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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3)화 (43/70)

43화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분해 죽겠다는 듯이 진형이 세연을 째려보았고, 노골적인 시기에 세연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이유는.”

세연이 느낄 감정이 뭔지 아는 도하의 표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평소에도 도하에게 불만이 많던 진형이 그의 오만한 말투에 더욱 발끈했다.

“제가 하던 파트였습니다. 세연 씨는 기존 업무를 보완한 것뿐입니다. 제 성과를 빼앗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 대리의 말도 일리 있군요.”

도하가 냉랭한 목소리로 항의를 수긍하자 진형은 내심 당황했다.

“그럼……!”

“그래서 세연 씨가 독자적인 샘플 타입을 기획하기로 했습니다.”

덫은 깔려 있었다.

정세연의 마음을 돌릴 계획도, 구진형을 치울 망도 도하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설계된 상태였다.

그는 그녀에게 찌질한 새끼의 실체를 보여 줄 의향이었다.

구남친이 될 구진형이 쓰레기라는 판단은 세연의 몫이었다. 도하는 그녀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었다.

“정세연 씨.”

확고한 의지를 품은 눈동자에 세연이 완벽하게 들어찼다.

* * *

너를 믿고 있다는 시선은 진형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열기를 품고 있었다.

“정세연 씨.”

“……네. 대표님.”

도하에게 감각이 쏠리며 그를 담아낸 세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진행 상황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메인 바탕 톤 앤 매너는 끝냈습니다.”

“좋습니다. 기존 포맷 수정안과 별도로 진행한 시안 준비하세요.”

“네. 시안만 출력하면 됩니다.”

수정안은 도하에게 보고하고 난 뒤 폐기하지 않았었다.

세연이 재깍 움직이자 도하가 멍청하게 서 있는 진형에게 말했다.

“구 대리는 하던 구상안 가져오세요.”

“……알겠습니다.”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프린터 작동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여기 있습니다.”

두 손으로 건넨 파일을 받은 도하가 세연을 응시했다.

“회의실로 이동하죠.”

제작팀의 구성원들이 아이데이션 회의실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진형이 들어서자 도하가 테이블에 세연에게서 받은 두 파일을 상하로 배치해 펼쳤다.

“구 대리의 것은 옆에 놔두세요.”

진형은 이를 악물며 도하의 지시를 따랐다.

“각 원본을 보시죠.”

누가 했는지 확실하게 비교할 수 있는 두 서류에 다수의 시선이 꽂혔다.

“정세연 씨의 시안은 카피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 제이온의 CI에 맞춰 있습니다.”

그 말에 다들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하가 일을 주도했을 때부터 가만히 있던 혜선이 말을 보탰다.

“알아보기 쉽게 워딩을 잘 살렸네요. 특히 <하이 카피> 문구는 의뢰자의 심리를 자극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직관적이지 않아 타이틀 배너로서 활용도가 떨어집니다.”

혜선의 말에 위기감을 느낀 진형이 거세게 반박했다.

“이 앱 취지는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카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다각도로 눈에 익는 단어여야 하는데 특색이 강한 캐치프레이즈는 연령이 높은 고객에게는 다소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진형이 반감이 드러난 목소리로 세연의 문안을 비판하자 도하는 왼 눈썹을 치켜들었다.

“직관적인 카피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광고 대행사인 ‘제이온’ 앱의 틀이 식상하다면 신뢰성으로 직결됩니다.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누가 의뢰하겠습니까.”

도하는 제게 주목하는 다수의 시선을 천천히 맞추며 설득력 있게 목소리를 실었다.

“앱 스토어의 주요 유입층은 신세대입니다. 젊은 연령층의 마음을 노려야 한다는 점과 사용자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되 색다른 특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도하의 브리핑은 세연이 작성한 구상 시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세연 씨는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잘 담았습니다. 구 대리가 구축한 포맷에서 재량껏 말이죠. 하지만 구 대리의 논점도 배제할 수가 없기에 두 최종안을 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의 결정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 빼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진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혜선 CD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작 팀의 결정권을 가진 혜선이 세 시안을 들추며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신중히 결정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십여 분이 지나자 진형의 파일을 덮은 혜선이 날카로운 견해를 내비쳤다.

“메인 문구 지정 예시가 전부 딱딱하네요……. 1차 테스트를 거치지 않아 미흡한 부분도 보이고, 매끄럽지 않은 텍스트 때문에 눈이 어지러워요.”

조목조목 들어 지적하는 목소리는 악의가 없어 더 가혹했다. 귀싸대기를 맞은 듯한 붉은 기가 진형의 양 볼에 낙인처럼 찍혔다.

“반면 세연 씨의 수정안과 새 시안에선 고칠 게 보이지 않는군요.”

본받을 점이 많은 상사에게 칭찬을 받자 세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진형과 틀어져 안 좋았던 기분이 회복되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가를 인지하자마자 도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눈치채고야 말았다.

저를 보고 있는 그가 어쩐지 웃고 있는 듯해 부끄러워진 세연은 의도치 않게 진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흡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걸 혜선 팀장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퇴고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경우가 불리하다고 외치는 진형은 동조해 달라며 동료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별안간 아픈 관계로 세연 씨에게 맡기느라 손대지 못했던 겁니다.”

그와 친한 몇몇이 시선을 슬쩍 피하자 진형이 눈을 부라리면서 세연에게 뭐라고 말해 달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정세연 씨의 잘못이라고 몰아가는 투군요.”

오금이 저리게 하는 음색이었다.

깨갱대지도 못하는 진형의 비굴함에 세연은 좁혔던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다른 인격처럼 보이는 진형의 면모는 그녀에게 위기가 닥치면 그만 살고자 그녀를 챙기지 않고 내뺄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했다.

“세연 씨는 구 대리가 했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도하가 세연을 두둔하자 진형으로 인해 시린 가슴이 후끈거렸다.

“기존 작업물이 셀렉 되었다면 누구의 성과로 돌아갔을지 생각이 있는 머리라면 알 겁니다.”

도하는 늠름한 자태로 차가운 외관과 걸맞은 카리스마를 휘둘렀다. 왜소한 진형과 더욱 비교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압도하는 표정이 세연에게로 향하는 순간, 그의 얼굴엔 그녀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려한 입꼬리와 눈꼬리가 입체감 있게 휘어져 있었다.

반응해서는 안 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차라리 안 보면 덜할까 싶어 세연은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러기 전에 도하의 시선이 진형에게로 돌아갔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시선은 엿보는 것만으로 섬뜩했다. 모를 수 없는 도하의 감정에 세연은 그가 진형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를 싫어한다고 오해했었던 눈빛은, 진형을 응시하는 시선과 아예 격이 달랐다.

“그러니 불평불만을 쏟아 낼 게 아니라 주니어 직급에 맞는 합당한 실력을 보이면 됩니다.”

철회할 의지가 없는 표정으로 도하가 제작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이 진형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들은 사원들이 남 일처럼 방관하던 마음을 다잡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혜선이 손뼉을 크게 쳤다.

“구진형 씨의 사정도 고려해서 다수결을 비공개로 진행하도록 하죠. 대표님 생각은 어떠세요?”

“상관없습니다. 데드라인은 사흘. 월요일 10시에 결과물을 보도록 하죠.”

도하가 간결하게 발언하자 혜선의 시선이 진형과 세연에게로 움직였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요. 두 사람.”

“저는 괜찮습니다.”

“저돕니다.”

진형은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앱 콘텐츠는 두 사람에게 달려 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부당한 행위가 적발된다면 처분권은 대표님에게 맡기겠습니다.”

투표 조작이 이루어진다면 해고로 직결된다는 경고였다.

“더 이상의 잡음은 원치 않으니 여기서 마무리하죠.”

혜선이 쟁점을 깔끔하게 종결시켰다.

혜선이 말을 끝맺자 도하가 세연을 지나치면서 낮은 소리로 그녀의 몸을 은근히 건드렸다.

“믿고 있어요.”

알싸한 스킨 향과 귓가를 울리는 저음에 세연은 심장이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아 걱정될 정도였다.

혜선이 도하의 뒤를 붙어 나가고 팀원들까지 신속히 자리를 뜨자 회의실에 세연과 진형밖에 남지 않았다.

“정세연. 이게 네가 말한 일 관련이었어?”

“선배?”

“대표하고 나눈 대화의 용건이 이거였냐고!”

“아니에요!”

“아니라면 내게 말 안 한 이유가 뭐야!”

깊어 보이는 오해를 바로잡으려면 모든 것을 밝혀야 했다.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진형의 화가 풀어질까.

“둘이서 작당한 짓에 놀아나는 날 보니까 우스웠겠네.”

오히려 역효과가 날 듯싶었다.

“네 얼굴 당분간 보기 싫다. 이것만은 알아 둬. 절대로 너한테 안 밀려날 거야.”

그녀가 제 실적을 가로챌 거라고 믿는 진형이 그녀의 말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 * *

“이도하 대표.”

혜선은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대표실로 직행하지 않는 도하를 불렀다.

“저 좀 보실까요?”

회의실을 곁눈질하던 도하가 탄탄한 몸을 느릿하게 틀었다.

“대표실로 올라가죠.”

그리고 자리를 옮겨.

“절차가 과했다는 거 인정하시죠?”

양해를 구하지 않고 팀 분위기를 삭막하게 해 놓았으니 제작 팀을 총괄하는 혜선이 불만을 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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