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37)화 (37/70)

37화

“A사 신 음료 론칭 플랜 수립하고 4시까지 갤럽 W2 광고 전략 보고서 셀렉해서 가지고 와요.”

“절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에요? 커피 마실 시간은 주세요. 그래야 일할 맛이 나죠.”

“시위하는 거로 들리는데요.”

“제대로 들으셨어요.”

혜선이 단호하게 말하자 도하가 설핏 웃었다.

“커피 돌릴 테니 시간 엄수 부탁드립니다.”

“다들 들었죠? 대표님께서 쏜답니다.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빡세게 일해 봐요.”

흐어억. 사원들이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리를 뜨면서 도하는 세연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지만 꽂히는 시선에 세연은 조금도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 * *

몇 분 뒤, 진형이 돌아왔다.

“세연아…….”

낯빛이 좋지 못한 얼굴의 진형을 보자 세연은 어리둥절했다.

병원에 갔다 왔을 건데 안색이 더 안 좋아져 있었다.

“뭐래요?”

“아?”

“병원 가서 진단받은 거 아니에요?”

“아아, 그거.”

진형이 꽤 큰 소리를 낸 탓에 그와 친한 몇 명이 파티션 위로 시선을 두었다.

“신경성 위염이래. 통증 완화 수액 맞고 왔어.”

주니어인 진형은 TS 전자의 갤럽 W2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비딩 PT 제안서에 따른 기획안이 채택되면 광고주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CD의 직함을 빠르게 달 수 있는 이력이 되는 일로,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사는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근데 혹시 무슨 말 못 들었어?”

“누구한테요?”

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형의 얼굴에 어린 거무스름하던 빛이 옅어졌다.

“못 들었으면 됐어. 신경 쓸 일 아니야.”

약발이 도는지 진형이 실실 웃었다.

진형을 눈여겨보던 세연은 문득 도하와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선배님.”

“응.”

“대표님이 오셨는데…….”

“뭐?!”

비명을 지르듯이 목소리를 높인 진형이 앉아 있던 몸을 튕겼다.

“왜, 왜 그래요?”

세연은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진형을 의아하게 여겼다.

“아, 아니. 갑자기 대표가 왔다고 하니까…… 뭐라고 했는데? 아니다. 일단 복도로 나가자.”

얼마나 놀랐는지 진형은 자신이 경어를 쓰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연은 몸을 돌려 해골이 걷는 것처럼 비척거리는 진형을 따라나섰다.

진형은 직원들이 잘 드나들지 않은 비품실로 들어갔다.

“선배.”

“대표가 네게 뭐래?!”

세연이 문을 닫자마자 뭐가 급한지 진형이 윽박지르듯이 다그쳤다.

“대표님이 선배가 하던 소관 업무를 보셨어요.”

“그걸 들키면 어떡하냐!”

“선배…….”

잘못을 전가하듯 진형이 감정적으로 굴자 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읽은 모양인지 진형이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아프고 지쳐서 지금 좀 예민해.”

“이해는 하는데 기분이 좀 그러네요. 내가 원해서 들킨 게 아니잖아요.”

“그래. 내가 괜히 화풀이했어.”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낼 수가 없어 세연은 저조한 감정을 억눌렸다.

“그 일로 대표님이 앱 구상안에 개입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

안도인지 짜증인지 모를 한숨이 진형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것 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자신에게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세연이 도하의 눈빛과 표정을 상기하는 사이 진형이 마른세수를 하더니 확실한 안도의 숨을 토했다.

“후우…….”

“대표님과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기는.”

진형이 급히 입꼬리를 죽 올렸다.

“돌아가자. 빨리 작업해야겠다.”

다른 때 같았으면 덩달아 웃고 말았겠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미소에 세연은 웃지 못했다.

* * *

‘그럼 그렇지. 세연이에게 사실대로 말할 리가 없잖아.’

가슴을 졸인 일이 해결되자 진형은 삐진 주아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삐치면 오래가는데 어떻게 풀어 주지?’

진형은 연애 사업을 꼬이게 한 도하가 원망스러워 그가 있을 위층을 노려보았다.

운이 나빴다.

고만고만한 직장인이면 덤벼 볼 만하겠는데 도하는 개인 자금으로 설립한 회사를 5년 만에 코스닥 상장을 앞둔 기업으로 키운 거물이었다.

카피라이터로서의 실력도 전능했다.

도하의 머리에서 탄생한 카피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적을 정도로 대히트를 쳤었다.

그로 인해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인재였다.

대들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다. 실력 격차를 아는 진형은 도하에게 살살 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연애사에 참견할까 봐 조마조마하였는데 그저 농땡이 피운 것에 대한 으름장이었나 보다.

‘하긴 자기 일도 아닌데 참견할 이유가 없지.’

어차피 남의 일이다.

‘괜히 쫄았네. 세연을 싫어하는데 나설 리가 없잖아.’

세연의 속앓이를 듣게 된 진형은 도하가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모를 수 없게 소속 직원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도하가 세연에게만은 ‘예외’로 두고 있었다.

상사로서의 권위를 앞세우는 행위를 하는 건 아니었으나 유심히 살펴보면 다른 이들에게 지어 주는 미소가, 세연을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연이 말해 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만큼 사소한 차이였다.

특히나 세연이 눈치챌 정도인 도하의 눈빛은.

“으…….”

세연이와 같이 있다가 보게 된 도하의 눈빛을 상기한 진형은 한기에 닿은 듯이 부들거렸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눈빛에 그까지 압살당하는 것 같았다.

고작 시선만으로도 짓눌릴 듯한 차가운 표정을 떠올리자 그에게 향한 것도 아닌데도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다.

* * *

절실한 감정을 겪어 보지도 못한 데다가 진형의 마음에 세연이 차지한 자리는 쉬이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았다.

진심이 아니므로 진형은 세연을 진정 원하는 남자의 마음 따윈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 도하가 세연에게 품은 마음이 관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진형이었다.

“혜선 팀장님.”

세연을 좋아한다는 가능성은 열어 두지 않은 채 진형은 자신의 위신이 확보되자 잔꾀를 부렸다.

“듣자 하니 병원에 갔다 온 모양인데 몸 상태 괜찮나요?”

해쓱하게 보이려 인상을 쓴 진형이 바지에 넣어 둔 진단서를 꺼냈다.

“아까는 급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져서 연락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신경성 위염이더라고요. 약 처방을 받았는데도 속이 욱신거리고 또 어지럽네요. 아무래도 조퇴해야겠습니다.”

“저런. 빨리 가서 쉬세요.”

“몸 상태가 이래서 휴가도 3일 신청하겠습니다.”

“주요 진행 상황 때문에 곤란하네요. 앱 구상안은 어쩌고요.”

“그거라면 정세연 씨가 맡아 줄 겁니다.”

세연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진형은 듣는 당사자가 어이없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었다.

‘못 한다고 했잖아요?!’

무례한 처사에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세연이 급하게 일어났다.

진형은 세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줄 거지?’

무리한 부탁에 세연은 가출할 듯한 어이를 힘겹게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해 줄 수야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 않은가.

진형에게 자신의 사정을 분명히 설명했다.

여기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는 도하에게 직결로 반하는 거였다.

“세연 씨가요?”

혜선의 시선이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세연에게로 향했다.

몇 달 뒤에 출시될 본사 앱 사이트라서 틀은 잡혀 있었지만,  신입인 세연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염려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크게 손댈 건 없습니다. 간단한 비문 및 오타 체크 그리고 앱 배너 타이틀 문구 지정 외 디자이너 팀에게 상세 가이드 작성해서 전달하면 됩니다.”

한두 가지도 아니고 세연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업무량이었다.

“그리고 편집 업무를 가르치고 있는데 곧잘 하더라고요. 제가 없어도 무리 없이 해낼 겁니다.”

“그래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참에 콘텐츠 업무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마음이 기울어진 혜선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세연은 선생님에게 이르듯이 다급하게 팔을 들었다.

“팀장님.”

말하지 않으면 복잡하게 꼬일 상황이었다.

“앱 작업 제반 사항에 관해 대표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제가 앱 모듈을 담당하는 데 있어 대표님의 허락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자리를 비울 때 들은 모양이군요.”

“네.”

“그럼 틀은 잡혀 있으니 잠시 연기하죠. 대표님께 다시 말씀드리고 나서 결정하겠어요. 진형 씨는 연차 쓰세요.”

“감사합니다.”

혜선은 넙죽 고개를 끄덕이는 진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세연에게 당부했다.

“변동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감안해서 세연 씨가 하는 것으로 생각해 둬요.”

“알겠습니다.”

주어질 업무에 성실히 임할 자세로 세연이 응하자 혜선이 흡족하게 웃고는 다시금 진형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예. 회복한 상태에서 뵙겠습니다.”

진형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고 있는 나이스한 흐름에 기뻐하면서 크게 내비칠 수 없는 웃음을 흐리게 띠었다.

“고맙다.”

진형이 세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픈 것치고는 혈색이 괜찮아 보이는 얼굴에 세연의 눈매가 비딱하게 가늘어졌다.

그녀의 동의 없이 저지른 짓이 미웠지만 아픈 진형을 탓할 수 없었다.

못마땅한 감정을 풀며 세연은 진형을 챙겼다.

“아파도 식사 거르지 말아요.”

“그럴게. 오늘은 아무 생각 안 하고 잘 거야. 남은 3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아지면 전화할게.”

진형은 주아의 화를 풀어 줄 방안으로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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