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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38)화 (38/70)

38화

“허락 떨어지면 신경 쓸 일 없게 대표님에게 앱 기안 컨펌 받아 놓을게요. 급히 부를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연애 기간보다 선후배로 알던 시간이 길었다.

세연은 아직도 진형의 꾸며진 이미지를 믿었지만, 정작 진형의 머릿속은 똥밭이었다.

“너밖에 없다. 너만 믿고 있을게.”

사뿐사뿐 밟는 길이 가시밭길인 줄 모르는 똥통은 지금 이 순간, 행복했다.

* * *

“메리 U 매장 배달입니다. 제작부서 맞나요?”

“기다렸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서오가 넥타이를 휘날리며 배달 기사 두 명이 가져온 소포를 반갑게 받았다.

뒤이어 세연도 디저트가 들어 있는 보랭 용기를 받아 다 함께 먹을 수 있는 소규모 회의실로 날랐다.

“대표님께서 힘내라고 보내신 간식이 왔네요. 먹고 합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한입에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포함한 빵 종류만 해도 거뜬히 10만 원을 넘을 양이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세연은 포만감을 채울 수 있는 에그샌드위치를 찜했다.

“세연 씨. 먹어도 괜찮겠어?”

“먹어도 끄떡없을 것 같아요.”

안 먹고 버티기엔 오늘의 업무 강도가 빡셌다.

세연은 에그샌드위치를 한 입 야무지게 베어 물어 우물거렸다.

“세연 씨는 복스럽게 먹어서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하네요. 그러고 보니 세연 씨의 포트폴리오 카피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특색이 있었죠.”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혜선을 통해 전해 들은 세연은 기합이 들어갔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카피를 만들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세연 씨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물론 여러분에게도요. 배도 채웠겠다. 일해 볼까요?”

혜선은 융통성 있게 자신이 이끄는 팀원들을 통솔했다.

“남은 디저트는 탕비실에 놔둘 테니까 당 떨어지면 꺼내 먹어요.”

* * *

<너와 나.>

세연이 신제품의 차별성에 부합하는 콘셉트에 맞춰 생각나는 단어를 무작위로 조합할 때였다.

“세연 씨.”

대표실에서 A사 신제품 론칭 플랜 수립을 승인받고 내려온 혜선이 그녀를 불렀다.

“네.”

“대표님께서 세연 씨의 구상안을 보고 싶다 하시네요. 올라가 봐요.”

이른 부름이 닥쳐오자 마음이 급해진 세연은 작성한 구상안을 출력하여 대표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하에게서 언질 받은 듯 세연을 본 석호가 방긋 웃고는 대표실을 두드리며 열어 주었다.

“들어가세요.”

커다란 통창을 등지고 있는 도하의 뒤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연이 눈을 깜빡거리며 눈부신 시야에 적응하는 찰나, 고개를 든 도하가 빛을 머금은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에게 향한 미소에 한순간 멍해진 세연이 발을 떼지 못하고 있자 도하가 손짓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구상안 안 가지고 왔습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혜선에게서 최종 확인된 자료만 보았을 그가 세연의 구상안을 꼼꼼히 훑어보고는 지적했다.

“어설프군요.”

세연의 심장이 아프게 오그라들었다.

세연은 낙심한 표정을 도저히 갈무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명확하군요. 문장 변형만 거치면 훨씬 깔끔해질 겁니다.”

침울히 떨어지는 고개가 기회를 주는 듯한 말에 위로 들렸다.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는 아닌 것 같아 세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그리고 혜선 CD에게 보고 사항을 들었습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지만 입꼬리는 뜻 모르게 휘어져 있었다.

“구진형 씨가 하던 업무. 우선 세연 씨가 진행하세요.”

“……예.”

감지되는 싸한 느낌에 세연은 떨떠름히 대답했다.

나가 보겠다고 허리를 숙인 후 뒤돈 순간 들린 작은 목소리에 몸이 흠칫거렸다.

“알아서 저질러 주는군.”

슬쩍 보게 된 도하의 입가가 싸늘히 올라가 있었다.

세연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 어떡해……!

* * *

아무래도 단단히 찍힌 것 같았다.

“왜 이리 죽상이야? 업무 부담감 때문에 그래?”

다음 날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도 세연의 얼굴이 밝지 못하자 유정이 넌지시 걱정을 내비쳤다.

“유정아…….”

디자인 샘플이 확정되어 기본 편집만 하면 되는 데다가 그동안 도운 진형의 업무와 크게 벗어나지 않아 부담감은 적었다.

그녀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세연은 찡찡거리는 목소리로 어제의 일을 털어놓았다.

“찍힌 것 같다고?”

“확실해. ‘알아서 저질러 주는군’ 이렇게 말씀하셨다니까.”

세연이 도하의 말투를 따라하자 유정이 신뢰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 너한테 하는 말이라기엔 알아서 한 게 없잖아. 구진형 씨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런가?”

“그래. 구진형 씨가 먼저 말을 꺼냈잖아. 그리고 대표님이 너를 보는 모습은 뭔가 싫어하는 것보다는…….”

“보다는……?”

“……확실하지 않지만 싫어하는 건 아닌 듯하다고.”

“하지만 내게만 웃어 주지 않는단 말이야.”

“지금도?”

“응?”

“지금도 안 웃어 주냐고.”

세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도하의 미소에 고개를 저었다.

“웃어 주셨지……?”

“나라면 웃어 주고 싶지도 않은 사람하고는 말도 안 섞어.”

“일 시키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널 싫어한다는 정황이 그거냐. 네 말대로라고 해도 열심히 해 봐. 대표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지 누가 알아?”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띤 유정은 그녀에게 닥친 현실을 심플하게 치부했다.

“너 그냥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거지?”

“정답입니다.”

“유정이 너어.”

“근데 네게 주어진 기회 흔치 않잖아. 귀찮기야 하겠지만 잘하면 네 성과물이 될 수도 있어.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이……”

“바라지도 않네요. 한 번 만에 컨펌 받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

어깨를 늘어뜨리던 세연은 중간에 유정의 말이 끊긴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머리 위로 지는 음영과 등 뒤로부터 들리는 목소리에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세연 씨에게 나쁜 상사였나 보군요.”

웃음이 미약하게 실린 음색은 원색적이게 강렬했다.

신음을 삼킨 세연은 미리 알아챘던 유정에게 눈을 찌릿, 흘기고는 뒤돌아본 몸을 바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요. 그러니 내가 꼭 세연 씨를 갈구는 것 같잖아요.”

허윽, 거의 다 들었잖아.

찍혀도 단단히 찍힌 듯해 세연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시선을 올려 도하를 쳐다보았다.

촉촉한 그녀의 눈동자에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우뚝, 멈췄다.

화나셨구나.

그리 보일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아뜩해진 세연이 속으로 떨고 있자 그가 일순 구긴 눈매의 선을 또렷하게 휘었다.

“1차 시안은 2시 전에. 2차 시안은 내일 점심 전까지 보고하면 됩니다.”

“네!”

대답이라도 잘하자 싶어서 세연은 힘차게 말했다.

“지켜보죠.”

교묘한 속뜻이 숨겨진 듯한 미소에 세연은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일 리가 없어…….”

미소를 지워 낸 속도만큼 도하가 빠르게 떠나자 세연은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세연.”

“……왜에.”

“너 경각심 가져야겠다.”

“빨리도 알아차렸다.”

“그런 경각심 말고.”

“그러면 다른 의미라도 있어?”

훌쩍 울고 싶은 세연에게 유정이 입술 가운데로 검지를 올렸다.

“알려 주면 재미없지.”

“나쁜 지지배. 저리 가.”

“가라면 가지요!”

유정의 겨드랑이를 공략해서라도 의뭉스러운 의미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정말 모르겠다.

힘이 빠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세연은 바삐 처리해야 하는 사무에 집중했다.

* * *

결국 오지 않았으면 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세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도하를 마주했다.

“…….”

시안을 검사받는 동안 세연의 심장은 수없이 떨렸다.

“샘플 시안 ver2 제작해 봐요.”

새로 만들어 오라는 지시에 세연은 떨리는 입술로 간곡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고쳐서 오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가 날렵한 턱에 겹친 두 손을 떼어 내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없습니다.”

“네?”

“구진형 씨가 구축한 모듈에 맞춰 톤 앤 매너 작업부터 배너 카피라이팅을 계절감 있게 바꿔 놓은 샘플이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전히 세연 씨가 처음부터 진행한 앱 페이지 시안과 카피라인을 봤으면 하군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그가 자신의 결과물을 높이 평가하자 드리운 피로감이 싹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데드라인을 넉넉하게 주고 싶지만 일주일 안에 샘플 시안을 완성했으면 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세요. 오늘부터 밤새워 해내겠습니다.”

충성 충성. 각이 잡힌 자세로 세연은 대답했다.

“잠이 오거나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와요.”

도하가 입술의 양 끝을 보조개처럼 움푹 패게 휘었다.

“정세연 씨라면 기꺼이 열려 있으니 늦은 시간도 괜찮아요.”

나른한 미소로 보였지만 어쩐지 호흡조차 쉬이 내뱉을 수 없게 하는 위력에 세연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 * *

늦게까지 일하느라 15층에 있는 사무실들은 소등되어 있었다.

20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층 판이 보여 세연은 빠르게 걸어 가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용히 열리는 문 사이로 뚜렷한 얼굴이 보였다.

도하를 본 순간 세연은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칫했다.

“안 탑니까.”

팔짱을 낀 채로 반듯하게 서 있는 도하의 장신이 그녀를 내리누를 것처럼 압도적이라 내뱉어진 숨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도하와 최대한 멀리 선 세연은 제 숨소리마저 유난히 신경 쓰여 아예 호흡을 참았다.

“정세연 씨. 숨 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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