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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6)화 (56/70)

56화

진형은 당면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예민하다고만 생각하는 진형을 어쩌면 좋을까.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진형과 맞춰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헤어지면 되는 일이잖아요.”

세연은 단호하게 진형의 손을 뿌리쳤다.

“세연아……. 다시 생각할 수 없겠어?”

“전 마음 정했어요.”

“후, 나도 확실히 말할게. 난 너와 못 헤어져. 나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뿐이야.”

“정말 예상 못 했어요?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걸요.”

“당연하지. 나는 널 사랑해.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사랑한다는 말이 이토록 가벼울 수가 있다니.

“세연아. 나는 널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저 말을 듣고도 잠잠한 심장은, 도하가 하는 말이었다면 거세게 뛰었을 것이다.

진심이 담긴 눈빛과 그녀를 생각하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의 가속을 불러왔을 테니.

진형과 전혀 다른 말의 무게를 도하로부터 실감했던 세연은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녀는 진형의 무심함이 섭섭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연애에서 느껴야 할 떨림을 도통 느껴 보지 못해 언제나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우리 정말 사귀는 게 맞나. 다들 이렇게 연애하는 걸까.

“나는 아니에요.”

“정세연!”

회유되지 않는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진형이 두 주먹을 테이블에 내리치면서 일어섰다.

“나는 이별 통보 못 받아들여.”

연애는 한쪽의 마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간단한 진리를 진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꺾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연은 결정한 마음을 몇 번이라도 내뱉을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일로 더는 만나지 않았으면 해요. 이전처럼 선후배로 지내요. 선배.”

* * *

몇 달 만에 도하는 본가를 찾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청명 회장의 생신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이청명 회장이 다리를 못 쓰게 된 이후로는 집안 식구들만 모여 소소하게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웬만한 환갑잔치보다 더 화려한 생신상에, 모인 이들이 준비한 선물의 가격대 또한 어마어마했다.

한편, 중문의 경비실에서 도하가 도착했다는 보고가 왔다. 주택의 고용인은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드넓은 거실로 진입한 도하는 본가에 살고 있는 부모와 조부에게 인사드렸다.

하란과 매형인 하명우 그리고 석호의 가족까지 전부 참석해 있는 자리는 도하가 옴으로써 완성되었다.

“일하고 왔는데 피곤할 만하지. 어서 앉아라.”

도하가 석호의 옆에 앉자 이청명 회장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이도하.”

“네.”

“네 얼굴 보기가 참 힘들구나. 손자인 네가 그리도 무심하니 할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네 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더구나.”

“…….”

“그간 네게 있었던 일을 받아 보았다. 허, 미친년한테 시달렸으면서 왜 내게 털어놓지 않았어.”

도하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회장의 귀에 들어가게 했을 주범을 단번에 찾아 고개를 돌렸다.

석호가 어색하게 웃고선 도하만 볼 수 있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비볐다.

자신의 잘못을 알아 제 눈치를 보는 석호를 탓해 봤자 별수 없는 노릇이기에 도하는 노려본 시선을 거두었다.

“걱정 끼쳐 드릴까 봐 말씀 못 드렸습니다.”

“네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게 말했으면 진즉 스토커를 잡았을 거 아니냐. 부상까지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나 네 부모가 얼마나 놀랐는지.”

버젓이 쉬운 길을 두고 왜 멀리 가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항상 불만인 이청명 회장이었다. 

못마땅한 훈계를 듣게 된 도하는 피로한 눈가를 느릿하게 감았다.

이래서 오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유학 후 따로 독립하고 나서부터 오늘과 같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본가를 찾지 않았다.

“조심하겠습니다.”

말귀를 알아들었으면서 도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저 처신을 똑바로 하겠다고만 하자 이청명 회장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회장님. 도하 도련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요.”

석호의 부친, 유 원장이 이청명 회장의 심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넌지시 끼어들었다.

“이번에 TS 전자 수주도 성사시켰다지요. 아들 녀석에게 들어 보니 해외에서 촬영한 제작물도 이사진들이 무척이나 흡족해했다고 들었습니다.”

유 원장이 이청명 회장의 기분을 띄워 주자 이 회장의 입가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네가 직접 찍었다는 소리 들었다. 나서길 싫어하는 녀석이 웬일이냐. 혹시 이제 와서 연예인이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

도하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들어올 때부터 그에게 떨어지지 않는 시선들을 느끼며 입을 여는 도하의 감상은 ‘피곤하다’였다.

“그래. 네가 아니면 아닌 거겠지.”

이청명 회장이 대놓고 안심하자 유 원장이 다시금 분위기를 띄웠다.

“도하 도련님이 이룬 성과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도하야. 정말로 본사로 들어올 마음이 없느냐. 네가 기업을 운영하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건데.”

이청명 회장은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이런 행사마다 빠짐없이 참석하는 하란의 남편에게 눈길을 주었다.

“끅,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야금야금 먹고 있던 음식을 꿀떡 삼키느라 울린 소리가 경박스러웠다.

작년에 이어 또 대형 프로젝트를 말아먹은 하명우였다. 이청명 회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노력만 하면 뭐 하나.”

“면목이 없습니다.”

“입만 살아서는. 쯧. 조금 더 지켜보겠네.”

“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냉각된 분위기가 더 삭막해졌다.

그렇게 만든 이청명 회장에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친아들과 며느리도 말리지 못하는 독재자에게 누가 눈치를 줄 수 있겠나.

분위기가 어색해지든 말든 도하는 신경을 끄고서 물을 들이켰다.

* * *

선물 증정식이 끝나자마자 유 원장이 이청명 회장의 휠체어를 끌었다.

“알아서 있다 가거라.”

기력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쇠약해진 이청명 회장은 졸려 오는 눈가를 끔뻑였다.

“들어가세요.”

거실로 이동한 이들은 이청명 회장이 1층에 위치한 침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도 가마.”

장애라 여사와 이호석 교수가 2층으로 올라가기 전, 아들과 나누지 못한 말을 붙였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다만 네 할아버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 생각을 가장 많이 하신다.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자주 집에 들러라.”

장애라 여사와 이호석 교수는 그 옛날 도하와 조부의 갈등을 보고도 중재하지 못했던 터라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말도 꺼내기가 눈치 보였다.

“생각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살갑지 않은 아들은 여전히 무뚝뚝했고 부부는 몇 달 만에 보는 도하의 얼굴만 보고서 아쉬운 발길을 떼야 했다.

“이도하. 너는 네가 왕인 줄 아니? 어른들께서 왜 네 눈치를 봐야 해.”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도하가 꼴 보기 싫어 하란은 가시 돋친 말을 쏟아 냈다.

“그래. 처남. 우리 처남은 참 좋겠어. 뭘 해도 지지해 주는 어른들이 계셔서 말이야.”

또 시작이군. 도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매형과 누나 인생이나 잘 살아요. 듣는 귀는 그쪽만 있는 게 아닙니다.”

“너!”

“그만들 하세요.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또 싸워야 하겠습니까.”

석호가 나서서 치닫는 다툼을 말렸다. 이어 석호의 형인 승재가 무시할 수 없는 말로 분란의 싹을 뜯었다.

“이 회장님께서 오늘 같은 날에도 형제 싸움이 났다는 걸 아시게 된다면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실 겁니다.”

이청명 회장에게 이 말 저 말 옮기는 두 형제를 의식한 하란과 하명우가 입만 다물곤 도하를 노려봤다. 그러나 도하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해 있지도 않았다.

이후, 셋밖에 안 남은 거실에서 승재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네 PTSD를 아셨어. 조만간 이 회장님도 알게 되실 거야.”

어쩌다가, 라는 말도 필요 없었다. 누가 발설했는지 뻔하니까. 도하는 앞머리를 누르며 피로로 뭉친 뒷목을 뒤로 젖혔다.

“미안. 형이랑 너에 관해 대화하다가 아버지께서 들으셨어.”

지은 죄가 있는 석호는 나 죽었네 하고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언제고 탄로 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어.”

석호를 탓해 봤자 이 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안이 뒤집어질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지쳤다.

도하는 피로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릴수록 선명해지는 얼굴이 있었다.

* * *

쉬고 있는 세연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세연 씨, 집 앞인데 나와 줄 수 있습니까.

매캐한 연기처럼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가 탁하게 들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부터 든 세연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에 곧장 현관을 나섰다.

빌라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도하가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세연을 기다렸던 도하가 그녀를 보고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웃음을 머금었다.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이기에 저희 집에…….”

빠르게 달려오느라 약간 가빠진 숨을 내뱉으며 세연은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그를 보니, 말쑥한 얼굴에 어린 피로감이 상당히 짙어 보였다. 

도하의 대답을 기다리는 세연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세연 씨가 알 겁니다.”

그런 세연이 귀엽다는 듯 가볍게 입가를 올린 도하는 한결같은 대답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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