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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7)화 (47/70)

47화

어차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네게 고백했다고 말하는 도하의 마음 크기에 세연은 입도 뻥긋거리지 못했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니 세연 씨가 선택할 건 나냐 구진형이냐, 이게 아니라 내게 끌리는지 아닌지만 말하면 되는 겁니다.”

“…….”

“끌리지 않으면 노력할 거고 끌린다면 더 전력을 다할 테죠.”

결심을 소용없게 만드는 말이 세연의 심장을 깊게 찔렀다. 울컥, 피를 쏟을 것처럼 세연의 입이 벌어진다.

“……끌려요.”

저도 모르게 내뱉고야 만 속마음에 세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 봤자 화살은 떠나고 난 뒤였다.

이를 보여 주듯, 도하의 얼굴이 달빛을 받은 듯이 환해지고 눈꼬리와 입꼬리가 선연하게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제 마음은 중요치 않아요. 상황이…… 이러니까요.”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세연은 그에게 품은 마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주입시키듯이 입 밖으로 냈다.

“다른 남자가 있어서, 내가 안 된다는 겁니까.”

“네…….”

세연의 고갯짓에 돌아온 건 픽, 소리 나는 웃음이었다.

“그건 핑계고.”

그의 말투가 다시금 짧아졌다.

“사귄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구진형 씨에게 마음이 있다면 또 모를까.”

무시할 수 없는 조소를 머금은 도하를 보자 세연은 그의 말투가 짧아지는 원칙을 알아냈다.

가당찮은 것에 진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유들유들하게 넘기는 것이다.

“날 밀어내려는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구진형 씨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말해 봐요. 내가 보는 앞에서.”

세연은 마음이 가는 남자 앞에서 진형을 사랑한다고 감히 거짓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괴롭겠지만 세연 씨를 포기하려고 노력이라도 해 볼 테니까요.”

머리로는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단념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도,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요.”

“…….”

“세연 씨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남자 따위는 버려요. 버리고 내게 와요.”

“…….”

“그러지 못하겠으면 최소한 날 거부하지 말아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로 나를 밀어내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제가 뭐라고.”

목구멍이 겨우 열렸다.

세연은 마음을 열어 제게 보여 주는 도하에게 눈물이 날 만큼 미안했다.

구진형과는 오래가지 못할 연애였다.

이 연애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얼마나 도하에게 못할 짓인지 알았다.

차마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없어 세연은 자신의 입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은 속내를 아프게 내뱉었다.

“저 말고도 대표님은 다른 분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평범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고요.”

하, 도하가 가당찮은 웃음소리를 직설적으로 날렸다.

“내가 원하는 건 평범한 연애가 아니라, 정세연 씨예요.”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누가 봐도 진심으로 웃겨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바로 알 수 있게 도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싸늘했다.

“나는 세연 씨에게만 사랑받고 싶습니다.”

그 냉연한 미소는 다음 말이 이어지자 따뜻한 봄볕같이 번졌다.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세연의 얼굴을 점령하는 건 도하의 눈길로 인한 붉은 기운이었다.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으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세연의 심장을 묵직하게 울렸다.

“그걸 알아 버린 내가 물러날 거란 생각은 버려요.”

* * *

도하의 집무실에서 나온 세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혼자 가겠다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힐 테니 입이라도 다물고 있자 싶었다.

그리고 도하는 혼란스러울 그녀를 배려해서 말을 걸거나 기습 같은 고백으로 그녀를 놀라게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의 숨결만 의식하는 상태가 쭉 이어지고.

어느샌가 차가 멈추었다.

이때를 기다려 온 세연은 빠르게 벨트를 풀어 준비해 둔 인사말을 꺼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차 문을 열자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두 사람이 만들어 낸 더운 공기와 다르지 않은 늦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발끝이 땅바닥에 닿기 전,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세연을 붙잡았다.

그녀보다 한발 빠른 그가 먼저 내려 세연의 눈앞에 훤칠한 몸을 내보였다.

그녀처럼 이 순간을 기다려 온 듯 도하가 입꼬리를 휘었다.

“내 생각 하면서 먹어요.”

오만한 미소를 띤 입술이 그녀의 시야를 장악해 버렸다.

“뭐, 를요?”

그녀의 발칙한 상상을 눈치챈 그는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가 황급히 떨어진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곤 세연의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

“부응하고 싶지만 참아 볼게요. 그런데 내가 말한 건.”

그의 온도가 세연에게 전해졌다.

세연은 처음부터 그가 계획한 일에 말려들었음을 온몸으로 직감하고야 말았다.

“디저트 세트라.”

손끝에 쥐어진 박스에 세연의 얼굴이 여지없이 붉어졌다.

그런 그녀를 담아낸 그의 눈가마저 붉어 보인다면 과한 착각일까.

“아쉽군요.”

모른 척할걸.

들으라고 부러 흘린 나직한 뒷말에 세연은 심장을 움켜쥐고 싶을 만큼 가슴 안쪽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주말 잘 보내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월요일에 있을 진형과의 경합을 말하는 것이다.

긴장되어야 마땅한데 저 말을 듣고도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빛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담긴 눈동자가 주는 안정감에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신 있는 대답 좋네요. 이렇게만 해요.”

도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새겨 넣듯,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고백에도 이렇게만 대답해 달라는 의미를 담아.

* * *

세연은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았다.

“하아.”

술을 마신 것처럼 토해 낸 숨이 뜨거웠다.

‘알고 있었다니.’

다시 떠올려 봐도 창피했다.

도하를 생각하면 두 근 반 세 근 반, 심장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와 이어질 수 없는 처지를 상기하자 거칠게 뛰던 심장 박동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세연은 음울한 낯으로 도하가 저를 위해 준비한 디저트 박스를 열어 보았다.

마들렌 외에 컵케이크도 있었다.

“진형 선배는 이런 거 먹으면 살찐다고 할 텐데…… 비교가 될 수밖에 없잖아.”

도하는 그 반대였다.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설사 살이 쪄도 그의 마음은 변치 않을 것 같았다.

한결같은 도하와의 연애는 달콤하겠지.

“맛있다.”

혀끝을 맴도는 맛은 부드럽고 달달했다.

크림치즈를 쪽, 빨다가 이에 딱딱한 포크가 걸렸다. 마치 제 상황인 양.

‘현실은 상상과 다를지도 몰라.’

진형과의 진전 없는 연애조차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고 지쳤다.

막 사귈 때만 해도 설렘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어떤가.

삭막한 감정만 안겨 줄 끝만 보였다.

그런데 이성으로 끌리다 못해 좋아하게 된 도하와 사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진형과 있었던 일과 달리 무심하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바빠서 그가 못 만난다고 하면 서운하고 작은 일에도 안절부절못할 자신이 눈에 훤했다.

“그러다 보면 대표님과도 싸울 일이 생기겠지…….”

어쩌면 그게 두려워 세연은 그가 핑계라고 말한 것을 내세워 자신의 마음을 종이처럼 접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슬퍼할 일이 없게 허공에 날려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형 선배와 연애하지 않았다면 환상에 젖어 대표님의 고백을 받아들였을까…….’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결국 미련한 짓일 뿐이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하자.”

도하가 믿고 맡겨 준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세연은 주말 내내 시안 작업에 매진했다.

* * *

그리고 월요일 당일.

“시작하죠.”

긴 테이블에 둔 두 손으로 깍지를 낀 도하가 세연과 진형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발표할 겁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진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빔 프로젝터로 스크린을 띄운 진형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여백을 채운 레이아웃 디자인은 화려했다.

“슬라이드 쇼로…….”

진형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도하의 시선이 제게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세연은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다.

‘보세요.’

세연이 눈길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도하의 눈꼬리가 음영을 그려 냈을 뿐,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못 알아들었을 그가 아닌데.

세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회의실엔 그 말고도 제작 팀원들이 있었다.

혹시라도 도하의 시선이 그녀에게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난처해지는 건 그였다.

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세연이 꿋꿋하게 스크린만 바라보자 얼굴에 닿는 시선의 느낌이 옅어졌다.

곁눈질을 했을 때 도하는 진형의 발표물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작게나마 안도한 세연이지만 어째 그와 연애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상입니다.”

진형의 발표가 끝나고 세연의 차례가 왔다.

어쩔 수 없이 긴장한 세연이 의자를 밀면서 일어설 때였다.

그녀를 보는 도하의 입가가 유려하게 휘어져 있었다.

아직 그녀의 것이 발표되지 않았는데도, 승기에 찬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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