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떨렸어요?”
금욕적인 상사는 이 자리에 없었다. 오직 그녀를 탐할 것 같은 열망이 훅 끼쳐 와 세연은 숨이 차올랐다.
“아님 싫었습니까.”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있었다. 세연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속마음을 풀어헤쳤다.
“싫지, 않았어요.”
“좋았단 말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잔잔하지 않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드리웠다.
아니라고 해 봤자 금방 들통나 버릴 테고 어차피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을.
세연의 일상을 뒤흔든 도하는 그녀가 그와 관련된 일에는 태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일도 세연 씨를 보러 올 겁니다.”
그래서일 테다.
“내가 오는 게 싫으면, 먼저 내게로 와요.”
그녀를 보는 그의 표정이 잘난 외모를 받쳐 주는 오만한 빛으로 덮여 있었다.
* * *
세연은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전날의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잘 되어 가?”
세연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은근슬쩍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진형을 마주했다.
“선배는요?”
“나야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이지. 누가 이기든 결과에 승복하자.”
진형이 크흠, 목울대를 크게 울리며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를 냈다.
“네. 그래요.”
덩달아 웃어 주기는 했지만 진형과 대화할수록 은근히 기가 빨렸다.
첫 연애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그럴지도 몰랐다. 이러고 있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졌다.
‘도하의 고백이 없었더라도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잠깐이나마 들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진형과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안 헤어져?”
남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지 휴식을 틈타 유정이 물어 왔다.
“헤어지겠지. 언젠가.”
차를 젓던 스푼을 씻으면서 세연이 심드렁히 대답하자 유정이 기가 막힌 목소리로 확인 절차에 들어갔다.
“헤어지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야?”
“이별을 고하고야 싶지.”
“근데?”
“헤어지자고 하면 냉큼 ‘그러자’라고 할 것 같지가 않아.”
크게 싸운 것도 아니니 진형은 그녀의 이별 선언을 납득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변했다고?
아니면 이 연애를 밝힐 생각이 없는 선배와의 관계에서 끝을 보았다고?
무엇 하나 진형의 마음을 단념시킬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헤어지자는 소리를 기다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받아들일 때까지 말해야지!”
유정은 그녀의 결정에 반대하며 강력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 것처럼 벌게진 얼굴을 그녀에게로 들이민 유정이 신신당부했다.
“그러지 말고 미국에 다녀온 뒤에 말해! 안 그럼 어영부영 시간만 끄는 거야.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구진형 씨, 네 입에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기다릴 사람이야.”
“……알았어.”
유정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얘기 말고 너는? 서오랑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세연은 유정과 서오의 연애 행방이 궁금했다.
“나? 그냥 이대로 지내기로 했어.”
시크한 대답에 세연은 서오와 일이 잘 안 풀렸나 싶어 걱정스럽게 유정을 쳐다보았지만, 유정의 낯빛만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서오가 싫대?”
“정반대야.”
“응?”
“한 번 잤다고 책임지겠다는 거야. 기억도 못 하는 녀석이.”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결혼 전제로 사귀자는 거지.”
어수룩한 서오는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이 유정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 틀림없어 보였다.
“이상한 여자한테 걸리면 어쩌나 싶긴 하지만, 뭐, 내 남자도 아니고 내가 챙겨 줄 필요는 없잖아.”
* * *
서류를 들여다보는 게 이렇게 지루한 일이었나.
한가한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천지인데 도하는 진득하게 사무를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오려나.”
세연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때 그의 생각을 끊어 내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해외 번호였다. 국제 전화를 받자 차분한 목소리의 첫 단어가 엉성하게 꽂혔다.
-도하! 다음 주에 네가 오는 거 맞지?
그의 이름만 한국식 발음이었다.
{물론, 우리 측의 협업에 응해 줘서 고마워. 소피아.}
도하는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해 TS 광고 수주를 따내는 데 지대하게 공헌한 해외 프로덕션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몇 년을 알아 왔는데 당연히 수락해야지. 네 실력 또한 내가 잘 알고. 너와 촬영 작업을 한다니 기대가 커.
똑똑.
기대감을 안겨 주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하의 입가에 어린 은은한 미소가 짙어졌다.
핸드폰을 귓가에 떼고서 그가 단조로운 음색을 부드럽게 바꿨다.
“들어와요.”
-…….
{소피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끊어야 해. 현지에서 보자.}
도하의 온 신경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연에게 향해 있었다.
-바쁜 시각에 전화해서 미안해. 도하. 수고해.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그에게 닿지 못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렇게라도 핑계를 대어 온 모양인데 그녀가 스스로 찾아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 조각이 부서진 것처럼 은은하게 자리한 미소를 거둔 도하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앉아요.”
소파에 앉는 세연이 겁을 먹지 않도록 도하는 천천히 걸었다.
“뭐 마실래요?”
“제가 가져올게요.”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한 세연이 엉덩이를 슬쩍 들어 올리자 도하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누가 하면 어때요. 해 주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거고. 여긴 내 공간이니 내가 하는 게 맞죠.”
세연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띠었지만 그래도 좋은 도하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 대표실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안 있어 돌아온 그의 손엔 디저트 박스가 들려 있었다.
* * *
세연의 앞에 한입에 먹기 좋은 마들렌과 달달한 맛에 어울릴 홍차가 세팅되었다.
“잘 먹기에 준비했습니다.”
그제야 세연은 한 입 먹은 마들렌 맛이 친숙한 이유를 알아챘다.
강 비서를 속였던 호텔 레스토랑에서 나온 디저트였다.
그때 먹었던 음식의 맛보다 그녀를 쳐다보던 도하의 시선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많이 먹어요. 가져갈 것도 사다 놓았습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두 눈동자와 그때 그녀를 응시했던 눈빛은 같은 결을 띠고 있었다.
정말로 날 좋아하는구나.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 알게 해 주는 도하의 행동 하나하나에 세연의 가슴이 찌릿했다.
그를 속이고 있는 그녀는 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다.
너무나 욕심이 나지만 그를 포기해야 했다.
그를 원하는 마음은 부도덕했다.
애인이 있음에도 도하를 마음에 품었으니, 그릇된 시작을 이어 나가 봤자 그와 자신에게 좋지 못한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이를 알고서도 모른 척, 도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그의 진심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대표님. 할 말이 있습니다.”
세연은 결연한 표정으로 세심하게 저를 살피는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하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 말이 뭔지 기대되네요.”
단단히 먹은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세연은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 때문에 도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차마 보기가 두려워 고개를 떨구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 사귀는 사람 있습니다.”
“그리고?”
“네?”
이런 태연한 목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세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도하의 표정이 굳어 있지 않자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려 눈을 깜빡였다.
지금껏 본의 아니게 속여 왔음을 고백했음에도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입 선을 비스듬히 올려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이게 아닌데.’
도리어 당황한 건 그녀였다.
격하게 흔들리는 세연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있던 도하가 교차한 다리에 둔 양손을 겹쳤다.
그 여유로운 자세가 너무나 이도하다워 세연은 납작 엎드려야 할 것만 같았다.
“누구냐고 물어볼까요?”
“……!”
아까의 놀람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연애 중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어쩐지 자신과 사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부러 낌새를 풍기는 도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세연은 자연스럽게 짧아진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비품실.”
그 한마디에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선연히 기억에 남은 발차기 소리도 떠올랐다. 세연은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막았다. 그때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
“그 이전부터 눈치챘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바로 가늠되지 않는 말에 골똘히 생각하던 세연은 짤막한 한 문장에 아연해졌다.
“차 키.”
자신의 생각을 앞서가는 도하 때문에 세연은 얼굴이 뒤늦은 수치로 벌게지고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차 키를 잃어버리신 게…….”
“실수가 아니라는 거죠.”
깔끔한 단언이 그럴 리가 없다는 세연의 짐작을 잘라 낸다.
일부러 그랬다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왜 그랬냐고 따질 수가 없는 세연은 못 볼 꼴을 도하에게 다 보였다는 생각에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 단념시키려는 모양인데 그런 걸로 내 마음 달라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