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거짓말로 행적을 조작해 대표님을 속이려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깊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닐 듯하니 신뢰가 가지 않군요.”
“아닙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내게는 처음이겠죠.”
“……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진형에게 도하가 저음의 목소리로 경고했다.
“원칙대로라면 업무 태만 시말서를 올려야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봐주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과연, 감사한 일일까. 안색이 확 바뀌는 진형을 보면서 도하는 조소를 머금었다.
진형을 질책하는 거야 쉽다. 하지만 진형이 저지른 잘못의 수위에 따라 처벌의 강도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 죄송하다는 몇 마디로 끝날 시말서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게끔 진형의 잘못을 덮어 줌으로써, 더는 무마할 수 없는 사고를 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다음은 없습니다. 그때도 이딴 식으로 굴면 어떻게 되는지 머릿속에 잘 새겨 놓고요.”
“……저를 자르시겠다는 겁니까.”
그에게 대들 수 없어 분노만 삼키는 진형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찮은 시선에 도하는 진형의 어깨를 한 손으로 쥐었다. 악력을 더해 누르자, 신음을 참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으윽!”
“해고만 할까요. 동종업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확인하고 싶다면 제멋대로 행동해도 좋습니다. 아, 그리고 정세연 씨.”
그 이름이 나올지 몰랐을 진형의 두 눈이 커졌지만 알 바가 아닌 도하는 경직된 어깨를 밀어, 경악에 찬 두 눈에 자신의 표정을 단단히 새겼다.
“내게 들킨 게 중요한 게 아니죠. 정세연 씨가 보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요.”
썩은 눈동자 앞에 대고 매끄럽게 웃은 도하가 진형의 어깨를 다시금 움켜쥐고서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았다.
“처신 잘해요. 저 여자든, 아니면 내가 아는 여자든, 둘 중 한 명은 정리하라고.”
진형의 어깨가 흔들리는 눈동자처럼 파들거렸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경련이 불쾌한 도하가 재킷 안주머니에 둔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쓰레기라도 만진 듯이 떨어뜨린 손수건을 밟고 지나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햇빛이 든 한낮의 거리를 걸었다.
“오빠! 저게 다 무슨 소리야!! 나 말고 다른 여자 있었어?!”
“아냐! 주아야! 내 말 좀 들어 봐. 너까지 왜 그래!”
그렇게 한참을 걸은 도하의 발길은 제작부서에 닿았다.
골똘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세연을 보자,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선배?!”
추락하듯이.
그의 기척을 다른 이로 착각한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본 순간, 도하는 자신의 마음을 하릴없이 인정했다.
“대, 대표님……!”
그녀를 아껴 주지 않는 구진형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 * *
데이터를 부지런히 보완하던 세연이 키보드를 파팍, 두들겼다.
슬슬 눈이 건조할 즈음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사무실을 메운 발소리는 하나였다.
순간 생각나는 인기척을 향해 세연은 고개를 돌려 입을 뗐다.
“선배?!”
눈앞의 남자를 보자마자 세연의 입꼬리에 맺힌 미소가 달아났다.
“대, 대표님……!”
화들짝 놀란 세연은 급히 엉덩이를 뗐다.
“뭐 하고 있습니까.”
“……갤럽 W2 모뎀 콘셉트 구상안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말투와 맞지 않게 도하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세연의 뒤로 도하의 시선이 꽂혔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모니터에 다른 창이 띄워져 있군요.”
하반기에 출시될 모바일 앱 모드창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순간의 거짓말이 탄로 나자 세연의 얼굴이 검붉어지듯이 짙어졌다.
“톤 앤 매너 작업 중인 모양인데, 구 대리 소관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 습니다.”
한파를 몰고 오는 듯한 음색에 세연은 동상에 걸린 듯했다.
“정세연 씨.”
“네…….”
“해야 할 구상안은 뒷전으로 미루고 타인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는 이유, 말해 보세요.”
“……진형 선배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가셨습니다. 그로 인해 작업물을 제가 이어서 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다고, 그리 말했습니까?”
물음 끝에 웃음소리가 핏,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실소 같아서, 기분이 엄청 나빠 보이는 도하를 보는 세연의 속은 영문도 모르고 타들어 갔다.
“네…….”
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웃음기를 싹 거둔 그가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알겠다는 고갯짓인데도 손에 땀이 뱄다.
“병원에 가야 하니 자신의 업무를 해 달라고 말했겠고.”
어떻게 아셨지?
긴장되어 침을 삼킨 세연이 벌을 받는 것처럼 두 팔을 허리 뒤로 옮기자 도하의 눈썹 끝이 확 올라갔다.
“그래서 정세연 씨는 한다고 했고요.”
“네…….”
“당연히 정세연 씨의 주업은 끝내 놓았을 테죠?”
“못 끝냈습니다…… 그래도 데드라인 안에는 맞출 수 있습니다.”
세연은 제가 말을 할수록 일이 꼬여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원인이 그녀에게 있다는 걸 알 정도로 도하의 표정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차가운 시선에 세연은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실상 오늘만 국한되지 않는 눈빛은 속내를 들춰낼 것처럼 날카로웠다. 때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주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무언가가 얼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예외 없이 그의 시선이 있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고 고민하던 때와 다르게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연은 도하에게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그를 이성으로 본 제 마음 때문에 화가 났다고 보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도리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바라지만 큰 잘못을 저지르길 원하는 듯한 눈빛처럼 보였다.
약점을 잡아내 화를 쏟아 낼 것 같다니.
과한 억측일 텐데도 자신에게 불리한 생각을 접을 수가 없는 세연은 도하의 표정을 숨죽이며 살폈다.
그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는 듯했다.
“후우…….”
둘만 있는 공간에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 숨소리가 소름 돋게 울렸다.
남성적인 숨소리에 세연의 가슴이 작살에 꽂힌 듯이 팔딱거렸다.
품고 있는 열기를 퍼부을 것 같은 기세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한 세연은 마른침만 삼켰다.
“세연 씨가 자처한 일이 아니란, 이 말이죠.”
두 눈에 비친 미소는 산뜻하지 않았다.
등줄기부터 오한이 서리게 하는 미소에 세연은 척추를 꼿꼿하게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앱 제반 업무 스탑해요.”
“알겠습니다.”
어떤 후환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라며 세연은 뒷짐을 진 손가락을 초조하게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기간 안에 보고할 구상안.”
차라리 화를 냈으면 하는 심정으로 냉랭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그가 눈꼬리를 천천히 휘었다.
“오늘 안으로 보고 싶군요.”
“네?!”
“힘듭니까.”
속내를 드러내는 듯한 미소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중으로는 무리입니다.”
“초안이니 완벽하길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는 데까지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얄짤없었다.
“어느 정도 해 놨을 테니 데드라인에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랬었죠. 제가요…….
앙당그레 다문 입을 세연은 흐느끼듯이 열었다.
“……퇴근 전까지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남았나요? 끝나지 않은 말에 세연은 눈썹을 떨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힐긋거린 그는 말문을 완성시켰다.
“점심 먹었습니까.”
그가 하는 말들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행간을 건너뛴 물음에 세연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니요.’
라고 외치는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내뱉을 수 없는 세연은 눈치 있는 배에 손을 올렸다. 숙취 때문에 식사를 걸렀다. 허기가 진 배 속에서 언제라도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네. 먹었습니다.”
도하의 시선이 세연의 배로 내려가자 세연은 괜히 아랫배에 힘을 주고야 말았다.
“이도하 대표님.”
때마침 식사를 마친 제작 팀이 돌아왔다. 세연이 그를 부른 혜선의 목소리를 인지하자마자 도하가 몸을 크게 틀었다.
“세연 씨도 대표님과 같이 있었네요.”
도하의 장신은 거뜬히 세연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랬으나 모델에 뒤지지 않는 핏 때문에 전혀 둔하게 보이지 않았다.
도하가 시야를 터 주자 세연은 속속히 들어오는 팀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 어때요? 아직도 속이 안 좋나요? 점심 못 먹어서 어째요.”
졸지에 밝혀진 거짓말에 세연은 뜨거워진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조금은 나아졌어요.”
고개를 숙인 채라지만 그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열기가 모인 볼의 근육이 딱딱하게 뭉쳤다. 세연은 볼 안쪽 살을 씹었다.
“속이 안 좋으면 말하죠. 아픈 건 정세연 씨였네요.”
따끔따끔한 시선을 피할 수 없어 세연은 나직한 도하의 목소리를 체벌처럼 들어야 했다.
“탕비실 팬트리에 숙취 해소제가 몇 병 있어요. 먹어 둬요.”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
“혜선 CD.”
도하가 채 듣지도 않고 말꼬리를 잘랐으나 책잡힐 일을 벌인 세연은 거리낄 것 없는 그에게 따지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