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이게 결코 좋은 증상이 아님을 깨달아서.
몽롱한 눈동자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까 봐.
정세연은 좋은 여자니까.
좋아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남의 여자에게 추파나 던지는 못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녀가 제게 화를 내도록 차갑게 굴었지만.
이 착해 빠진 여자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싫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기억 못 할 일, 그래서 도하는 혀끝이 알싸한 말을 차가운 바람에 실려 보냈다.
“거짓말.”
“……”
“싫지 않다면서 왜 제게 퉁명하게 대하시는 거예요?”
“그러게.”
도하는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 실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중심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짓을 하고야 말았네요.”
상냥하게 웃어 줄 수 있지만 정세연에게는 마음에 없는 표정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해맑은 얼굴을 속일 수가 없었다.
“흑, 나빠요…….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속앓이를 듣게 된 도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정말, 너무하세요…….”
행간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서러움과 원망이 말간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그런 눈으로 그를 보는데,
도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와 같은 눈동자, 그리고 다른 이들과 같은 색상의 두 눈일 뿐인데 특별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리고 싶었다.
도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씨잉…….”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고?
의식의 흐름에 당도하듯이 그녀가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조심……!”
다급히 뻗은 팔로 그녀를 잡은 도하는 제 가슴께를 툭, 아프지 않게 치는 작은 머리통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좋은데.”
세연은 복근과 동시에 움찔대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잠꼬대를 하듯이 웅얼거렸다.
“…….”
아무 의미 없을 순순한 감정이 도하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를 떨어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녀의 몸에 손을 대었다간 분간 못 하고 날뛸 것 같은 본능을 감지한 도하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온몸을 도는 열기를 힘겹게 잠재웠다.
그의 품에서 잠든 그녀를 보는 눈빛은 아득하게 깊어져 갔다.
* * *
제 추태를 기억하는 세연은 잠이 덜 깬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마셔 제대로 취해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정세연 씨.]
[우움…….]
[정신 차려요. 어서.]
[대, 표님?]
안도하는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서 떨어져요.]
[떨어져……, 헉!]
그녀는 옷자락이 사부작거릴 정도로 밀착된 몸을 더듬었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그에게 달라붙은 몸을 얼른 떼어 냈다.
자신도 몰랐던 내면을 마주한 것 같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고, 그에게 안겨 있었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웠다.
[……집에 데려다줄 테니 가방 들고 나와요.]
[네? 아뇨.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알아서 해요.]
돌아서는 그의 행동이 차가웠다.
술 냄새가 빠지지 않은 회식 자리로 돌아가자 진형은 없었고 몇몇만 널브러져 있었다.
얼른 가방을 챙겨서 나가자 그가 택시를 잡고 있었다.
[타고 가요.]
[대표님은요?]
[뒷정리할 겁니다.]
[저도 도울게요.]
[들어가는 게 날 도와주는 겁니다.]
귓가에 파고든 음성은 명백한 거부였다.
그럴 만도 하지. 추행을 한 건데!!
‘내가 대표님을 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신 거였어.’
그가 왜 자신을 차갑게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강 비서에게 안 좋은 일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를 이성으로 보는 그녀의 마음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술이 원수다.”
맞아, 술이 원수. 응?
자신이 낸 소리인 줄로 알았던 세연은 황급히 입을 다물려다가 이미 닫혀 있는 입 모양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벌을 서듯이 벽에 이마를 대고 있는 유정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어째 그녀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이는 유정에게 말을 걸자, 흐느적 고개를 돌린 유정의 낯빛은 의외로 밤샘했을 때보다는 좋아 보였다.
“그러게.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루 만에 폐인이 된 걸까.
유정을 유심히 쳐다보던 세연은 돌연 어제와 같은 위화감을 받았다. 그게 뭔가 싶었더니.
“그러고 보니 어제 입은 옷이네??”
무심코 내뱉은 말에 뒤에서 후다닥 소리가 들렸다. 세연의 고개가 돌아갔다.
세연은 막 출근한 듯한 서오를 보고 인사하려다가 낯익은 복장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안, 안녕! 하하하. 우연이네!!”
그녀의 옆에 있는 유정과 시선을 마주한 서오가 매우 어색한 행동을 보이며 지나쳤다.
“……저 반응은 뭐지요?”
세연은 서오의 부자연스러운 몸짓이 유정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못 본 척 유정이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린 것만 봐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말로만 듣던 원나잇을 했다니…….
“어떡하다가?”
주위를 살피며 세연은 유정에게 속삭였다.
벌건 얼굴을 한 유정이 터벅터벅 자판기로 걸어가 커피 버튼을 눌렀다.
“나도 몰라. 기억나는 건, 서오의 위에 올라탄 내 모습이야.”
자포자기로 유정이 까발린 속사정에 세연은 제가 다 화끈거렸다.
“쟤는 더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있어…….”
그게 더 짜증 난다며 유정이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둘이 어떻게 할 거야?”
그 문제가 관건이다. 세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유정이 립스틱이 뭉개지도록 종이컵을 씹었다.
“지금으론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최선이겠지?”
“사귀는 게 아니고?”
“합의하에 했는데 사귀기까지야. 아, 짜증. 서오 쟤는 기억 못 하니 상의는 해 봐야겠다.”
유정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시도했으나 몇 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서오였다. 열이 받은 유정은 서오를 잡으러 부서로 들어갔다.
쟤들 어쩌려고 저러지.
“그보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도하를 어찌 보나 싶어 세연의 한숨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 * *
바쁘면 세연이 생각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도하는 자신의 헛짓을 깨닫게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정하자.
떼어 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공기처럼, 정세연은 쉬이 치워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좋은데.]
“어쩌자고.”
나직한 한숨이 떨어지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본 도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친누나, 하란이었다.
-점심에 만나자.
무슨 일로 저를 찾는지 아는 도하는 거절의 말이 통하지 않을 하란에게 단조로운 음성을 전했다.
“알았어.”
그리고 몇 시간 뒤, TS 전자와 가까운 카페로 향한 도하의 눈에 뜻하지 않은 인물이 걸렸다.
구진형이었다.
꽤 나이 차가 날 것 같은 여자와 같은 소파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를 창밖에서 본 도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뒤가 구린 놈이었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 *
12시 정각에 의자를 미는 소리가 다발적으로 났다.
“두 사람 점심 안 먹을 거야?”
입구로 이동하는 무리에 합류하지 않은 두 사람을 본 혜선이 인원수를 확인하려 묻자 세연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속이 안 좋아서요.”
“진형 씨는?”
“앱 규격 샘플 데드라인이 내일까지라서요. 점심은 거를게요.”
진형이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비볐다.
하도 비벼서인지 충혈된 눈동자에 혜선이 세연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짬 내서 세연 씨가 보조해 줘. 저러다가 쓰러질라.”
“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흔쾌히 답한 세연은 한숨을 거하게 내쉬고 있는 진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배는 쉬고 있어요.”
“내 일인데 어떻게 쉬어. 윽!”
“선배?! 왜 그래요?”
갑작스럽게 허리를 구부린 진형의 인상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배, 배가 아파…….”
“움직일 수 있겠어요?”
“어응…….”
“내 손 잡고 일어나 봐요.”
“으, 잠시만…….”
진형은 내밀어진 세연의 손을 잡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길게 내뱉고서 접은 허리를 폈다.
“하아. 괜찮아졌어……, 장이 순간 꼬였나 봐.”
“정말 괜찮겠어요?”
윗배를 계속 문지르는 진형의 안색을 샅샅이 살피면서 묻자 진형이 주춤 일어섰다.
“아무래도 병원에 갔다 와야겠어.”
“혼자 갈 수 있겠어요?”
“택시 타고 가야지. 그런데…….”
걱정을 놓지 못한 세연은 진형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주시했다.
진형의 시선은 작업하던 파일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찰받고 오면 이걸 언제 다 하나 싶다…… 그래서 말인데, 세연아. 앱 관리 네가 해 주면 안 될까?”
“선배 없이 제가요? 저 혼자 하기에는 진행이 거의 안 되어 있는데요?”
헤드 카피만 정해져 있고 리드 카피와 그 외의 것들은 전무했다.
“너 실력 있어. 내가 없어도 잘 해낼 거야. 돌아와서 내가 약간 고치면 내일까지는 어떻게 맞출 수 있을 듯한데…… 정말 안 될까?”
제작을 총괄 관리하는 CD인 혜선이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 외에 진형을 도울 사람이 없었다. 세연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 근데 비밀인 거 알지?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도록 해 볼게. 부탁한다.”
“네, 다녀오세요. 후우.”
금세 혼자가 된 세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텍스트 에디터를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