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녀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용납 못 하는 듯 그의 몸이 아예 그녀에게로 틀어져 있었다.
[그러니 다른 곳 보지 말고 나만 봐야 합니다.]
어제의 일을 연상시키는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다.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단정한 자세와 대비된 감정의 얼굴은 제련되지 않아 까칠했다.
“취했다고 핑계 댈 수 있게.”
“…….”
“정세연 씨도 취해 버리면 더 바랄 게 없고.”
그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갈증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러면 좀 더 솔직해지겠죠.”
욕망이 응축된 눈동자에 잠기는 것처럼 세연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미지근해진 술을 한 모금 취했다. 그리 높은 도수가 아니었는데도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아릿했다.
내가 삼켜야 할 건 이런 현실이다.
“……전 애인과 헤어지지 않았어요.”
“아, 애인 역할도 못 하는 구 대리.”
가벼운 웃음소리가 벌게진 세연의 얼굴을 푹 찔렀다.
“고작 그게 날 막으려는 세연 씨의 방패라면.”
그녀가 허접하고 낡은 무기라도 든 것처럼 도하는 비소가 담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쓸모도 없는 것을 들고 있어 봤자 무겁기만 할 겁니다.”
그녀와 진형의 끝을 아는 그는 단조롭게 사실을 확인시켰다.
그녀라고 얼마 가지 못할 진형과의 관계를 왜 모를까.
오래가지 않을 연애의 끝을 그가 기다려 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형과 헤어진다고 해도, 도하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나.
“알아요.”
“아는데, 왜 놓지를 못해요.”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 듯한 물음이 노골적인 비웃음보다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심장의 고통을 잊기 위해 세연은 천천히 술을 머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구정물처럼 흘러나오려는 말을, 그리고 그를 원하는 표정을 술기운으로 숨길 수 있었다.
{피치크러쉬 한 잔.}
그녀가 간신히 비운 잔을 도하가 새로 주문한 도수가 약한 칵테일로 바꾸어 주었다.
“도수가 낮아서 넘기기가 편할 거예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달기도 하고요. 세연 씨의 입맛에 맞을 테니, 한번 마셔 봐요.”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 온몸에 퍼진 것처럼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둥근 잔의 아랫면을 쥔 그녀가 마시지 않고 있자 도하가 그의 것도 시켰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였다. 그리고 그의 잔을 깔끔히 비우더니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녀의 이성을 뭉갠다.
“나 믿고, 어서요.”
말과 달리 키스를 하여 강제로라도 넘기게 하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길은 촉촉한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누가 그를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나.
지독히도 나쁜 향에 매료된 세연은 더운 숨결을 토해 내며 달달한 칵테일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으…….”
“어지럽습니까.”
몹시도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는 남자는 단맛에 빠져 저도 모르게 홀짝이다 보면 취하게 되는 이 술 같았다.
“네.”
“물도 같이 마셔요.”
오히려 그녀보다 더 마셨을 그가 말짱한 낯으로 그녀를 헷갈리게 했다.
취하게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게 한다.
‘나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지독한 괴리감이 세연을 어지럽혔다.
끝을 알 수 없는 아래로 떨어뜨릴 것 같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멀어지면 붙잡아 가둘 것 같은 남자는 기어코 그녀를 그의 품에 무너지게끔 했다.
술을 마신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싶기보다는, 그렇게 만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져 세연의 입이 벌어졌다.
“두려워요.”
“내가, 무섭습니까.”
그 말에 세연은 도리질했다.
두려운 것과 무서운 건 달랐다.
“대표님이 변할 것 같아서요…….”
적어도 이도하에게 향한 감정의 결은 확연히 달랐다.
“확신을 주지 못했네. 내가.”
과거의 그와 지금의 그를 분리한 것처럼 뇌까린 그가 대놓고 요구했다.
“내일 내게 시간을 줘 봐요.”
그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도 거침없고 당당했다.
“그놈과 다르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줄게요.”
그녀에게 몸을 기댈 것처럼 얼굴을 들이민 도하가 밤의 소리를 몰고 왔다.
“나란 남자, 애인으로 어떨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탁한 목소리가 세연의 귓바퀴를 훑었다. 뜨거운 숨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그와 닿은 그녀의 어깨가 가슴 중앙으로 오므라들었다.
“스킨십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며 덧붙인 말이 그녀의 심장을 도리어 안달 나게 한다.
“그러니 내 하루를 온전히 가져 봐요.”
그 자신을 내걸고 구애하는 남자는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녀의 처지마저 잊게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날 찬다고 해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탄환이 세연의 몸에 적중했다.
취했다고, 나중에 가서 그리 변명할 수 있게 세연은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일 하루만이에요.”
그녀에게서 수락을 얻어 낸 그가 아직 남은 칵테일 잔을 치웠다.
갑작스럽고도 이해 안 되는 행동에 세연이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묻자.
샷 잔을/ 뒤에 독한 숨결이라고 적어 주셔서 위스키 샷 잔이 어떨지 적어 보았습니다.) 단숨에 비워 낸 그가 독한 숨결로 그녀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내게 한 말, 기억 못 하면 안 되잖아요.”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신 것처럼 멀쩡한 낯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내일이 되어도 잊지 못할 만큼 선정적이었다.
* * *
이마가 미지근해졌다.
몇 분 전 도하의 핸드폰이 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세연은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바 테이블에 묻었다.
나를 원하는 남자의 얼굴이 꿈에서도 나올 것 같았다. 도하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자요?}
들리는 목소리보다 조심성 없이 의자에 앉는 소리가 더 컸다.
세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피아 감독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네요. 도하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대표님은 전화를 받으러 나가셨어요.}
아까 도하의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개방된 장소라는 것도 잊고 하룻밤의 꿈처럼 그와 충동적인 일을 저질렀을 것 같았다.
그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도하는 그녀를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었다.
진즉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였다.
계속해서 자라나기만 하는 마음을 뿌리째 뽑을 수 없으니 결국은 자신을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슴속 깊이 자리매김한 도하가 뻗은 유혹의 줄기에 세연은 감겨 있는 상태였으니.
{나하고 술 한잔 어때요?}
{죄송하지만 더는 안 들어가서요.}
도하로 인해 머리는 물론 속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저런, 술이 약하네요.}
{미안하게 됐어요.}
{도하는 술 잘 마시는데.}
{네?}
이런 말을 왜 꺼내는 건지. 물론 소피아 감독의 의중을 모르지 않았으나 왜 제게 적대감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하와 어떤 사이예요?}
이보다 직설적인 물음이 또 있을까.
소피아 감독은 그녀와 그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거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마음은 쌍방일지라도 이어지지 못했기에 그와 그녀를 정의할 수 있는 관계는 상사와 직원뿐이었다.
{휘우.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던데.}
계속해서 소피아 감독은 도를 넘는 무례함을 보였다.
세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소피아 감독이 바텐더에게 도수가 있어 보이는 술을 시킨 후 비죽 올라가 있는 입술을 뗐다.
{그럼 내가 먼저 고백해야겠어요.}
{……!}
{귀여워라. 표정에 다 드러나네요. 근데 뭘 놀래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바텐더가 주는 술잔을 받으며 소피아 감독이 세연을 마주한 고개를 기울였다.
{남 주기 아깝다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날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이러나 싶어 세연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해요. 부러워서 그래요.}
술잔을 응시하는 소피아 감독의 표정에서 슬픔이 전해졌다.
{괜히 심술부려 보았어요. 어차피 차일 거 아니까 고백 못 해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소피아 감독이 난처하게 입술을 깨무는 세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그 부러워 하는 눈빛이 세연의 눈동자를 아프게 찔렀다.
{고백만 하면 도하가 받아 줄 건데 뭘 망설여요? 물론 당신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그러다 도하를 놓치면 엄청나게 후회할걸요?}
안다. 그녀라고 왜 모르겠는가.
{난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행복하길 바라요. 잘해 보라는 소리예요.}
미련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술을 한꺼번에 비운 소피아 감독은 이내 자리를 떴다.
도하를 놓치면 몹시도 후회할 것이었다.
하지만 깨달아 버린 사랑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를 나약하게 했다.
사랑이 주는 무게감이 행복하기보다는 무겁게 다가왔다.
그래서 진형과의 연애처럼 가볍게 시작할 수가 없었다.
세연은 비틀거리며 라운지 바를 걸어 나왔다.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 세상이 비틀리는 것처럼 시야가 이지러졌다.
선명하게 굴절을 일으키는 인영이 눈앞에 보인다.
“날 안 기다릴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