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1)화 (51/70)

51화

다들 로비로 집합한 상태라 사방이 어수선했다. 통화하기에 여의치 않아 도하가 소음이 적은 곳으로 이동하자 남은 사원들은 대화를 섞었다.

“차 팀장님. 대표님과 TS 전자 마케팅 본부 권 상무와 아는 사이였어요?”

“나야 모르지. 근데 연락처를 알고 계신 거 보니 친분이 있나 보네.”

“이렇게 된 거 며칠 더 머물렀으면 좋겠네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어디 가지도 못하는 이들에게서 한탄이 나올 때쯤 돌아온 도하가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차 팀장. 항공권 전부 캔슬 하세요. 모레 떠날 수 있게 다시 예약해 두시고요.”

“예?!”

“마케팅 본부 권 상무의 동의를 얻어 영상물은 혜선 CD가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남은 일정은 개인 시간을 갖도록 하죠. 프론트에 가서 당일 예약 상황 체크해 객실 연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예!!”

이틀이라는 휴식을 가지게 된 사원들은 호텔 측으로부터 객실 이용이 된다는 안내를 받자 환호했다.

추가 요금이 붙기는 했지만 거센 비바람으로 인해 당일 체크인하기로 한 여행객들에게서 캔슬이 이어지고 있어 몇몇 인원만 객실을 옮기는 것 외에는 문제없었다.

“저녁 9시에 오텀 프로덕션과 친교 시간을 가진다네.”

객실을 찾아 들어간 세연은 룸메이트가 된 선배에게 일정이 촉박하여 교류할 시간이 없었던 프로덕션 사람들과 모임을 가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디서요?”

“호텔 라운지 바에 모이래. 날씨가 이러니 나가지 못하니까. 부대시설 이용 못하고 떠나게 돼서 아쉬웠는데 이렇게라도 즐길 시간이 생기니까 꿈만 같다.”

루프탑 바를 포함한 부대시설이 다양했지만 이용할 시간은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었다.

“호텔 구경하러 나갈 건데 세연 씨도 갈래?”

“네. 좋아요.”

* * *

저녁때가 되어서 선배와 같이 라운지 바로 이동한 세연은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펍 같은 분위기가 신기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자유분방하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세연은 땡볕 아래 땀을 흘리느라 느낄 새도 없었던 해방감을 받았다.

“아무 데나 앉으면 되나?”

그치지 않는 비와 한창인 밤 시간이 맞물려 바를 찾는 고객들이 많아 오텀 프로덕션 측의 사람들은 물론 팀원들도 바로 찾기가 힘들었다.

“저기 대표님 있네!”

세연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코 시선을 사로잡는 도하를 발견했다.

그는 검은 셔츠에 깔끔한 회색 슬랙스를 매치했다. 회사에서 볼 수 없는 차림새에 세연의 가슴은 무슨 일을 고대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소피아 감독하고 꽤 잘 어울린다.”

도하만 보느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한 사람.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소피아 감독의 얼굴을 본 순간 부푼 심장이 수축하듯이 조여들었다. 그 압박감이 선연했다.

“세연 씨. 저기로 가자. 우리 말고도 먼저 와 있는 인원이 꽤 되네.”

도하와 소피아 감독에게 다가갈수록 세연은 자신이 위축되는 듯했다.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도하가 소피아 감독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표님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금욕적인 분위기도, 넥타이를 풀며 억누르던 감정을 내비칠 때의 남자의 얼굴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그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세연이 모르는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선 신뢰가 느껴졌다.

탄탄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세연은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그녀가 뛰어넘지 못할 벽을 마주한 것 같아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그때, 세연을 인지한 도하가 요 근래 그녀의 시야를 길들인 얼굴로 웃었다.

그녀를 원하는 남자의 모습.

상사가 아닌, 상사로서 보여서 안 될 남성의 눈빛이 세연의 몸을 가로챌 것처럼 강렬했다.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의 야릇한 미소가 선명했다.

그의 눈빛이 멈춰선 세연의 다리를 감아 당기는 듯했다. 뒤돌아볼 틈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를 주시하는 도하를 따라 소피아 감독의 시선이 세연에게 박혔다.

그건, 경계의 시선이었다.

소피아 감독이 저와 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마주하자 세연은 어쩐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소피아 감독이 생기 있는 입술을 도하의 귓가에 내리고서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 때였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긴장케 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거침없이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시각을 그에게 빼앗긴 것처럼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었다.

그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눈치챌 만한 그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내 자리에 가서 앉아요.”

내려앉은 시선만큼이나 숨결마저 가깝게 느껴지는 거리에서 도하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속닥거렸다.

“대표님은요……?”

“곧 세연 씨 옆으로 가죠.”

그렇게 해 주길 조른 것 같은 형세였지만 속마음은 도하와 다르지 않아 세연은 더워지는 두 뺨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말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도하의 진짜 모습은 이성적인 대표와 정반대였다.

이제는 알아 버린, 도하의 거침없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본능과도 같았다.

* * *

세연에게 자리를 양보한 도하는 다른 바 테이블로 이동하여 무리 없이 일행들과 합석했다.

{멋진 남자는 왜 애인이 있는 거죠?}

{우리가 할 소리. 좀 괜찮다 싶은 여자들 보면 일찍이도 결혼했어.}

시답잖은 토크였다.

쿡, 하고 도하가 격을 차리지 않는 웃음을 짧게 흘렸다.

늘 조용히 술만 마시고 일어났던 그가 야릇하게 웃자 제이온 내부 직원들은 당황했다.

그가 매너 좋은 상사이기는 해도 술자리를 편하게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정중하지만 선을 긋던 대표를 아는 제이온 인원과 달리 오텀 측 무리는 도하의 호감 사기 좋은 잘생긴 외모를 찬양하면서 스스럼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로 인해 제이온 팀원들도 어느샌가 도하와 편하게 어울리며 술잔을 나눴다.

잠시 딴 곳을 보듯이 고개를 돌린 도하가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어 맞바라보는 상태가 되었다.

술잔을 입가에 댄 도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세연의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가는 게, 갈증이 이는 입 안을 적시는 술맛보다 더 감미로웠다.

무성욕자가 아닌가 싶었던 지난날이 어이없을 정도로 세연은 원초적인 감각을 이끌어 냈다. 어딘가의 나사가 빠진 것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삐걱대던 그의 톱니바퀴를 빠르게 돌게 했다.

[저 말고도 대표님은 다른 분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평범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고요.]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너는, 내 마음을 받아도 돼.

일로도 결코 얻지 못했던 행복감은 정세연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다.

{대표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녀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도하는 분명 저를 보고 있을 그녀가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숨결을 토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면 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여자는 너밖에 없다고.

* * *

세연은 가벼운 도수 위주의 술만 시켜 두고 멀리서 던져 오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유혹이라는 걸 왜 모를까.

심장을 끄집어낼 것 같은 시선에 이미 포위당한 세연은 붙잡힌 노예처럼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헤이.”

세연이 앉기 전부터 소피아 감독은 자리를 떴었다. 자리가 난 의자로 곱슬머리의 외국인이 앉았는데,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만 일하면서 안면을 익힌 덕분에 세연은 놀라지 않았다.

{안녕.}

세연이 어색하게 인사말을 던지자 술병을 통째로 들고 있는 남자가 그녀의 잔에 병을 부딪쳤다.

{이름이 정세연? 맞아?}

{맞아.}

{나는 토마스. 혼자 안 심심해?}

{딱히.}

{오, 내가 귀찮은 건 아니지?}

{있어도 돼.}

토마스의 서글서글한 인상과 말투 때문에 세연은 그와의 담소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메일 교환할래?}

{그래.}

인연 쌓기엔 나쁘지 않은 교류가 될 것 같아 세연은 토마스와 메일 주소를 교환하며 몇 마디를 더 나눴다.

{너네, 모레 떠난다며?}

{응.}

{그럼 낼 시간 비겠네.}

{응.}

{낼 시간 어때? 내가 이 근방 가이드해 줄 수 있는데.}

데이트 신청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좋게 거절하려는 순간, 그녀의 앞으로 기울어지는 음영이 토마스의 얼굴을 어둡게 가렸다.

{안 되겠는데. 나와 선약이 있어서.}

토마스와의 간격을 가르는 듯한 음색은 침입자를 씹어 먹을 것처럼 거칠었다.

{오, 알겠어.}

도하의 날 선 시선이 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토마스가 두 팔을 위로 올렸다.

토마스는 잠깐의 관심이었다는 듯 깔끔히 물러났다.

“저런 가벼운 수법에 걸려들지 말아요.”

토마스와 같은 급으로 매겨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는 왼편의 의자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에게 온 도하를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어딜 봐요.”

세연의 시선이 다른 테이블에 향해 있음을 눈치챈 목소리가 불쾌한 감정을 씹다 뱉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날 보라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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