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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3)화 (53/70)

53화

그에게 가지 않으려 결정한 길을 헤매게끔, 그는 그녀의 방황에 일조할 것처럼 보란 듯이 서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언짢은 심기가 말소리로 드러났지만 도하의 표정은 살벌하기보다는 평온했다.

어떻게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는 그녀의 어깨로 팔을 뻗었다.

“아, 스킨십 안 한다고 했죠.”

자신이 내건 약속이 막 생각난 듯 그는 다시 손을 거둬 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태도를 바꾸던 도하가 찌푸린 미간을 더욱 좁혔다.

“근데 그건 내일이니까.”

못 참겠다며 그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도하의 상체로 기울어진 세연의 눈동자가 격동했다.

기어이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한 도하가 그녀의 체향을 빨아들일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무작정 강탈만 하는 게 아니라 그의 향도 내준다.

‘어지러워…….’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큰한 알코올 향이 섞인 숨이 세연의 코를 간지럽혔다. 역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맡고 싶게 해 세연은 도하의 가슴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누가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어.’

차라리 누가 봤으면 하는 나쁜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이성이 망가진 것 같았다.

이성을 뭉개는 열을 전해 준 그가 그녀를 놓아주고 나서야 찬 바람이 스치며 멍한 정신이 돌아왔다.

세연은 자신에게서 슬쩍 물러난 도하를 우두커니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갖은 감정들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엇을 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얼굴로 정반대의 말을 내뱉는다.

“데려다줄게요.”

정신을 차렸는지 이제 와 정중한 모습을 보여도 그는 여전히 위험해 보였고,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이 밤, 혹시라도 일어나게 될 불상사는 합의로 인한 결과일 테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불건전한 욕망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세연은 열이 식지 않은 얼굴을 저었다.

“압니다.”

알아들었다면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내보였다.

앞서 걸어가는 도하의 뒤태가 오늘따라 더 탄탄해 보여 세연은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걷다 말고 그가 뒤돌아보았다.

비상구 계단에서 그녀를 기다려 주던 것처럼 나만 따라오라는 듯이 그렇게.

지그시 맞춰 오는 시선을 지표 삼아 세연은 그에게로 향했다.

세연이 그의 옆에 다다르자 또다시 도하는 먼저 걸음을 뗐다.

그렇게 얼마 후, 한정된 시간처럼 끝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삼키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고 돌아보는 순간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들어가고 싶은데 혼자 있는 방이 아니니 참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뭐라고 해도 열어 주지 말라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불한당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요동쳤다. 하지만 세연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와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이 문을 열면 예견될 일을 모르지 않아서.

자신이 갈망하는 그와의 밤은 분명 짜릿할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반드시 후회할 거야.’

눈앞에 그려지는 선명한 그림.

아, 그랬다.

끌리는 대로 그를 탐할 수 없는 건 따라올 끝을 알아서였다.

“진짜 안 여네.”

그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정확히 들려온다.

“내일은 안 놓아줄 겁니다.”

이 마음을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면 종착 지점은 어딜까.

“잘 자요.”

우리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겠지만, 내일처럼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 * *

태풍처럼 몰아쳤던 비바람이 날이 바뀌자 보슬비로 바뀌었다.

내일이면 비행기가 뜨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진짜 호텔에만 있을 거야?”

오늘도 하루를 호텔에서 날려 보낼 수 없다며 유 대리는 마음이 맞는 회사 사람들과 외출하기로 했다.

분주히 씻고 화장을 마친 유 대리가 마지막으로 물을 때 세연은 싱글 침대 헤드에 두꺼운 베개를 댄 채 등을 기대고 있었다.

“숙취가 좀 심해서요. 이 상태로 나갔다간 더 상태가 안 좋아질 듯해서 쉴게요.”

“나도 쉬고 싶은데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까…… 뭐 그래도 세연 씨의 몸이 우선이니 쉬어.”

“네. 다녀오세요.”

유 대리가 나가고, 세연은 서둘러 욕실을 썼다. 

단장까지 하고선 침대에 걸터앉아 며칠 동안 확인하지 않았던 핸드폰을 보았다. 그리고 세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세연아, 왜 안 받아.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넌 내가 안 보고 싶어?

확인하면 톡이라도 보내 줘.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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