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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9)화 (49/70)

49화

도하는 회의실에 남은 세 사람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이 대리.”

“예예!”

“이 대리만 있고 두 사람은 나가 있어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진형을 보며 도하가 서늘히 일렀다.

“부탁으로 보입니까.”

서슬이 시퍼런 음색에 진형의 목울대에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권위적인 분위기가 도하와 숨 막히게 어울렸다.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있던 민 대리가 자신만 살겠다고 황급히 복도로 피신했다.

“뭐 합니까.”

민 대리가 채 닫지 못한 문으로 도하가 찬 시선을 던졌다.

정해져 있는 처지에 진형의 두 손이 파들거리며 안으로 말려들었다.

입을 벙긋해 봤자 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걸 아는 진형은 굴욕적으로 뒤돌았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소리 나게 문을 닫는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이 대리가 불안하게 좇는 시야 사이로 도하가 두 팔을 뻗어 회의 테이블을 짚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겁니다.”

도하는 저승사자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이 대리를 심문했다.

“이 대리.”

“넵.”

그럴 리야 없겠지만 도하의 눈빛만으로도 목이 잘릴 것 같아 겁에 질린 이 대리는 목을 뻣뻣하게 위로 뺀 채 기합이 들어간 자세를 취했다.

“이 대리의 치부가 무엇일지 궁금하군요.”

“저는! 예?”

목이 간당간당하게 잘린 것처럼 말소리를 삐걱대던 이 대리가 몇 초간 멍하니 입을 헤벌렸다.

“이게…….”

“각이 안 나옵니까.”

도하는 테이블을 짚고 있던 두 팔을 몸체 앞으로 가져와 팔짱을 꼈다.

처음부터 이도하는 그들이 모의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하에게 걸려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이 대리가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자세를 방만하게 취했다.

“저희에게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하실 겁니다.”

“내가 대표로서 위엄이 없었나 보군요.”

태가 훤칠한 다리로 이 대리 앞에 선 도하가 서늘한 눈매를 내렸다.

신장 차이를 실감하게 하는 도하의 눈높이를 따라가다 이 대리의 고개가 젖혀졌다.

“후회하는 건 이 대리와 저 문밖에서 당신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일 겁니다.”

도하에게서 나오는 무형의 기운은 태생부터가 그들과 다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태원 대리. 상황 파악해요. 나가 봤자 구 대리와 한통속이라고 믿고 있는 사원들이 당신의 말을 믿어 줄 것 같습니까.”

도하는 이 대리의 어깨를 쥐어 뒤로 밀었다.

“이 대리 약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이 대리는 3년 차 유부남으로 한 살배기 아이의 아빠였다.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외도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딸이 태어나고선 일탈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아내 몰래 딴 여자를 만났었다. 이 대리의 뒷목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와이셔츠를 축축이 적셨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습니까?”

“……외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저 두 사람은 알고 있습니까.”

“예…….”

술자리를 가지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는 이성 이야기를 훈장처럼 떠벌렸던 그들이었다.

“민 대리의 비밀도 알고 있겠군요.”

무서운 사람이다.

도하가 계획한 판을 벗어날 수 없음을 체감한 이 대리는 민 대리의 행적을 낱낱이 불었다.

“몇 달 뒤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클럽을 가서 원나잇을 했다고…….”

“끼리끼리 만났군요.”

가차 없는 비판을 들은 이 대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바로 민 대리 들어오게 해요.”

자신에게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도하가 닫힌 문을 응시하자 이 대리는 숙인 얼굴로 뒤돌았다.

“아내분에게 잘하세요.”

가정이 깨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아빠를 보면 방긋방긋 웃는 딸의 얼굴이 아른거렸던 이 대리의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이 대리가 나가자 어떻게 되었냐는 듯한 두 시선이 가시처럼 박혔다.

“민 대리 들어가…….”

기어가는 목소리가 민 대리의 희망을 꺼트렸다.

“미안.”

노역장에 끌려가듯이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안으로 들어가던 민 대리는 귀에 스치듯이 닿은 이 대리의 사과의 의미를 잠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민 대리가 들어간 문을 이 대리가 닫았다.

도하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민 대리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결혼할 여자를 두고 원나잇을 했다죠.”

“흡.”

도하의 양손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들려 있지 않은데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민 대리는 무릎을 꿇었다.

“제발, 약혼녀에게 알리지 말아 주세요. 술이 들어가서……, 정말로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제가 돌았습니다.”

“알아서 처신하고 다음부터 이런 불미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단속 잘해요.”

민 대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퇴사하라고 해도 군말 없이 나가야 할 판인데 허물을 까발리지 않겠다니. 도하의 결정에 감복한 민 대리는 굽실거렸다.

“감사합니다.”

“나가 봐요.”

“예.”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포섭한 도하는 들어와 놓고선 문을 채 닫지도 않고 뻗대는 진형의 목을 조르듯이 밀어붙였다.

“정세연 씨와 헤어지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았나 봅니다.”

“왜 그렇게 세연이를 싸고도는 겁니까.”

억울한 듯이 진형이 이를 드러내자 도하가 어처구니없는 비웃음을 흘렸다.

“공평하게 처리하는 게 싸고도는 걸로 보입니까. 구 대리가 이따위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무탈하게 지나갔을 겁니다.”

비소마저 서늘하게 거둔 도하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 마인드로 살아왔으니 뭘 잘못한지 모르는 것도 알 만하군요. 나가서 억울하다고 주장해 봐요. 난 안 말립니다.”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이미 확신에 가까운 팀원들의 시선을 받은 진형은 앞일이 막막해졌다. 걸렸을 경우를 생각하지도 않고 수작을 부린 게 실책이었다.

진형은 그제야 목청을 키울 처지가 아님을 받아들였다.

“……죄송합니다.”

“다들 있는 곳에서 들어 보죠. 구 대리가 잘못을 시인한다면 없었던 일로 해 줄 수 있습니다.”

제 입으로 부느냐 아니면 퇴사를 하느냐의 기로에 선 진형은 두 눈을 감았다. 돈구멍이 없어지는 걸 막고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 * *

“죄송합니다. 제가 민 대리와 이 대리에게 부탁했습니다.”

진형은 함께 일한 팀원들에게 자신의 부정행위를 시인했다.

“허 참! 진형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저도요. 진형 씨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진형의 시안에 표를 던진 몇몇은 실망감을 안겨 준 진형에게 더욱 분개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들을 둘러싼 싸늘한 시선을 감내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혜선은 도하에게 처분을 맡겼고, 그에 도하에게 모든 이목이 쏠렸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뒤집지는 않겠습니다.”

의외의 결과에 다들 술렁였다.

“다만 징계는 있을 겁니다. 이와 같은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구진형 대리를 TF팀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대표님!”

프로젝트 팀에서 빠지게 된다면 승진이 어렵기에 진형은 반발했으나 이가 빠진 개가 짖어 대는 꼴이었다.

“그리고 구진형 대리의 자리를 정세연 씨가 채우도록 하죠.”

세연의 두 눈동자에 어린 감정이 크게 일렁거렸다.

놀라는 모습마저 귀엽게 보인 지 꽤 된 도하의 눈매가 휘어졌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정세연 씨라면 잘 해낼 겁니다.”

“네. 프로젝트 팀에 합류하겠습니다.”

“이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도하의 시선이 망신을 당한 진형에게 꽂혔으나, 인성은 말할 것도 없고 형편없는 실력을 스스로 밝힌 진형을 편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 * *

주가가 올라간 세연이 제작부의 신임을 얻어 해외 출장을 가게 된 사안은 잡음 없이 이행되었다.

그리고 D-DAY.

업무 목적이지만 약간의 설렘을 껴안고 세연은 그간 진행된 사전 기획물을 기내에서 살펴보았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

뉴욕의 거리를 촬영하기로 되어 있어 그들은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로비에서 로케이션 팀과 합류한 세연은 해외 프로덕션인 오텀의 촬영 팀과 만났다. 

{오, 도하. 몇 년이 흘렀어도 넌 변한 게 없네.}

{너도 예전 그대로야. 여전히 활기가 넘쳐.}

소피아 존 감독과 도하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 어떤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사이가 각별해 보였다.

{후훗, 소피라고 불러 달라니까.}

존 감독의 뺨이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같은 빛을 띠었다.

‘대표님을 좋아하는구나.’

사랑에 빠진 여자는 세연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 * *

광고주에게 몇 번의 컨펌을 받은 기획물을 본 소피아 존 감독이 의견을 냈다.

{이 부분은 뺐으면 좋겠어요. 영상 기법에 방해될 요소예요.}

온 에어 일정까지 잡혀 있어서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슈팅 스케줄에 맞춰 진행되는 건 아니구나.’

체류 중 오텀 프로덕션과 촬영안을 조율하느라 하루는 날려 버린 셈이었다.

“사인이 떨어졌네요!”

겨우 합의점을 이끌어 낸 기획안은 다시 광고주에게 피드백을 받아 통과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낮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착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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