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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41)화 (41/70)

41화

부담스럽지 않은 수프와 샐러드를 먹자 세연의 배가 은근히 찼다.

“후식은 과일로 나옵니다. 차는 커피와 허브티가 있습니다.”

도하와 세연의 앞에 있던 플레이트가 치워졌다.

“커피로.”

“저는 허브차로 주세요.”

말 없는 둘 사이의 기류를 빠릿빠릿하게 준비된 차가 따듯하게 데웠다.

세연은 두 손을 무릎에 둔 채 차가 식기를 기다렸다. 정적 속 그녀의 시선은 커피잔을 든 도하에게 흘러들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직시하던 그 눈빛이 정통으로 꽂혔다.

몸의 체온이 확 올라갔다.

“정세연 씨.”

잔잔한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가 고개를 숙이려는 그녀의 행동을 차단했다.

“애인 있습니까.”

허리를 평평하게 세운 세연의 몸가짐이 일순 흐트러졌다.

침음을 겨우 삼킨 세연의 입이 열렸지만 나오는 건 가쁜 호흡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가 질문을 바꿨다.

“좋아하는 남자는?”

확연히 짧아진 도하의 말을 받고도 세연은 진형을 떠올리지 못했다.

“없군요.”

왜 이러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오히려 눈앞의 그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찬 이가 그여서일 것이라고 되뇌어도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자신이 알고 있었다.

“제가……, 대답해야 하나요?”

“…….”

“그전에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부터 말씀해 주세요.”

세연은 어렵사리 머릿속에 든 말을 꺼냈고, 도하는 짙은 시선으로 돌려주었다.

“그래야 확실히 정리되니까.”

“네?”

“사귑시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몰래카메라인가.

이러면 안 되지만 세연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랑요?”

“이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보고 있는 건 정세연 당신인데.”

교차한 긴 다리에 두 손을 올린 도하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자그마한 장난도 비치지 않는 표정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명료한 눈빛 속에 그가 원하는 것이 담겨 있었다.

이도하는 정세연을 원하고 있다.

“왜…….”

이유를 알아야 시끄러운 속이 달래질 것 같았다.

연애의 목적에는 사랑 말고도 가변적인 요인이 개입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진형과 사귀었던 이유는 그의 고백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랑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을 해서였다.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얄팍한 관계는 단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연애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버린 오늘.

세연은 도하가 이러는 것이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 때문이라고 여겼다.

“저와 사귀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세연 나름대로 합당한 도출을 내릴 동안 도하는 한결같은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였다.

“왜겠습니까.”

조금은 타박하는 듯한 어조가 그녀의 심장을 두드렸다.

“정세연 씨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죠.”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겁니다.”

도하의 진심을 알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염두에 두지 않은 말이 들려왔을 땐 가까스로 찾은 평정심이 허망하게 깨졌다.

사랑이라니.

생각해 보지도 못한 그의 감정에 그의 시선이 닿는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자신을 담아내는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얕은 미소마저 어려 있지 않은 무뚝뚝한 표정을 봐서는 자신에게 막연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요…….”

그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반대의 가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세연은 자신도 모르게 불신을 내비쳤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요. 왜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지.”

그가 서늘히 물어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세연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을 듯한 진득한 시선을 힘겹게 마주한 채로 흐트러진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하.”

전신을 곤두세우는 낮은 숨소리에 세연이 움찔거리자 도하가 그의 이마를 큰 손으로 덮었다.

“오해하고 있었군요.”

이 여자 어쩌지?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뭐 때문입니까.”

이마를 가린 손을 떼어 낸 그가 그녀가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여긴 사유가 마땅히 있을 거 아닙니까.”

그녀에게로 뻗어 오는 시선은 닿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눈빛.”

새삼스럽지 않은 눈빛, 그러나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며 세연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를 보는 눈빛 때문에요…….”

말하는 사이사이 조금씩 삐져나온 호흡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게는 웃지 않으셨잖아요.’

이 말까지 하면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속뜻과 다르게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듯해 세연은 속엣말을 삼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뒷말이 있다는 듯한 공백에 도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어떤 눈빛으로 보았는지 돌이켜 보는 듯했다.

저를 가둬 둘 것 같은 눈동자가 눈꺼풀 안으로 가려지자 세연은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억지로 참은 숨을 짧게나마 토해 낸 지 몇 초 후.

그가 눈꺼풀을 열었다.

그러나 검은 동공에 맺힌 색감은 변함없었다.

짙고도 강렬한 이채가 여실히 보였다.

“이래도 내가 화난 거로 보입니까.”

“아.”

세연은 깨달음과도 같은 탄식을 토해 냈다.

개안하듯이 비로소 그의 시선에 깃든 격정이 보였다.

정말로, 그가 나를…….

“언, 언제부터…….”

다소 개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던 그가 촉촉한 입을 열었다.

“날 도와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지난날의 인식이 모조리 붕괴되는 듯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처음은 호기심이었습니다.”

목이 탄 그녀도 식어 버린 차를 마셨지만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이해했어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떨리는 심장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오로지 그가 준 여파만이 생생했다.

“앞으로도 이 눈빛으로 당신을 볼 겁니다.”

뒤돈다고 해도 심장을 정확히 겨냥할 듯한 눈빛에 세연은 아프도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느끼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가슴을 옥죄는 아픔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싫습니까.”

“그럴 리가요!”

고개를 저으며 세연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이도하는 그녀가 카피라이터로서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인도한 우상이었다.

그가 저를 싫어한다고 오해했을 때도 변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난 들었는데.”

도하의 말과 달리 사귀는 사람이 있어 세연은 입을 열지 못했다.

“내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들지 않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 입술을 우물거리며 세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순간, 자신에게 열중한 눈동자에 보이던 이채가 꺼지는 듯했다.

“노력해 보죠.”

언뜻 꺼진 불길이 치솟듯이 번뜩이는 광채가 그의 눈동자에 감돌았다. 깨진 검은 유리의 단면과 유사했다.

“세연 씨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대, 표님.”

“세연아.”

쿵, 심장이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제게로 몰아치는 감정의 쏠림을 묵묵히 받아 내는 것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줘 봐요.”

일자가 된 입가가 남성적인 색기를 흘리며 위로 비틀렸다.

“이것마저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결연한 표정에서 남성적인 기질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막고서 그가 다부진 몸을 일으킨다.

“지금 답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에게 딸려 가는 시선을 내려다본 도하가 세연을 음미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해 봐요. 아주 천천히.”

꽃처럼 활짝, 그러나 수컷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짙은 색향을 내뿜으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 독한 향에 취한 것처럼 세연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까만 눈동자가 경고처럼 다가와 세연의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 * *

[내 마음만 앞섰습니다. 도저히 참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녀의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 그는 사과 같지 않은 말을 남기며 떠났다.

그제야 낮은 저음에 몸이 묶여 통하지 않던 피가 돌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말을 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 세연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여전히 저릿한 감각만 선연했다.

“대표님이 날…….”

뒷말을 담게 되면 그로 인한 복잡한 감정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 세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의식을 끊어 낼 수는 없었다. 온통 ‘이도하’라는 남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정세연 씨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까요.]

그가 채운 물결이 머릿속을 짙은 열기로 물들였다. 아찔한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는 겁니다.]

고개를 흔들어 봐도 눈을 감아 봐도 그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신기루 같은 허상이지만 결코 그녀의 머리가 지어낸 망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현실이라고 알려 주듯이 나직한 저음이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앞으로도 이 눈빛으로 당신을 볼 겁니다.]

형태를 띠지 않는 말이 세연의 머리와 가슴에 파동을 치며 너울을 자아냈다.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몰아치는 격랑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야 말았다.

* * *

진형은 자신이 빌린 펜션의 거실에서 똥 묻은 개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세연이 그의 양다리를 모를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듯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다시 세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작정하고 안 받는 것처럼 연결 신호만 가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보면 바로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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