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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2)화 (42/70)

42화

“주아야.”

조바심에 진형의 손길이 거칠었다.

곤한 잠을 방해받은 주아가 모기를 내쫓듯이 어깨를 쥔 손을 내리쳤다.

“왜에……! 나 더는 못 해…….”

진형은 귀찮다고 휘젓는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정확히 맞은 손등을 감싸 쥔 진형이 씨근덕거리는 숨을 참았다. 해 달라고 해도 거기가 설 기력이 없다!

“일어나 봐. 나 올라가 봐야 해.”

그 말에 주아의 두 눈이 독사의 머리처럼 뾰족하게 변했다.

“무슨 말이야. 오빠 올라가면 나는?!”

한 마리의 암컷 표범처럼 주아가 뾰족한 덧니를 내보였다.

“친구들 불러서 더 놀다 오면 되잖아.”

같이 올라가다간 못 참고 폭발할 것 같았다. 그랬다간 공들인 하루가 허사로 돌아간다.

“그럴까?”

떼어 놓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는데 너무 잘 먹혔다.

“그런데 친구들하고 어디서 놀지? 이 펜션에서만 지낼 수도 없고. 밥도 사 먹어야 하고…….”

주아와 만나고부터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이번 달도 안 끝났는데 족히 200만 원 가까이 썼다.

주아의 소비 습관을 알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는 진형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적당히 써야 해.”

“운전 조심해!”

주아가 진형의 허리를 껴안으며 엉덩이를 덩실거렸다.

다음 달 카드 값이 걱정되었지만 승진만 하면 해결될 거란 생각에 진형은 부글부글 끊는 속으로 제 허리를 감은 손을 떼어 냈다.

* * *

“정세연……! 세연아!”

복도를 지나던 세연은 다급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선배.”

도하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에 진형을 담아낼 공간이 없었다.

며칠 뒤에 볼 진형이 이른 시간에 와 있자 세연은 그가 아팠다는 사실을 이제야 상기했다.

“비품실로 이동하자.”

진형이 누가 있나 없나 살펴보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세연은 더 이상 진형의 행동을 봐도 실망감이 일지 않았다.

진형의 속내를 확인한 까닭에 진형을 보는 눈길이 무심했다.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형과의 연애를 시작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섣부른 선택은 이렇게 돌아왔다.

도하에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할 수 없기에 세연은 진형의 얼굴을 전처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마음이야 어떻든, 과정이 중요했다.

이 연애가 끝날 때까지는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었다.

진형에게 잘하자고 되새기는 순간 가슴 언저리가 뭉근하게 아팠다.

이 아픔이 진형이 아닌 도하에게서 기인된 통각임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비품실에 들어선 진형은 그녀가 문을 제대로 닫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용건이 있어서 대표님과 시간을 가졌어요.”

“무슨 용건?”

“……업무 관련이요.”

이 순간에도 도하가 떠올랐다. 진형을 앞에 두고도 도하를 생각해 버린 세연이 술렁이는 감정을 다스리기도 전에 격양된 목소리가 돌아왔다.

“끝나고 나서 왜 전화 안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충전만 해 놓고 잤어요.”

“아침엔? 일어나서 확인했을 거 아니야.”

“확인 안 해 봤어요.”

탐색하는 듯한 묘한 눈총이 그녀의 얼굴에 한참을 머물렀다.

“후하, 너.”

숨을 크게 토해 낸 진형이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비딱한 자세를 취했다.

“너는 내 걱정도 안 됐어?”

“미안해요. 어젠 정말로 정신이 없었어요. 몸은 괜찮아요?”

“빨리도 물어본다.”

신경질적인 인상이 도드라졌다. 흥분한 진형이 콧김을 뿜자 그의 안경에 김이 서렸다.

“내가 너라면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을 거야. 연락 안 돼서 아픈 몸으로 출근까지 했잖아.”

감정적인 말투로 쏘아붙이는 진형의 전신이 격하게 들썩거렸다.

“화 풀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화 안 내게 생겼어?!”

진형이 사정없이 그녀를 몰아세우자 미안한 마음이 쏙 들어갔다.

속이 상한 세연은 비딱하게 받아쳤다.

“그런 것치고는 아파 보이지 않는데요.”

“뭐?”

“내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해요?”

“그게 미안하다는 사람의 태도야?!”

사귀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보이게 되는지 세연은 진형의 감정적인 태도가 불편했다.

“내 잘못은 인정할게요.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었어요.”

싸우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연애라지만 하나하나 사소한 것까지 맞지 않자 심신이 피로했다.

“저도 물어볼게요. 왜 대표님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세연이 팍 기분 상한 감정을 드러내자 진형의 입이 다물어졌다.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진형이 격양되어 올라간 어깨를 슬그머니 좁히더니 눈동자를 가늘게 옆으로 두었다.

“그거야…… 대표가 널 싫어하니까…….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걱정돼서 한 말이었지.”

“대표님은 절……!!”

내가 무슨 짓을! 욱한 마음에 튀어나온 제 말소리에 세연은 황급히 입을 깨물었다.

“왜 말을 말아?”

“……대표님에게 안 좋은 소리 듣지 않았다고요.”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데.”

“저번부터 느낀 건데…….”

뭔가 추궁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지라 세연은 진형을 응시하는 눈매를 좁혔다.

“대표님이 제게 업무 외의 용건이라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선배의 말을 들어보면요.”

진형은 도하의 감정을 알았던 것일까.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던데.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침이라도 묻은 듯이 반들거리는 입술이 이어 붙인 그녀의 말에 더 번지르르해졌다.

“선배 행동이 그래요. 제가 모르는,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대표님과 선배 사이에 비밀이 있는 것 같아요.”

진형의 안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리고 안경테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세연은 별안간 든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진형이 입술을 할짝댔다.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애인인데 물을 수 있는 걸 너도 참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진형이 자신을 속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원 없이 파고들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고요. 나가 봐도 되죠?”

“……그래.”

그녀도 진형을 속이고 있으니까.

거짓말은 서로에게 독이 된다.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진형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진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발전될 수 없어도 이유 없이 헤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신뢰가 바닥난 상태에서 이 관계를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 *

“구진형 씨?”

제작부서로 들어선 진형을 본 혜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연차 아직 안 끝났잖아요?”

혜선의 시선을 받으며 진형이 입술을 핥았다.

“한결 나아져서 출근했습니다. 아무래도 세연 씨에게 맡긴 일이 걱정돼서요.”

“무리하다가 또 탈 나요. 걱정은 접어 두고 예정대로 쉬고 와요. 세연 씨 잘하고 있어요.”

“그래요?”

세연을 쳐다보는 진형의 눈꼬리가 쭉 올라갔다.

“그러면 검토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세연 씨.”

“네.”

“자료 전달 부탁합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세연은 열심히 한 시간과 노력이 진형에게로 돌아가는 것 같아 공로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구진형 씨.”

쓰라린 가슴이 덜렁거렸다.

심장이 반응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세연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부서로 진입한 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 * *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변화였지만 도하는 세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신속히 단속했다.

세연이 진형과 있었던 모습에 그간 가슴이 쩍쩍 얼어붙는 듯했다. 저딴 놈에게 간 미소가 가슴이 시리게 탐이 났다.

왜 나를 보지 않느냐고, 화풀이하듯이 그녀를 바라본 격이었다.

머저리같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느라 시간만 질질 끌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니 그녀가 그릇되게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에게 실망하여 멀어지도록 부러 차갑게 군것도 없지 않았으니.

더 이상 뒤처져 미적거릴 마음이 없는 도하가 열망이 가득한 눈길로 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저로 인해 당황하는 그녀의 반응이 기꺼워 도하는 속으로 웃었다. 곧이어 전신을 굳힌 진형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세연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시선이었다.

“연차를 썼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이 좋지 않아서 쉬었던 겁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각질을 뜯듯이 입술을 깨물며 진형이 궁색한 이유를 댔다.

그 새빨간 거짓말을 이용할 생각인 도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되었다니 카피라이터 서포터즈 17기 멘토링을 맡겨도 될 것 같군요.”

“예!?”

“문제 있습니까.”

“제가 거길 왜…… 제작 1팀 김우혁 씨가 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들어 경력자들이 기피하는 출장 강의였다.

국가 취업 지원 합작인 카피라이터 육성 센터는 초창기 때에는 도하와 혜선이 진행했지만 10기부터는 신입 사원이 과업처럼 담당하게 되었다.

신입 사원이 있는데 연차가 있는 주니어인 진형이 할 군번이 아닌 것이다.

“좋지 않은 몸 상태때문에 진행하던 업무도 끝내지 못했습니다. 일정이 여의치 않을 듯싶습니다.”

승진하려면 중요도가 높은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하는데 남들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려니 진형은 불만이었다.

“그 건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형을 치워 버릴 예정인 도하는 같잖은 시도를 무참하게 짓눌렀다.

“세연 씨가 앱 카피라이팅을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예상 못 한 통보였다. 난데없는 변동 사항에 진형의 얼굴이 건포도처럼 검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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