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내 말 듣고 있니?”
뾰족한 목소리가 도하의 귓전을 찔렀다.
안 들어도 아는 으름장이다.
하란의 말보다 등받이가 맞닿은 소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 생산적이었다.
“오빠. 잠실에 게임 어드벤처 생겼대!”
“그래? 주말에 가자.”
태평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하의 눈앞에 해맑은 세연의 얼굴이 향기처럼 아른거렸다.
봄볕 같은 환한 미소가 실체를 띤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가 본 진실을 알게 되어 빛을 잃은 여자의 모습이 곧이어 떠올랐다. 그의 속이 뒤틀렸다.
“이도하.”
입술이 씹히면서 떨어지는 음성에 도하가 비로소 자신과 닮은 듯하면서도 사뭇 인상이 다른 얼굴을 응시했다.
“듣고 있어. 부모님께서 눈물로 애원해도 TS 전자에 가지 않아. 각서라도 써 줘야 믿을래?”
다분히 지겨워하는 음성이 신랄하게 뻗쳐 나오자 하란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기색이 비쳤다.
그래 주길 바라는 눈빛에 도하의 시선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쯤 해 둬.”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하란이 이렇게 마주할 때마다 했던 말을 또 꺼냈다.
“주변 상황이…….”
“누나가 말한 그 상황.”
자기변명에 불과한 서두를 도하가 과감하게 끊어 그의 의견을 확고히 다졌다.
“나를 TS 전자로 불러들이려는 할아버지의 성화, 그리고 매형이 사고 친 여건.”
“…….”
“또 누나의 부진한 실적이 몇 년째 지속되었음에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어.”
치욕스러워도 할 말이 없을 하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하와 다섯 살 터울인 하란의 견제가 시작된 건 그가 스무 살이 된 해였다.
승계를 이을 누나의 뜻에 반하지 않겠다고 TS 전자에 발길도 하지 않았건만 하란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수록 병적으로 도하의 의사를 확인받고는 했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집요한 정찰이 11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넌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질렸다는 눈빛 또한 새삼스럽지 않아 도하는 가볍게 웃었다.
어떻게 보일지 뻔히 알고도 그가 웃자 하란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재수 없겠지.
목적 없이는 그와 상종하지 않는 하란이 한계에 도달한 듯 바닥을 박차면서 일어났다.
“바쁠 텐데 불러내서 미안해. 앞으로도 네가 내뱉은 약속, 지켜 줄 거라 믿어.”
고개를 끄덕여야 발을 돌릴 모양인지 하란이 뒤돌지 않자 도하는 불성실하게 까닥였다.
무성의한 고갯짓에 하란의 눈꼬리가 매섭게 굼틀거렸다.
“한 달 뒤에 할아버지 생신인 건 알지?”
분풀이라도 해야 기분이 나아지는 하란의 반격에 도하는 미간을 좁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귀는 애인 없냐. 언제 결혼할 거냐.
조부의 등쌀에 시달릴 그의 모습이 훤히 그러졌다.
원치 않은 추궁을 듣게 될 날이 서서히 다가오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뭐가 걱정인데? 알아서 할아버지 비위 맞출 테니 가만히 있는 사람 들쑤시지 말고 빨리 가지?”
“……넌?”
하란은 늘 자신이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떠났던 도하가 웬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남동생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병적인 경계였다.
“피차 다정한 남매도 아닌데 왜 궁금하실까.”
“못 물어볼 사이도 아니잖아.”
그는 구진형의 뻔뻔한 작태를 넘어가 줄 마음이 없었다.
방해만 될 하란을 내쫓으려 도하가 수단에 맞는 웃음을 머금었다.
“더 있다가. 차도 남았고, 천천히 마시고 가려고. 이제 궁금증은 풀렸어?”
하란이 도하의 찻잔을 응시하자 그가 어색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차를 입가에 댔다.
“마음대로 해.”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 하란이 바삐 걸음을 옮기자 도하는 입꼬리를 비딱하게 두었다.
그가 있는지도 모르고 구진형은 제 세상처럼 지껄이고 있었다.
“나 요새 몸이 너무 찌뿌듯해. 저번에 간 CW 호텔 스파가 또 생각나는 거 있지? 정말 좋았는데……, 우리 언제 거기에 또 갈 수 있어?”
“또 가자고? 진짜 우리 주아 먹여 살리려면 이 오빠 허리 빠지게 일해야 하네.”
“피, 말로만. 지금도 땡땡이쳤으면서.”
“네 얼굴 본다고 그런 거 아냐. 너 못 봐서 그렇지 아픈 척하느라 완전 힘들었다.”
“쿡쿡, 생각만 해도 웃기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어. 오빠가 평일에 시간 내니까 좋다. 그치?”
“왜 아니겠어. 아아, 들어가기 싫다.”
“몇 시에 들어가야 해?”
“한 3시쯤? 더 늦게 들어가도 되고. 동기한테 부탁한 진단서 미리 받아 놨거든. 근데 후임이 내 업무를 보고 있어서 걱정이야. 지켜봐야 안심이 되는데…….”
담배꽁초처럼 버려야 할 남자를 좋아하는 세연의 얼굴이 선명하게 앞을 가렸다. 도하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저런 걸 애인이라고.”
몇 주 전 세연과 호텔에서 봤던 진형은, 도하의 시각에서는 얼굴 식별만 가능했다.
그날, 구진형이 자신과 있는 세연을 보길 내심 바란 그와 달리, 세연의 위치에선 저 여자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애인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한 세연의 둔함에 도하는 찡그려진 미간 중앙을 엄지로 문질렀다.
“뭐가 걱정이야. 오빠는. 마음에 안 들면 고치라고 하면 되지. 최대한 늦게 가. 그보다 언제쯤 시간 낼 수 있는데? 가기로 한 여행 못 간 지 한 달이 넘었잖아!”
“수주한 프로젝트 끝나면 일주일 시간 낼 수 있어. 그리고 승진 TO가 난다고 하니까 몇 달만 참아 줘.”
누구 마음대로. 도하의 입술이 이죽거렸다.
“되기는 해?”
“나를 뭘로 보고. 이 오빠 능력 있다. 연봉 인상되면 네가 가지고 싶다던 백도 사 줄 수 있어.”
“정말? 오빠, 사랑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도하의 미간 사이는 심지처럼 굳어져 있었다.
“어떻게 족쳐야 기분이 풀릴까…….”
주름이 진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떼고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일 때였다.
도하의 것이 아닌 벨 소리가 울렸다.
“……후임에게 전화 왔네.”
“왜?”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야. 안 되겠다. 불안해서 가 봐야겠어.”
“힝.”
“상황 보고 전화할게. 저녁에 먹고 싶은 음식 톡으로 보내. 사 가지고 갈…… 어억!”
콰당.
사선으로 둔 도하의 왼발에 진형이 걸려 넘어졌다.
“오빠!!”
다리의 위치를 정방향으로 바꾼 도하가 볼썽사납게 엎어진 진형을 서늘하게 주시했다.
“으…….”
꽤나 아플 텐데 제 여자가 본다고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픽 웃자 진형이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며 인상을 쓴 얼굴을 돌렸다.
“이보세…… 헉! 이, 이도하 대표님!”
“구진형 씨.”
장신의 몸을 세운 도하가 입꼬리를 선연하게 올렸다.
“그…….”
도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진형을 작살낼 것처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지워진 미소와 달리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구 대리. 여기서 뭐 합니까. 내가 알기로는 외부 미팅이 없을 텐데요.”
“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모르는 클라이언트를 잡았습니까.”
“네네! 맞습니다!”
무심하게 던진 미끼를 진형은 상황을 모면하려 급하게 물었다.
무릎을 찧다시피 한 진형이 후들거리며 제 옆에 선 애인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애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사실과 다른 말을 떠벌렸다.
“개인적으로 괜찮다고 판단한 의뢰라 급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후에 계약이 성사될 수 없는 조건을 지어내서 그에게 보고할 듯싶었다.
잔악한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속셈이 뻔히 보이는지라 도하는 적당하게 어울려 줄 미소를 그려 내며 진형의 애인을 응시했다.
“근무 환경이 참, 자유로운 곳이군요.”
공적인 자리라면 입을 수 없는 자유분방한 스타일이었다.
예리한 지적에 제 거짓말이 탄로 날 것이 두려운 진형이 민첩하게 애인의 앞에 섰다.
“대만 벤처 기업의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통역사입니다.”
빠져나갈 수를 늘어놓을수록 자신의 목을 조르는 길임을 진형은 모르고 있었다.
멍청하기도 하지. 가볍게 웃은 도하가 차가운 음성으로 중국어를 구사했다.
{통역사가 맞습니까.}
“네?”
유창하게 발음한 중국어를 해석하지 못한 여자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소리를 냈다.
“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여자가 입을 가리면서 진형을 쳐다본다. 진형의 낯빛은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푸르뎅뎅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도하는 심판자처럼 느긋하게 진형의 변명을 기다렸다.
똥줄 타는 건 저쪽이니 알아서 자초할 것이다.
“대표님의 발음이 너무 유창하셔서…… 현지인이 아니다 보니, 순간 알아듣지 못한 듯싶습니다.”
“내가 들은 말과는 다른데.”
팔짱을 낀 도하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진형을 내려다보면서 눈매를 갸름하게 휘었다.
눈웃음을 치는 그의 눈동자 안에선 검은 속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구 대리가 떠들었던 말들, 내가 못 들었을 것 같습니까.”
오른발로 바닥을 가볍게 쳐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렸다.
사태 파악을 끝낸 진형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구겨졌다.
“죄송합니다…….”
고작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그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믿는 건가.
정세연에게 죄다 까발리고 싶은 충동이 속내에서 나올 것처럼 속살거렸다.
구진형을 그녀 앞에 질질 끌어다 놓고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재연하게 하라고.
“뭘 잘못했습니까.”
“……오늘 일은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일일이 짚어 주길 바라는 겁니까. 구진형 씨.”
말보다 손이 나갈 것 같아 도하는 두 팔에 교차해서 둔 손가락으로 양 팔뚝을 지그시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