.

“세연아.”

그녀의 어깨로 진형의 손이 올라왔다.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나올수록 내가 무슨 짓을 할 건지 알려 주겠다는 듯,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

세연은 입을 앙다물었다.

아니라고 말해 봤자 진형이 싸웠다고 말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 99%로 다들 화해하라고 거들 거였다.

뻔히 그려지는 스토리였다.

나중에 가서 헤어졌다고 해도 진형이 그녀의 탓으로 돌릴 것이었다.

세연이의 마음이 달라졌다느니 뭐라느니, 그런 말을 해 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원들이 진형의 말만 믿고서 그녀를 안 좋게 여길 것이었다.

봐라.

“두 사람 축하해요.”

“이걸로 사내 커플 1호 탄생이네.”

하하 호호.

비겁한 수에 속은 이들은 진형의 말이 거짓이란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까.’

기발한 생각이 나지 않아 세연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당할 수만 없었다.

“이상하네요.”

조용히 있던 혜선이 말문을 뗐다.

“정세연 씨는 아닌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보이나요?”

정시라 드문드문 들어오는 제작부 인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당혹감이 비친 진형의 목소리가 터졌다.

“저희 사귀는 거 맞습니다.”

“구 대리의 입장은 알겠어요. 하지만 세연 씨의 사정은 또 다른 것 같아서요. 정세연 씨가 말해 봐요.”

세연을 응시하는 혜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웃고 떠들던 사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세연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귄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어제부로 헤어졌어요.”

그녀가 처한 핵심적인 사실만 간략하게 짚자 잠자코 있던 이들이 놀란 얼굴로 진형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런 말 드리기 창피하지만 세연이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 진형은 두 손을 저어 가며 눈매를 파들거렸다.

“세연아. 아직도 내게 화 안 풀렸어? 왜 그래, 정말.”

“선배님이야말로 왜 그래요.”

진형이 원하는 대로 끌려갔다간 죽도 밥도 안 되었다. 세연은 물러나지 않고 반박했다.

“세연아. 아무리 삐졌다고 해도 내게 이러면 안 되지. 날 생각하는 네 마음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

“두 사람.”

차디찬 음성이 진형의 말소리를 막았다.

세연이 다시금 혜선을 응시하자 매서운 시선이 진형에게 박혀 있었다.

“한두 마디로 두 사람 입장 차이가 좁혀질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 다들 일하는 공간에서 이러지 말고 휴게실에 가서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오세요. 그리고 구 대리.”

“네. 팀장님.”

“개인적인 일로 회사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말아요. 오늘 구 대리의 행동은 적절치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진형이 반론의 여지를 찾을 수 없게 혜선은 엄중하게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세요.”

제작팀들이 빠릿빠릿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세연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 * *

그렇게 세연과 진형이 휴게실로 이동한 반면 혜선은 조용한 곳을 찾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세연을 짝사랑한 도하의 마음만 알았지 진형과 세연이 연애하고 있었다는 건 듣지 못했다.

이 사실을 과연 천하의 이도하가 몰랐을까.

‘몰랐을 리가.’

단번에 고개를 저은 혜선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고 나서 귓가에 핸드폰을 바싹 갖다 댔다.

-네. 선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도하의 목소리가 차분해 혜선의 속이 껄끄러웠다.

“정세연 씨와 구 대리가 사귄다는데 넌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너 알고도 세연 씨를, 후우.”

-그런 거 아닙니다.

도하의 개입으로 진형과 세연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고 여기던 혜선의 의심을 깔끔한 단언이 잘라 냈다.

-구진형은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다.

부하 직원의 사생활을 지켜 줘야 하지만 도하는 진형을 치워야 할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구진형이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다.

-선배는 어떻게 안 겁니까.

“구 대리가 사원들 앞에서 밝혔어. 물론 세연 씨 동의 없이 말이야. 그 과정에서 다투는 두 사람을 휴게실로 보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인지 대답 없이 전화가 끊겼다.

“……알아서 하겠지.”

이게 잘한 짓인가 싶었지만 그녀가 개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 * *

“좋은 말이 안 나올 건 알죠? 헤어지자고 했어요. 난.”

세연은 저처럼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진형을 돌아보았다.

“나는 못 헤어지겠다고 했어.”

“그래서 이렇게 밝혀서 속 시원해요?”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네가 내 사랑을 못 믿어서 증명해 준 건데.”

“덕분에 선배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네요. 내가 얼마나 만만했으면 이래요.”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이기적이다. 내가 널 만만하게 본다고? 그건 너겠지.”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던 진형은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반박을 하며 떼를 썼다.

“나는 네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넌 어떻게 너만 생각해?”

진형의 말은 매번 같았다. 자신이 잘하겠다. 그러면 된 거 아니냐.

그녀가 몇 번이고 말을 해도 말귀를 들을 생각이 없으니 진형과의 대화는 자꾸만 겉돌고 있었다.

“선배야말로 현실을 받아들여요. 이런다고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이별을 선택한 건 선배가, 남자로 좋아지지 않아서예요.”

“허. 그럼 나랑 왜 사귄 거야!”

“그건 내가 성급했어요. 선배와 사귀면 호감이 사랑으로 변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분개하는 진형에게 세연은 허심탄회하게 제 마음을 보였다.

“누가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의 첫 시작이 잘못된 거였어요.”

“아니. 시작이 잘못된 게 아니라 네가 잘못한 거야. 나를 좋아하도록 노력이나 해 봤어?”

지금이라도 진형이 마음을 바꿨으면 해서, 선후배로 남을 수 있도록 그녀는 애썼지만 진형은 그런 세연의 기대를 허망하게 부쉈다.

“……네.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우리 제발…….”

“사과하지 말아요.”

울분이 응어리진 가슴으로 파고드는 말소리가 세연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사과할 사람은 구진형 씨니까요.”

세연은 뒤돌아보지 못하고 목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녀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진형의 표정이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당혹감이 번진 얼굴의 미간 사이가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에 침을 한번 덧바른 진형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대표님.”

도하는 진형의 말을 무시한 채 세연의 옆으로 향했다. 

세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하에게 닿았다.

도하의 싸늘한 표정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내내 긴장해 있던 세연은 그런 도하를 보자 그제야 맥이 풀렸다.

“얘기 들었습니다.”

“어디까지요?”

“구진형 씨가 치졸한 짓을 했다는 것 정도.”

도하는 듣는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버젓이 진형의 인격을 깔아뭉갰다.

“대표님, 세연이와 저 사이의 일입니다.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그럴 수 없겠군요. 내가 정세연 씨를 아주 많이 좋아해서 말입니다.”

세연과 자신을 하나로 묶은 진형의 주장은 도하의 비소로 헛되게 날아갔다.

“자격이야 충분하다고 보는데.”

“…….”

“전 애인인 누구와 달리 말입니다.”

“정세연. 대표님이 널 좋아한다고 해서 날 찬 거야? 내 앞에서 말해 봐.”

“나를 상대해야죠. 구진형 씨.”

상대적으로 만만한 세연을 물고 늘어지려는 진형의 치졸한 방식을, 도하가 살벌한 음성으로 원천 봉쇄했다.

“네게 정말, 실망이다.”

도하의 날 선 기운에 짜그라진 진형은 끝까지 못난 모습만 보였다.

그러고는 홱 돌아섰다. 

“저렇게 나오니 헤어졌다고 말 못 했군요.”

“네…….”

진형이 세연을 천하의 나쁜 년으로 몰아세우는데도 그녀의 마음을 곡해하지 않고 이해해 주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녀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알아서 차단해 주겠다는 눈빛이 든든했다. 그러나 세연은 자신이 편하자고 도하를 앞세워 그의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네.”

이런 그녀가 답답하고 서운할 수도 있을 텐데, 도하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부서까지 같이 가 주세요.”

그러나 세연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한 방 먹었다는 듯 도하의 눈동자가 확연하게 커졌다.

신선한 표정을 길게 볼 수 없어 좀 아쉬웠다. 그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했다. 태연하게 표정을 바꾼 그가 그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며 옆으로 다가와 발을 맞추었다.

“참고로 난 비밀 연애할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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