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선배!”
“하아, 세연아.”
진형은 포기를 모르고 그녀를 따라잡았다.
“선배! 하지 마세요.”
철제 선반에 등이 닿았다.
윗입술보다 두꺼운 아랫입술이 쭈욱 내밀어지자 세연은 서둘러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뜨여 있는 진형의 두 눈이 매섭게 구겨졌다.
“우리 연인 맞아?”
따지듯이 묻는 말은 강압적이었다.
“그게, 너무 빨라요.”
“빠르긴 뭐가 빨라. 네가 좋아서,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건데.”
진형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분노가 축적된 듯이 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자자는 것도 아니고 왜 그리 거부해. 너, 스무 살도 아니잖아. 남들 다 하는 포옹만 할 거야?”
떨지 않으려고 했지만 진형이 몰아세우자 세연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뭐야 너, 처음이야?”
저질스러운 물음에 세연의 얼굴이 어둡게 붉어졌다.
그에 반해 진형의 입술이 실실 올라갔다.
그 반응이 세연을 더 수치스럽게 했다.
“설마하니 키스도 못 해 봤을 줄은 몰랐지. 미안해. 내가 배려하지 못했다.”
첫 키스가 아니라도 데이트도 하기 전에 입술부터 부딪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왜 모르는지.
설명해도 진형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할 것 같았다.
‘이게 남자 여자 차이인가…….’
자신이 원하는 연애의 환상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러면 뽀뽀는 괜찮지?”
“아뇨. 싫어요.”
죄송하다, 미안하다.
내 기분을 헤아려 주지 않는 진형을 배려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세연은 머리의 위치를 비스듬히 두어 거부 의사를 표했다.
“이것도 안 돼? 섭섭…….”
쾅!
돌연 비품실 문이 찌그러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누가 발로 문을 찬 소리라는 걸 눈치챈 진형은 급히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호흡을 멈춘 세연은 그들 말고 다른 이의 기척을 들었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멀어지다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야. 진짜.”
소강상태에 진입하자 진형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가 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나가 볼게요.”
들고 있던 파일을 원래의 위치에 꽂을 정신이 없었다.
무작정 손에 닿는 선반에 파일을 올려 두고 세연은 서둘러 뛰쳐나갔다.
“세연아!”
같이 가자고 진형이 불러 세웠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세연은 자리로 돌아와 가쁜 숨을 터트렸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 진형이 그녀가 들으라는 듯 의자를 당겨 앉는 소리를 크게 냈다.
그렇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할 뻔한 그녀는 진형을 보기가 싫었다.
난데없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진형의 뺨을 때렸을 수도 있었다.
* * *
대표실로 들어선 도하는 중역 데스크를 으깨듯이 주먹으로 내리쳤다.
며칠간 15층에 발길을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금단 증상에 시달린 것처럼 세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내려간 건데 비품실로 들어가는 세연이 보였다.
따라 들어갈까.
머릿속을 배회한 생각에 도하는 실소했다.
가서 뭐 하려고.
남의 여자가 된 정세연에게 과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불쾌감으로 이어졌고, 걸레를 씹은 것처럼 더러운 기분을 유발하는 진형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턱 밑으로 성성한 핏줄이 돋아났다.
둘이서 뭘 하든 그와 상관없다.
남의 연애를 엿볼 변태도 아니고.
인상을 팍 구긴 도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구차하게 구경할 생각이 없음에도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듯이 다리가 무거웠다.
몇 층 못 간 걸음은 내려올 땐 속도가 붙어 빨라졌다.
빠르게 비품실 앞에 이르자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어이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귓가에 파고든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에 핏줄이 섰다.
[설마하니 키스도 못 해 봤을 줄은 몰랐지. 미안해. 내가 배려하지 못했네.]
잇새로 거친 숨이 토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자 혈압이 올랐다.
목덜미가 뜨거워져 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겁탈이라면 나섰겠지만 정세연과 구진형은 사귀고 있었다.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다고 내려왔나. 눈에 띄지나 말 것이지.
돌리기 힘든 발길을 미적거리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내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 뽀뽀는 괜찮지?]
[아뇨. 싫어요.]
단호하기도 하지.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다.
실없는 웃음이 나오고 전신을 억누르던 자제심이 개방되었다.
그는 힘을 실어 비품실 문을 찼다.
[이것도 안 돼? 섭섭…….]
그가 차는 것이 구진형이라는 생각으로.
축구공을 차듯이 다리 힘줄을 팽팽히 당겨 차 버린 소리에 망발이 잦아들었다.
이만하면 그녀에게 도움이 되겠지.
“착한 짓 했다고 우쭐해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아도 그의 기분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도하가 중역 데스크를 힘껏 찬 소리를 듣고 달려온 석호는 양 눈썹의 끝마디가 비스듬히 올라간 도하의 표정을 마주했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없어.”
“인상 피기나 해. 표정만 봐도 견적이 나오는데.”
짜증이 밴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의자에 앉은 도하가 양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을 천천히 까닥였다.
“TS 전자 경쟁 PT 들어온 거 있지?”
“어어, TS 그룹의 RFP는 꾸준히 들어오지.”
제이온을 설립하자마자 조부 이청명 회장은 TS 계열사인 광고 회사가 맡을 굵직한 프로젝트의 입찰 공고를 아웃바운드 형식으로 연결시켰다.
“참여한다고 알려.”
그러나 도하는 비딩액이 40억이나 하는 입찰에 뛰어들지 않고 중소기업의 광고 수주를 따내 반년 만에 성과를 냄으로써 제이온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진짜냐. 정말로 TS 전자 신제품 광고 수주 따 오게?”
“그래.”
이청명 회장이 손자 자랑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였기에 도하의 얼굴이 세간에 팔리진 않았지만 웬만한 거물과 유명 인사는 알음알음 도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승계에서 멀어지려 다른 길을 택한 도하가 오로지 제 힘으로 올라서자 이청명 회장은 손자의 성공을 기특하게 여겼다.
후계자 재목이라며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주들에게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괜찮겠어? 하란 누나가 가만히 안 있을 텐데.”
TS 전자의 상무인 친누나는 도하가 언젠가 그녀를 치고 회장직에 앉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귀찮게 불러내겠지. 알아서 감당할 테니 전체 공지로 메일 돌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면서도 머릿속을 알짱거리듯이 맴도는 얼굴을 치워 버리기 위해 그리 행했다.
“각 팀의 인력을 차출해 TF팀 구성하라고 하달해.”
몸과 마음이 정신없어지면 정세연이 더는 생각나지 않을 거라고 자만했다.
* * *
세연의 연애는 순탄했다.
순탄하기보다는 너무 밋밋할 정도로 진형과의 연애는 특별함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연애하면서 느낄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라든가 매일 보고 싶은 애틋함은 일절 들지 않았다.
진형은 일견 애인보다는 남자인 친구처럼 담백한 이성에 가까웠다.
그녀가 스킨십을 피한 후로 진형은 경계할 만한 행위를 취하지 않았고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녀도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
솔직히 진형보단 다른 남자가 신경 쓰였기에 진형과의 불편한 일은 금세 잊히게 되었다.
“선배.”
“왜?”
“제 착각일 수도 있는데 대표님이 우릴 보는 것 같지 않아요?”
현재 진행되는 TF팀의 비딩 프로세스 건을 논의하고자 제작부를 찾은 도하는 세연과 진형에게 시선을 버젓이 두고 있었다.
“어디…… 진짜네. 너 뭐 잘못한 거 있어? 대표님이 널 노려보는 것 같은데?”
날 째려보신 게 맞구나.
타인이 체감할 정도면 착각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지난 일을 다시 떠올려 봐도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다. 연인 행세를 하여 강 비서를 잡은 뒤 잘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변화를 직면한 세연은 당황스러운 한편 울적했다.
마음에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날 싫어하게 된 걸까.
이유라도 듣고 싶은데 그녀가 다가가려고 하거나 시선을 지그시 맞추면 수틀린 듯이 그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하아…….”
“너도 대표님 싫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제가 들은 내용이 황당무계해 세연은 눈가를 찡그렸다.
“아니야?”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감이 잡히지 않는지 진형이 다시 확인을 거쳤다.
“선배는 대표님이 싫으세요?”
세연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불편해. 편한 사람은 아니잖아. 굳이 네게 연인 행세를 제안한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튼 나는 좀 그래.”
“아……, 그렇죠.”
세연은 진형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도하의 출중한 외모와 걸맞은 분위기는 사람을 절로 긴장시키는 면이 있었다.
타인과 ‘그’를 철저히 나누는 건 완벽한 머리와 사업을 책임지는 대표로서의 역량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아우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그의 앞에 서면 머릿속이 엉키고 말을 더듬게 된다.
‘불편함과 다른 특별함이지.’
도하를 동경하는 그녀라도 상사와 업무 관련 이야기를 터놓는 게 편할 리는 없었고, 개인적인 친분을 다질 만한 기회도 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이처럼 그가 거리감을 두어 멀어지고자 한다면 그녀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