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8)화 (48/70)

48화

당혹스러운 한편 기이하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솟아났다. 두근거리는 심장도, 어깨에 들어간 힘도 저절로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세연은 저를 주시하고 있는 실무진들에게 침착하게 시안을 선보였다.

“제가 잡은 킬링 포인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반쯤 설명했을 때 다른 이들이 보이는 표정과 호응하는 고갯짓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성공적이구나!’

무엇보다 노력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었다. 도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 * *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세연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도하가 두 번의 박수를 쳤다.

그러자마자 다른 이들에게서 칭찬의 감탄사와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바로 표결로 넘어가죠.”

그 기점으로 투표가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한 종이가 나눠지고 세연과 진형을 제외한 이들이 쓰는 펜 소리가 사각거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세연은 결과를 기다렸고.

반으로 접힌 종이들을 일일이 펴 본 혜선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결과를 알렸다.

“……총합 구진형 씨의 시안을 뽑은 표수가 열한 명이네요.”

한 표 차이로 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진형은 크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한 노력을 인정받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의 인사는 잊지 않은 진형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는 세연을 불렀다.

“그리고 정세연 씨.”

세연이 ‘네.’ 하고 대답하자 진형이 침을 뱉을 수 없게 미소로 일관했다.

“수고했습니다. 세연 씨도 나도 후회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녀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진형의 표정은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정말로 날 생각해 줬다면 주말에 연락 한 통이라도 넣어 줬어야지.’

진형의 가식적인 면모를 몇 번의 일로 겪어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속지 않았다.

남들을 의식한 소감임을 진즉 눈치챈 세연은 실없이 굴지 않았다.

“네. 배움의 길을 열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판을 키운 건 진형의 탓이었다.

그 점을 짚자 진형의 눈썹이 굼틀거렸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서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세연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그리고 비등한 차이로 졌기에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감정에 따라 어수룩하게 대처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봐도 잘했어.’

세연의 시안은 앱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깔끔했지만 진형의 것은 자기 솜씨를 자랑하듯이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하고 화려했다.

결과에 후회는 없었지만 자신을 믿어 준 도하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세연이 결과가 나왔을 때부터 송구스러워 보지 못했던 도하를 슬그머니 바라보자 그는 예상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고 계셔? 왜지?’

하지만 결단코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진형을 주시하는 도하의 시선은 냉연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시선 처리를 달리했다.

세연에게로 눈길이 돌아갔을 때 서늘하게 보이던 입꼬리와 눈빛이 부드럽다 못해 심장에 안 좋게 휘어졌다.

“정세연 씨는 기대한 만큼 결괏값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하는 마치 그녀가 이긴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실망감을 내비치지 않고 저를 격려하는 도하의 마음이 전해져 와 세연은 반듯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주변은 도하의 태도에 다들 놀란 눈치였다.

절정은 진형이었다.

도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진형의 표정이 확연하게 구겨져 있었다.

콧잔등에 주름이 져 있었고 사람 좋아 보이던 호감형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눈매가 사납게 찢어졌다.

“그리고 구 대리는.”

느릿하게 도하가 뒤돌자 진형의 안면이 180도로 바뀌었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세연은 속으로 기함했다.

진형을 그럭저럭 안다고 생각했는데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인지할 때마다 더 떨어질 것도 없다고 여긴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예. 대표님.”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진형의 입가가 재수 없게 길게 올라가 있었다.

“구 대리는 예상했던 결과를 보여 주었군요.”

그러나 도하의 서늘한 어조에 미소를 지은 안면이 박제되듯이 굳어졌다.

“예?”

싸늘한 말투와 미묘한 어감 차이를 감지한 진형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연도 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이 상황에서 홀로 태연한 도하를 주시했다.

“꼼수를 쓰면 안 된다고 확실히 말했을 텐데요.”

낯빛이 한결같은 그가 일으킨 파장에 세연을 비롯한 이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 * *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대표님!”

진형의 외마디가 일순 침묵된 공기를 갈랐다.

‘어떻게 안 거지?’

절대로 합의 사항을 어기지 않았다고 화를 내긴 했지만 진형의 심장은 작게 졸아들었다.

‘아니야. 그냥 찔러 보기야. 증거가 있을 수가 없어.’

진형은 자신의 편에 선 두 동료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이 대리와 민 대리가 결백하다며 고개를 짤막하게 저었다.

두 사람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진형은 쫄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전 절대로 이 경합에서 비겁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말이 사실이 아니면 생명이라도 걸 것처럼 진형은 왼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결백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진형은 도하 외 사원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단호한 태도와 연결되는 결연한 표정을 보고 도하의 말만 믿고 경악했던 제작 팀원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제발 믿어라.’

이렇게 된 이상, 여론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진형은 온점을 찍듯이 강하게 나갔다.

“대표님께 묻고 싶습니다.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증거도 없이 이러십니까.”

진형은 제 소행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뇌물을 바치기라도 했나 세연이 지도록 편법을 쓰기라도 했나.

‘세연이 내 결과물보다 확실히 뛰어났으면 졌을 리도 없잖아. 지금 이걸로 주아와 있었던 일을 꼬투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겠어.’

이참에 승기를 잡자고 생각의 전환을 마친 진형은 재깍 말을 내놓지 못하는 도하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다른 분들의 말을 들어 보고 내가 사과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죠.”

도하가 입을 여는 순간까지도, 진형은 태연했다.

“이 대리와 민 대리.”

“……!”

“……!”

호명된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고, 다수의 시선이 티가 나게 움찔거린 이 대리와 민 대리에게로 돌아갔다.

“세 사람이 모였더군요.”

“원래 예정된 약속으로 모였던 겁니다. 작당해서 만났던 게 아닙니다.”

이 대리의 자진 실토는 의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지금처럼 근소한 차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죠. 경합의 승패에 영향을 줄 여지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

“대표님께서 하신 발언은 모함입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생사람 잡는 겁니다.”

쩔쩔매는 이 대리와 민 대리 앞에 선 진형이 우기기를 시전하자 도하가 반듯한 고개를 비딱하게 두었다.

“증거가 없다고 내가 말했습니까.”

진형은 물론 두 대리의 표정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어떻게?’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도하는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그들의 목을 조였다.

“면담 시간을 가지죠.”

“저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세 사람이 원한다면 여기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내 사생활도 아니고.”

‘그러셔도 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진형은 물론 두 대리도 떳떳하지 못했다.

‘밀고 나가야 하나……. 그랬다가 연차 쓴 일마저 탄로 나면…….’

“따르겠습니다.”

진형이 갈팡질팡할 때 이 대리가 상의 없이 말을 얹었다.

진형은 거듭 초를 치는 이 대리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이 대리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진형은 윽박지르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정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 일과 상관없는 타인의 사생활을 가지고 협박하지 마십시오!”

“그만해.”

“그래…….”

도움이 안 되게 두 대리가 진형을 조용히 말리자 진형의 목에 핏대가 세워졌다.

‘개XX!’

쌍스러운 육두문자가 핏줄이 선 목 안에서 삼켜졌다.

이미 그들의 태도가 심증을 굳히게 해 제작 팀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만 남아 있고 다들 나가 보세요.”

차분하게 상황을 일단락 내는 도하에게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세연 역시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대표님.”

세 사람의 부정을 들춘 건 일견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았다. 세연은 도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책임을 감수해야 할 그에게 혹시라도 피해 갈까 안심할 수 없어 불안했다.

“고생했으니 가서 쉬고 있어요.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세연의 감정을 읽은 도하가 걱정 말라며 덤덤한 표정 위로 미소를 덧댔다.

“날 믿어요.”

모든 불안을 씻겨 주는 말에 세연은 한시름 놓고서 빙그레 웃었다.

“네. 믿고 있어요.”

그런 두 사람의 기류에 진형은 식은땀 때문에 흘러내린 안경을 손볼 생각도 못 하고 휘둥그레진 눈을 끔뻑였다.

‘대표가 세연이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