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왜 보고 싶었는지 모르지 않을 겁니다.”
오만한 미소였지만 눈동자에 비친 도하에게서 건조한 느낌이 났다.
낮의 열기가 식은 아스팔트를 걷고 있는 듯했다.
어딘가 한없이 외로워 보이는 도하를 보자 세연은 ‘보고 싶었다.’라는 말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의 입술이 고요히 다물려 있었다. 세연은 그를 힘들게 한 원인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말할 생각이 없다면 강요하고 싶지 않기에 조용히 기다렸다.
아무래도 회사 일이 아닌 다른 일과 관련되어 있는 듯했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도하와 둘만 있는 차 안은, 그리 편한 장소가 아니었다. 차창을 열어 두어도 후각이며 청각이며 그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나, 세연 씨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탈게요.”
세연의 고개는 어느새 끄덕거리고 있었다.
* * *
도하가 세연을 데리고 간 곳은 서울 야경이 보이는 백화점 옥상이었다.
회전목마를 비롯한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밤과 경계를 나누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신나는 음악 소리로 가득했다.
“못 마시는 음료 있습니까.”
그가 그녀를 앉혀 놓은 하얀 벤치 뒤, 고개만 돌리면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연유 들어간 커피만 아니면 괜찮아요. 그리고 시원한 게 좋겠어요.”
“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회전목마의 전광판이 도하의 자태를 후광처럼 비추었다.
워낙 특출난 외모인 그는 아이며 어른 할 것 없이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광경을 보자니 뭐랄까, 그에게 사랑받는 이 현실이 동화처럼 느껴졌다.
“추천을 받은 자몽티와 레몬티예요. 세연 씨가 마시고 싶은 걸로 골라요.”
커피만 마실 것 같은 그가 절대로 고르지 않을 것들이었다. 그녀를 생각해서 사 왔을 도하의 마음이 미풍처럼 그녀의 심장을 건드린다.
“자몽티로 할게요.”
세연은 소담하게 웃었다. 그러자 도하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형제 있습니까.”
얕은 웃음이 끊겼다.
도하의 시선은 어디론가 향해 있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한 이후로 그녀를 두고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적 없던 그였다. 그랬던 도하가 무얼 보고 있는지 궁금해 세연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형제로 보이는 두 어린아이를 보고 있었다.
반사되는 불빛도 투영되지 않을 만큼 내려앉은 눈동자는 어둑했다.
“저는 외동이에요. 대표님은 형제가 있나요?”
“누나가 있습니다.”
고독해 보이는 표정의 원인을 짐작케 하는 목소리가 시끄러운 소리에 파묻히지 않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사이가 안 좋죠.”
“……혹시, 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있나요?”
그녀를 보는 고요한 표정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누나와 숨바꼭질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티룸 수납장에 숨었었죠. 이내 누나가 문을 잠갔고, 이후로 몇 시간 째 갇혀 있었습니다. 누나와 약속한 게 있어 소리도 내지 못했죠.”
“…….”
“뒤늦게 도와 달라고 외쳤지만 문이 열리기 전에 의식이 끊겼습니다. 깨어나 보니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후우.”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빠져 오는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그렇게.
도하의 사연을 아직 다 듣지도 못했는데 세연은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가, 누나 몰래 들어간 것이라고.”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남자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른들께 혼이 날까 두려웠겠죠. 지금이야 이해하지만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느낀 배신감에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죠.”
가슴을 먹먹하게 적시는 목소리는 그가 겪었던 감정을 담아내고 있어 끝마디의 발음이 미약하게 뭉개져 있었다.
“어른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누나는 떳떳하게 나를 보았습니다. 정말로 내가 그랬다는 눈빛이, 내가 의식을 잃어 기억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누나의 본심이 어린 눈에도 보이더군요. 그래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연은 그를 아프게 한 시절로 돌아가 어린 도하가 상처받지 않도록 문을 열어 주고 싶었다.
“그날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나조차도 몇 년 전 엘리베이터 사고만 아니었으면 기억나지 않았을 일로요. 누나는 내가 그 일을 잊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네요.”
누구를 향한 비소인지 모르지 않게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는 바닥을 칠 것처럼 낮았다.
쓰게 웃던 도하가 세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세연의 뺨을 눌렀다.
“울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한 방울 두 방울 고인 눈물은 줄기가 되어 세연의 얼굴을 덮었다.
“울지 말아요.”
“대표님이 울지 못하니까, 제가…….”
“그래서 대신 울어 주는 거다?”
“네에. 흐응, 흐흑.”
그러니 울게 놔두라며 세연은 통곡하듯 끅끅거렸다. 마를 새 없이 나오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도하의 표정은 어느샌가 환해져 있었다.
닦아 주기보다는 눈물을 이리저리 번지게 하는 손길 같았지만 세연은 뭐라 불평할 수 없었다.
“우는 게 왜 이리 좋지?”
“…….”
정말로,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라 세연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일도 울리고 싶게 하지 맙시다.”
울리고 싶다는 속뜻을 내비치는 도하의 표정이 위험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세연은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쳤군요.”
아쉬움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도하는 뺨을 닦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일 붓겠는데요.”
“누구 때문인데요…….”
“동정심 가지라고 한 말이긴 한데, 너무 잘 먹혀서 말이지.”
그러니 자신의 탓이 아닌 그녀의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도하의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러 물기를 닦아 내던 세연은 괜히 골이 나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마세요.”
“살갗이 붉어졌네요.”
세연의 턱을 돌려 그의 시선을 맞추게 한 도하가 야릇하게 웃었다. 그는 순식간에 손수건을 도로 가져갔다.
“제가 할 거예요.”
“가만.”
팔을 뻗는 세연을, 낮은 목소리로 멈추게 한 그가 진중히 부탁했다.
“내가 하게 해 줘요.”
어떻게 싫다고 할 수 있을까.
세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다정한 손길이 재차 이어졌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울다가 웃게 하는 남자는 이도하밖에 없었다.
* * *
차에서 내린 세연은 도하의 요구에 붙들려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안아 봐도 됩니까.”
단순한 포옹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안아 줘요.”
그런데 선뜻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하는 세연이 움직일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평생 기다려 줄 것처럼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도하를, 세연은 천천히 껴안았다.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자신보다 빠른 심장 소리를 듣자 세연의 입이 근질거렸다.
세연은 진형과 헤어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진형과의 일을 해결한 뒤에 도하에게 말해도 늦지 않았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은 입이, 허리에 두른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처럼 조용히 달싹거린다.
‘사랑해요. 아주 많이.’
그녀는 위로의 의미로 안아 줬겠지만 부드러운 여체에 감긴 그의 몸 안에서는 남자의 욕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부족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마뿐일까. 욕망에 젖은 그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멀어지는 세연의 손목을 잡은 도하는 더 깊게 닿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구진형이 그녀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그에게로 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욕심으로 그녀를 상처받게 할 수 없었다.
구제도 못 할 쓰레기라도 그녀가 좋아해서 사귀었을 테니,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길 기다리는 것이다.
구진형을 차 버린 그녀가 내게 와 주길.
도하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마음을 다스리며 세연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세연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세연만 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에 비친 감정을 놓칠 리가 없는 도하의 인내심에 금이 갔다.
누구는 힘겹게 참는데,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의 뽀얀 얼굴을 찔러 보고 싶은 욕구가 이글거렸다.
“그거 압니까.”
“……?”
“내 몸에 닿은 사람, 정세연 씨가 유일합니다.”
골려 주고 싶은 얼굴이 뜻대로 화들짝 놀랐다.
세연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지고, 기어이 잡아채고 싶은 혀가 보였다. 그녀를 닮아 색도 예쁘고 모양도 귀여웠다. 만지면 말캉할 입술과 단맛이 날 것 같은 혀를 직접 맞댄 것처럼 충족감이 일었다.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낸 만족감과 조만간 저 입술을 탐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절히 어우러져 직성이 풀렸다.
아직은 무리인, 하지만 언젠간 닿을 수 있을 그녀의 입술을 응시하면서 그는 경고성을 띤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나 버리면 안 됩니다. 버려도 나 가지고 난 뒤에 해요.”
* * *
진형의 눈이 부릅떠졌다. 흥신소를 통해서 도하와 세연의 사진을 구한 진형은 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바람피우면서 뭐, 남자가 없다고?”
도하와 세연이 다정히 껴안고 있는 사진이 진형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