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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4)화 (44/70)

44화

“구진형 씨한테 감정이 있으신가 본데 사감을 끌어들인 합당한 사유가 있겠죠.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인가요?”

도하를 알아 온 지가 몇 년인데 진형에게 날을 세우는 냉기를 혜선은 모르지 않았다.

심플한 소파에 앉은 도하가 착석하지도 않은 혜선을 올려다보았다.

“앉으세요.”

다리를 붙여 소파 중앙에 앉은 혜선이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턱을 까닥였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혜선이 기어코 들어야겠다는 듯이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숨길 생각이 없던 도하는 미간 사이를 가볍게 쓸며 본심을 밝혔다.

“전부 털어놓을 수 없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정세연 씨를 좋아해요.”

“……뭐?”

“뭐엇!”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서던 석호 또한 경악했다.

혜선은 미끄러지듯이 내려간 허리를 얼른 곧추세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탁했다.

“석호 씨. 나 냉수가 필요한데.”

혜선은 대표실을 들를 때마다 물 외에 다른 차는 마시지도 않았다.

그 기호를 알아 생수를 챙긴 석호가 어벙한 소리를 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네요. 냉수 먹고 정신 차리려고 저도 모르게 입에 댔어요. 다시 갖다 드릴게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여자를 돌처럼 대하는 도하였다. 제 친구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기에 석호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휘적휘적 걸었다.

혜선의 심경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혜선이 어질한 머리를 흔들어 대자 도하의 왼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그럼 안 놀라겠니?”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용했다.

“4년 전인가. 연애하라고 했을 때 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여성들이 숱하게 추파를 던져도 무심했던 도하가 기억나지 않은 일로 입을 다물자 혜선이 언젠가 들었던 말을 재현했다.

“결혼하지 않을 건데 시간 낭비를 왜 하냐고 그랬었어.”

도하의 흉내를 내듯이 건조하게 끼얹은 부연에 날렵한 턱선이 무언가를 우물거리듯이 요동쳤다.

“왜, 연애는 하고 싶지만 결혼할 감정은 아니야?”

“결혼까지는 생각 못 해 봤는데.”

혀를 씹은 듯한 표정을 갈무리한 도하가 진중한 눈동자를 빛냈다.

“좋을 것 같네요.”

“……!”

“……!”

이보다 놀랄 일이 또 있을까. 도하가 터트린 폭탄급 발언에 혜선과 그녀에게 조용히 생수를 건네던 석호가 무지막지하게 놀란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리고 4년 전이면 언제 적입니까. 가치관이 바뀔 때도 됐죠. 그런 고로, 저 구제한다고 생각하고 세연 씨 잘 부탁드립니다.”

결연한 표정만 놓고 보면 100억짜리 수주를 성사시키는 대표로만 보일 것이었다. 혜선이 일순 멍한 정신을 차리려 생수를 원샷했다.

“언제부터 사귄 건데.”

“아직은 사귄 상태 아닙니다. 자각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나 몇 번을 놀라게 하는 거야. 천하의 이도하가 짝사랑 중이라고?”

“문제 있습니까.”

“아주 많지. 떡 줄 사람은 생각 안 하는데 잘 부탁드린다고? 세연 씨만 맞이하면 될 살림을 차리고 있는 거잖아.”

“부정 못 하겠군요.”

“진짜네. 이거.”

혜선은 인정해야 했다.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말도 못 하게 이도하는 정세연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다.

“첫사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고 하더니. 딱 네가 그 짝이네. 내 입으로 불공정한 행위를 용납 못 한다고 했어. 몇 분 지났다고 내게 이래?”

“이번 일은 공평하게 판단하면 됩니다.”

도하는 세연이 질 것이라고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다면 불공정한 뒷거래가 있었다고 의심해 볼 만했다.

구진형이라면 실력이 안 되니 남몰래 일을 벌일 것이었다.

자연히 심기가 더러워진 도하가 뭐라도 주워들을까 싶어 혜선의 뒤를 서성거리는 석호에게 무람없이 말했다.

“일 보러 안 나가?”

“……갑니다요. 연애 상담 잘 들어줄 자신이 있는데…….”

잡아 달라는 듯이 석호가 천천히 걸었으나 그러든 말든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도하는 어느새 대표로서 돌아가 있었다.

“감정이 앞선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내 마음을 제쳐 두고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정세연 씨가 잡고 있습니다.”

“확실히, 두 사람의 시안은 전달하는 카피라이팅부터 다르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혜선이 팔짱을 풀고서는 일어났다.

“최종안이 결정될 때까지 누구께서 개인적인 감정만 끌어들이지 않으면 문제 될 건 없겠네요.”

“주의하도록 하죠.”

“이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귀띔해 주시고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선 결혼, 후 연애를 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으니 협조 부탁드린다고 언질한 겁니다.”

선 결혼 후 연애?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혜선이 하, 하고 기가 막힌 헛숨을 토해 내자 도하가 선명하게 입술 라인을 끌어 올렸다.

“다음 주 미국 출장에 정세연 씨를 동행시킬 겁니다. 부담감 들지 않게 잘 말해 주세요.”

* * *

“세연 씨.”

“네.”

세연은 하던 페이퍼 워크를 중단하고 의자에 앉는 혜선의 자리로 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권 발급되어 있나요?”

“네.”

“다음 주 해외 로케 출장에 세연 씨도 가기로 되어 있어요.”

“네??”

“놀란 마음 이해해요. 빠른 감이 없지 않지만 현장감 익히는 데 제격이니 다녀와요. 어엿한 카피라이터잖아요.”

언젠가 해야 할 일이다. 혜선이 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들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촬영지는 미국으로 확정되었나요?”

후보지는 세 곳이었다. PT 경쟁에서 광고주인 TS 전자가 흡족했던 제안서가 해외 프로덕션과 콜라보레이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추려졌다.

“미국에 본사를 둔 오텀 프로덕션으로 결정 났어요. TF 프로젝트 팀의 책임자로 대표님도 가실 거예요. 황성수 팀장 그리고 세연 씨 외에 로케이션부의 팀원이 출국할 거고요.”

혜선이 빠지고 도하가 통솔하는 조합에 세연의 눈동자가 짤막하게 흔들렸다.

“팀장님은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자신의 출국 결정에 그가 개입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 가닥의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세연은 눈동자에 인 동요를 감추려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흡족한 미소를 띠던 혜선의 입꼬리가 가늠할 수 없게 선연한 반달형을 그렸다.

“오텀 프로덕션 소피아 존 감독과 대표님이 친분이 있어요. 그러니 나보단 대표님이 현장 감독을 잘하실 거예요.”

수긍하게 되는 조리에 세연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현실성이 떨어지는지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그의 고백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민하게 반응했다.

‘대표님과 둘만 가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이서 가는 거니 별일이 있겠나 싶었다.

“차질 없게 준비하겠습니다.”

* * *

사이키 조명이 현란하게 벽과 바닥을 난사하는 클럽.

거금 들여 잡은 VIP 룸에서 진형은 문을 주시하며 미리 시켜 놓은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안 오는 거 아니겠지?’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자니 온다고 답장 없던 두 동료가 얼굴을 비쳤다.

“여기로 왜 불렀는데.”

부대낀 지 3년 넘은 주니어급인 두 대리가 진형이 뭘 부탁할지 감을 잡고서 인상부터 찡그렸다.

“나 좀 도와주라.”

“정세연 씨와의 경합을 말하는 거라면 우린 못 도와줘.”

“마음이야 널 도와주고 싶지. 근데 팀장이 못 박아 놓았잖아. 들키면 우리 셋 다 아웃이라고.”

드러누워도 여유 공간이 남는 긴 소파에 두 대리가 앉았다. 그들은 비싼 술을 댄 입을 나중에 싹 씻을 수 없으니 눈치껏 술판의 안주를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양심 있는 척하기는.’

그들의 얍삽한 처신에 진형은 비싼 액체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비틀었다.

“사바사바하자는 게 아니야. 무조건 내 편을 들어 달라는 부탁은 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그러냐.”

제 말에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두 대리의 눈앞에서 진형은 샷 잔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 안에서 보석을 굴린다는 형언이 과하지 않는 액체가 바닥을 적실 것처럼 아래쪽으로 쏠리자 두 대리의 목울대에서 탐욕적인 소리가 꿀렁거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누군가의 소리를 신호탄으로 삼아 진형이 손목의 스냅을 돌려 샷 잔을 수평으로 두었다.

“하지만 근소한 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제작부서 인원은 총 스물두 명이었다. 대표까지 합하면 스물세 명.

다수결과 비공개로 진행된다면 종이 투표일 것이다.

최종안의 결과가 비등비등할 때 한 명이라도 확보해야 승부가 갈린다.

“내가 입사한 지 몇 달 안 된 신입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진형은 자신 있게 씨익, 웃었다.

“실력에서든 실무 경험에서든 말이야.”

보는 눈이 다 같을 수 없었고 진형은 실무 능력만큼은 신입과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진형의 동기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네가 뭐가 부족해서 지겠어. 센스 감각이 좀 있나 본데 그 하나로 네 짬밥을 어찌 이기겠냐.”

“솔직히 너가 설렁설렁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어.”

자존심이 걸린 판가름에서 진형이 신입에게 진다면 그들 역시 여러모로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두 대리의 마음이 진형이 따라 주는 술잔으로 기울어졌다.

“내 말이 그거야.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에 대한 대비를 하자는 거지.”

진형이 두 대리의 앞에 놓인 샷 잔에 비싼 술을 콸콸 들이붓자 그들의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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