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밀러와 클로에 투입하고 주변 통제 확실히 하세요.}
세부적인 촬영 계획은 빈틈없이 준비된 상태였다.
섭외된 두 모델은 해외에서 인지도가 있는 베테랑으로 소피아 감독의 지시를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문제는 몇 시간 뒤에 일어났다.
{밀러!}
{다리 어떻게 된 거예요?}
팀끼리 흩어져서 점심을 해결한 뒤 촬영지로 돌아왔을 때였다.
한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남자 모델이 다쳐서 왔다.
{자전거와 부딪혔어요.}
핸드폰을 보면서 걷다가 자전거와 충돌하여 넘어졌다는 것이다.
출시를 앞둔 핸드폰 모델의 기능을 짧은 시간 안에 담아내야 하기에 모델의 무브는 빠질 수 없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그들은 긴급회의를 가졌다.
{클릭 에이전시로 전화해서 지금 현장에 올 수 있는 모델 구하도록 하죠.}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세연은 다친 모델의 매니저를 통해 연결된 에이전시 측에게 사안을 전달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회의적이었다.
{투입 가능한 모델이 있기는 하지만 올라운더 급은 아니라고 합니다.}
광고주의 입맛과 퀼리티를 맞추기 위해선 검증이 안 된 신인을 쓸 수가 없었다.
해결된 게 없는 상황에 도하가 로케이션 팀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내일로 촬영을 딜레이 하고 각 에이전시를 통해 새 모델을 뽑는 방향은 어떻습니까.}
{애석하게도 여자 모델의 스케줄이 안 됩니다.}
일정이 빽빽하여 이런 차질이 생겼다.
{어떡하죠?}
일정을 연기할 수도 없고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어수선한 가운데 소피아 감독의 목소리가 튀었다.
{도하가 하면 어때?}
그 말에 다들 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하의 비주얼에 모두 만족했지만 본인은 아니었다.
얼굴을 팔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도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보죠.}
{퀄을 맞출 모델이 너밖에 안 떠오르는걸.}
직설적이기는 해도 소피아 감독의 발언이 터무니없지 않아 도하가 골치 아픈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은근히 도하가 나서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세연은 도하가 겪은 일들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생각해도 별다른 돌파구가 떠오르지 않아 난감한 기색인 그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세연은 흠칫하다, 다른 이들과 같은 뜻이 아니라고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 생뚱맞은 고갯짓에 딱딱하게 다물린 도하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도하가 많이 걸리지 않는다고 덧붙이자 다들 수긍하면서 변경된 세부적인 스케줄을 처리하러 바삐 움직였다.
“세연 씨는 잠시 남아 있어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프로젝트 팀과 뭐라도 하려던 세연을 그가 붙잡아 두었다.
혼자 있기를 원하는 그가 그녀를 불렀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스러웠다. 그런 마음으로 세연이 도하를 응시하자 그가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나서면 세연 씨는 어떨 것 같습니까.”
“그걸 왜 저한테…….”
“세연 씨가 하라면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자신만 생각하라는 듯이 틈이 보이면 감당할 수 없는 말로 세연을 흔들어 놓았다.
그것이 싫지만은 않아 더 곤란했다. 휘말리지 않으려 세연은 부단히 허우적거려야 했다.
“……하지 않으셔도 돼요. 머리를 맞대면 다른 해결책이 나올 거예요!”
“세연 씨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요.”
맨해튼의 뜨거운 공기에 뒤지지 않는 시선과 웃음에 더위를 먹은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세연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에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액트소피아 앱이 있다고 들었어요.”
미국 내에서만 활용되는 앱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데 캐스팅 캐릭터에 맞는 배우나 모델을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게 있군요.”
도하도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고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 루트로 가도록 하죠.”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 마음을 굳힌 도하는 세연의 붉은 얼굴을 말로 콕 찔렀다.
“세연 씨 얼굴이 타들어 가게 세워 둘 수 없으니 빨리 촬영을 끝내 보도록 하죠.”
강렬한 더위를 선사해 놓고 태연하게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니 다른 곳 보지 말고 나만 봐야 합니다.”
심장을 뜨겁게 데우는 말은 지독한 열병을 안겨 주듯이 강력했다.
“네……. 대표님 힘내세요.”
그에게만 들릴 수 있게 응원의 목소리를 속삭이듯이 전하자 이 무더운 날씨에도 와이셔츠를 고수한 그가 더운지 목깃에 손가락을 넣어 이음새를 넓혔다.
* * *
{역시 싫어도 공동 작업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할 줄 알았어.}
도하를 보고 말하면서도 소피아 감독의 시선이 세연에게 향한 듯해 그녀의 두 눈이 깜빡였다.
‘뭔가 날 본 것 같은데.’
우연이겠거니 하며 세연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 도하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오버 더 숄더 숏으로 들어가는 컷이야. 둘이 마주 보고 웃어.}
소피아 감독의 지시에 따라 도하는 능숙하게 클로에와 합을 맞췄다.
{컷! 다음 숏으로.}
이어지는 연속 행동마다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소피아 감독은 도하의 얼굴을 중점으로 클로즈업하여 부자연스럽지 않게 처리했다.
저물어 가는 시간까지 이어진 고강도 촬영은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광고주의 대만족을 이끌어 내면서 하루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내일은 코니아일랜드 비치에서 3시까지 촬영하니 9시 전에 조식을 해결하세요. 그리고 저녁 식사는 자유롭게 해결하시면 됩니다.}
전달 사항을 체크한 세연은 프로젝트 팀과 호텔 내에서 제공되는 저녁을 먹고 나서야 내내 서 있었던 몸을 뉠 수 있었다.
* * *
맨해튼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가야 있는 코니아일랜드 비치.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주변인들을 통제하지 않고 현장감 그대로 전달하기로 했다.
“대표님 언제 운동하신 거래요.”
“그러게 말이야. 방송 나가면 반응 터져 나가겠는걸. 쓰읍.”
“윽. 얼른 침 닦아요.”
모래사장을 밟는 구경꾼 속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비치는 도하의 매끈한 몸체에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했다.
‘실제로 보게 되는구나.’
벗지 않아도 우월한 태가 나던 몸의 복근을 세연 역시 두 눈에 담았다. 일광에 눈살을 슬쩍 찌푸리는 도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탄탄한 몸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아는 그녀는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에 심리적인 뿌듯함을 느꼈다.
간간이 저를 보는 시선을 발견할 때면 세연은 도하와 시선을 맞추는 모델이 부럽지 않았다.
{마주 보는 장면 말고 더 다정한 포즈로 바꾸죠.}
사랑에 빠진 듯한 도하의 표정을 캐치한 소피아 감독은 즉석 연출을 요구했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소피아 감독에게 잠시 향했지만 이내 세연에게로 시선을 돌린 도하가 찌푸린 표정을 덜어 내듯이 입 모양과 눈매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세연은 도하가 지금 누굴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 짓던 그 눈빛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칫 화가 나 보이지만 미동 없이 한 곳을 주시하는 시선은 내리쬐는 일광에 뒤지지 않았다.
{……좋아요.}
즉석으로 끼워 넣은 연출은 완벽했다.
{다음 숏으로 넘어가요. 자연스럽게 시선 처리!}
실수인 척 도하가 핸드폰을 바닷물에 빠트렸다. 그리고 전혀 놀라지 않은 채 건져 낸다. 핸드폰을 닦지도 않고 젖은 주머니에 넣는 것까지.
촬영은 마지막 장소까지 이어져 순조롭게 끝이 났다.
* * *
새벽이 넘은 시각.
진형은 병신처럼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도하의 시선을 떠올리던 진형이 어지러운 머리를 저었다.
“말도 안 되지. 어떻게 세연이를 좋아할 수가 있어? 세연이보다 더 예쁜 여자들도 마다하던데.”
하지만 가슴속을 지피는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내일이 없듯이 소주를 마셔 댈 때였다. 띠리릭, 현관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쿵쾅대는 발걸음 소리가 잇따랐다.
“오빠! 어떻게 카드를 중지시킬 수 있어? 오빠 때문에 쪽팔렸잖악!”
들이닥친 주아의 고성에 진형은 각 티슈를 뽑아 귓속에 꽂았다.
“이게 다 뭐야……?”
한편 거실 테이블에 올려진 소주병들을 본 주아가 경악하며 진형의 몰골을 살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나 승진 물 건너갔어.”
“뭐어? 어쩌다? 그러면 사 준다던 백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아, 너는 그게 중요해?!”
“그게 아니라…… 근데 왜 화를 내고 난리야!”
“됐다. 진짜…….”
세연과 비교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돌아가라.”
“오빠!”
“돌아가라고!”
주아의 투정을 받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질릴 대로 질린 진형은 거침없이 팔을 올렸다.
한 대 때릴 것 같은 진형의 몸놀림에 주아는 놀라 가방을 떨어트리고도 줍지 못한 채 현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전이라면 주아를 따라나섰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진형은 주저앉아 크윽, 트림을 하면서 핸드폰을 만져 댔다.
“세연아…… 전화 받아…….”
* * *
다음 날 출국하기로 되어 있던 일정이 뒤집혔다.
아침 먹고 호텔을 나서기로 했던 일행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폭우에 발이 묶였다.
“대표님. 존 F케네디 공항 측에서 기상 악화로 여객기가 뜰 수 없다고 합니다.”
“다음 연결 편 안내를 받았습니까.”
“기상 상황을 봐서는 확답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일단 저와 몇 명이 공항으로 가서 대체 편 항공사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있어요. TS 전자 마케팅 본부 책임자와 통화한 뒤에 다시 상의하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