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33)화 (33/70)

33화

“너에게만 알려 주는 건데 이도하 대표한테 다들 불만이 많아.”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요?”

“푸후, 대표가 대형 프로젝트를 급히 잡아서 일정 변동이 상당했잖아. 나만 해도 휴가 내려고 했는데 TF팀으로 빠져서 쉬지도 못하고.”

TS 전자에서 출시될 신형 핸드폰의 입찰 경쟁은 치열했다. 

거의 보름을 매달려야 하는 프로젝트를 전담하게 된 팀들은 빼도 박도 못하고 야근행이었다. 

때문에 주말에도 예외 없이 회사로 출근하게 된 진형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계속 쏙닥거렸다.

“우리가 사귀고 난부터 큰 프로젝트가 연달아 잡히니까 데이트도 못하고 있잖아.”

“이번 비딩 PT 끝나면 시간 있잖아요. 조금만 더 힘내요. 선배.”

비밀 연애에서 즐길 수 있는 짜릿함은 사치인 듯이 세연은 아직 진형이 연인보다는 사수 같았고 비품실에 있었던 그 일 때문에 진형과 둘만 있는 상황은 그다지 원치 않았다.

세연은 진형의 불만을 잠잠히 들어 주면서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대답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다고 TS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시장에 뛰어드는 건지. 그쪽에서 사정사정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걸 두고 대표가 TS 총수 일가가 아닌가 하는 루머도 잠시 돌았다니까. 말이 되냐.”

“그랬어요?”

“너야 모를 만도 해. 초창기부터 TS 그룹과 연관된 광고 입찰 공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제안 요청이 끊이지 않으니 대표에게 황금 인맥이 있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었어.”

“굉장하네요.”

“어……?”

“그렇잖아요. TS 본사 수주를 받지 않는데도 아웃바운드가 들어온다면서요? 그만큼 우리 회사가 신뢰성과 보장성이 입증된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 뭐. 암튼, 대표가 TS 총수 직계라는 뒷말은 구라다 이 말이야.”

“그러고 보니 대표님도 ‘이’씨네요.”

“‘이’ 씨야 우리나라에서 ‘김’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잖아. TS 일가와 혈연관계라면 계열사 한 자리를 꿰찼겠지. 하여간, 끝까지 받지를 말든가 우리만 고생이라고.”

“이도하 대표님도 늦게까지 회사에 계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내 말은, 너나 나나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리 자주 내려오냐는 거야. 이러니까 다들 불만이지. 그리고 말이야. 대표 좀 싸패 같지 않아.”

경악스러운 소리였다. 세연은 입을 딱 벌리며 진형을 쳐다보았다.

종이컵을 질겅거리며 도하를 힐긋거리느라 진형은 세연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성격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전혀요. 전 못 느꼈어요.”

그녀가 공감해 주지 않자 답답한지 진형의 미간 중앙이 불퉁하게 튀어 올라 있었다.

“아니 그렇잖아. 부하 직원이 힘들어하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니고.”

“선배, 선배가 야근 때문에 힘든 건 이해되는데 대표님의 몸이 두 개가 아니잖아요.”

경쟁 PT를 앞둔 기간에 도하 역시 손 놓고 있지 않고 킥오프 미팅부터 전반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획부와 제작부 팀장들과 입찰 전략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너는, 햐.”

“선배?”

“관두자.”

고개를 좌우로 저은 진형이 세연을 두고 자리로 돌아갔다.

진형이 하는 말마다 대꾸했던 세연은 그가 왜 삐쳤는지 알고 있었지만, 도하의 사연을 아는 그녀로서는 진형의 기분보다 도하가 처한 상황에 더 감정이 이입되었다.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연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대표실로 올라간 듯 몇 분 전까지 해도 있던 도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 *

방송 광고와 옥외 광고 그리고 TTL까지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광고 경쟁 PT에 박차를 가하느라 TF팀은 물론 보조하는 제작 1·2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프로젝트 전반을 꿰뚫고 있는 도하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연은 상사와 종종 마주칠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막막했다.

그는 그녀를 없는 취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눈길만 닿았다 하면 피하고 있었다.

때론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를 지그시 맞춰 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주는 어땠는가.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분석 팀에 갈 일이 생긴 그녀는 17층에서 마주친 도하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용건으로 치부하는 화답이 돌아와 뻘쭘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반가워서 그만 인사드린다는 게…….]

[가 봐요.]

징징거리는 어린애를 내쫓는 듯한 말투에 한숨이 그윽하게 깔려 있어 그녀는 무안한 티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잠을 못 잔 듯 지쳐 보이는 그의 낯빛에 눈치만 봤다.

평사원인 그녀도 바쁜데 대표인 그는 오죽하랴.

“푸후…….”

도하를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제가 내쉬고도 깜짝 놀라 세연은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경쟁 PT의 결과 당락이 오늘 발표되어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연발했다.

“하아.”

“흐에에.”

“제발…….”

수십억의 프로젝트인 만큼 수주를 따낸다면 회사 매출에 지대하게 영향이 갈 것이었다. 그러하니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들릴 기미가 없는 소식에 치우쳐지는 도하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 넣을 때였다.

“와아아아!!!”

벽을 뚫은 함성이 들리자 제작부서 실무진들의 얼굴에 기대 어린 홍조가 피었다.

“됐어요! 됐어!!”

황성수 팀장이 달려오자 사원들이 기립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누군가는 업무용 데스크를 쾅쾅 두드리기도 했다.

광고 예산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경쟁 업체가 무려 일곱 곳이었다.

“프로젝트 TF 팀 최고다!”

하나같이 쟁쟁한 광고 대행사들이라 입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했던 TF 팀에게 다들 수고의 말을 던졌다.

“TF 팀 소감 한 말씀해 주시죠.”

“안 되면 눈물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이 닭똥 같은 눈물은 뭐죠?”

“이건 기쁨의 눈물이고요.”

“사진 찍어 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단체로 눈물 흘린다는 소식 듣고 구경 왔습니다.”

기획부서 직원들까지 합세해 감회가 남다를 TF 팀원들을 놀려 댔다.

“이러지 말고 본격적인 자리를 마련하자고요.”

황성수 팀장이 주도하여 건의하자 혜선이 키폰의 수화기를 들었다.

“대표님께 말 올릴게요.”

* * *

월요일부터 다시 바빠질 일정을 정비하기 위해서라도 휴식과 보상은 필요했다.

일감을 끝내지 못했거나 개인 사정이 있는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회식에 참여했다.

세연은 단체 회식과 다르지 않은 자리에 빠질 수 없어 참석한 도하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직급이 높은 이들에게 술잔을 받는 도하는 크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도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조차 걸려 있지 않아 서서히 사람들이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취해 있어 도하의 심기를 알아챈 이들은 세연처럼 술을 자제하는 쪽이었다.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

오늘만큼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쓰이는 도하의 생각에서 벗어나 회포를 푸는 분위기에 흥청망청 취하고 싶었다.

술잔에 코를 박듯이 마셔 댄 세연은 취기가 확 몰려오자 약간의 후회가 들었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딸딸한 기운에 잠식되어 세연은 방긋방긋 웃었다.

* * *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이는 세연이 원 없이 술을 마셔 대자 도하는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저렇게 마셨다간 집에 어떻게 가려고.

눈가를 구긴 도하의 눈에 세연의 옆자리에 앉는 진형의 모습이 서늘히 담겼다.

애인의 타이틀을 단 구진형이 있지 않은가.

어련히 제 애인을 챙길까.

세연이 보고 싶다가도 다른 이를 보고 웃는 그녀를 보기는 싫었다. 그러한 양가감정에 휩싸인 지도 꽤 되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는 그녀를 덤덤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이 냉정하다고 느끼도록 두었다.

기어이 그녀가 알아서 그를 피하게 되었음에도 기분은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요새 안 좋은 일 있어?”

혜선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닿아 있어 시선을 돌린 도하는 미지근한 숨을 잇새로 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네요.”

“뭘 원하기에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뭘 원하는 거지? 본능처럼 움직인 시선 끝에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세연이 보였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설명할게요.”

저러다가 넘어질라.

신경 끄자고 다짐했지만 세연의 움직임을 좇은 도하는 결국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몸을 일으켰다. 몇 주간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우욱.”

소리가 나는 곳에서 등을 들썩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그러게 왜 마시지 못하는 술로 고생합니까.”

타박하는 목소리를 들은 듯 움찔한 몸이 그에게로 틀어졌다.

발그레한 뺨과 살짝 열린 도톰한 입술, 그리고 눈가가 풀린 모습이 아찔한 향을 몰고 왔다. 도수가 높은 술을 한꺼번에 마신 것처럼 훅 취한 기분이다.

“대표님. 말해 주세요.”

“…….”

“제가 싫으세요?”

그랬으면, 정세연을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할 수 있었을 거라고 도하는 생각했다.

그들이 바라는 미소 한 번 띠어 주면 될 일, 그게 뭐가 어렵다고.

‘싫지 않아서 문제지.’

불현듯 가까워진 거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게 된 이유였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그녀가 그의 앞에 당도하자 말간 눈동자에 간파당한 것 같은 속내가 뒤늦게 홧홧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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