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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31)화 (31/70)

31화

세연은 발소리가 들리는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진형과 회사에서 같이 붙어 다니는 동료 직원 두 명이 휴게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옥상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독한 냄새가 났다.

“저희 찾으셨어요?”

뻑뻑한 담배 내가 지독했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 없는 세연은 미간 사이를 의식적으로 펴며 물었다.

“그건 아니고요. 진형 대리가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던 차였어요.”

이 대리와 민 대리가 세연과 진형을 쳐다보았다.

“정세연 씨에게 업무를 가르치고 있었어.”

진형이 변명거리를 가지고 먼저 둘러대자 세연은 열려던 입을 살포시 닫았다.

“난 또, 우리가 옥상에 가자고 했을 때 안 된다고 하니까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나 했지.”

“아니라고 했잖아! 저번에도 말했고.”

진형이 발끈하듯이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세연은 깜짝 놀랐다.

“뭐야.”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이지. 그리 화를 내면 정세연 씨가 얼마나 무안하겠어.”

두 대리가 어이없어하는 것처럼 세연도 같은 심정이었다.

뭐야…….

비밀 연애를 합의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진형을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무신경했네요. 정세연 씨에게 혹시라도 누가 될까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굴었어요. 이해해 줘요.”

진형이 이렇게 나오니 뭔가 자신과 그가 바람이라도 피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실 말씀도 끝나셨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음 상한 티를 드러낼 수 없어 세연은 자리를 피하고자 일어섰다.

“그래요.”

진형의 눈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미안하다는 눈짓이었지만 한 번 상한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세연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휴게실을 벗어났다.

* * *

“정세연 씨 성깔이 있네.”

“생김새만 봐도 쎄 보이잖아.”

진형과 입사는 물론 같은 연차에 대리 직급을 단 두 사람이 세연이 안 보이자마자 언행을 달리했다.

“너희 때문이잖아.”

자신이 우위를 점한 분위기를 망친 주범들을, 진형은 노려보았다.

“우리가 뭘.”

“네가 과민하게 받아친 탓이잖아. 인마.”

“그래. 내 탓이라고 치자.”

상황 자체가 못마땅한 진형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대리와 민 대리는 다른 관심사를 입에 올렸다.

“진심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정세연 씨한테 진짜 마음 없어?”

“……그래.”

“말투 보니까 아닌데?”

“사실대로 털어놓아 봐. 세연 씨한테 마음 있지?”

이 대리가 껄렁하게 진형의 어깨를 쿡 찔렀다.

아프기도 하고, 놀림감이 된 것 같아 짜증이 난 진형은 목소리 톤을 확 높였다.

“아니라고!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세연 씨 예쁘잖아.”

“뭐?”

돌아온 대답이 예상안을 뛰어넘어 진형은 진심으로 놀라고야 말았다.

“그만한 인물 찾기 힘들다.”

“내 말이. 그거 달린 사내 녀석이 어떻게 저런 미인을 두고 딴마음이 안 들 수가 있어?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야.”

“민 대리 말처럼 마음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몸이 끌리지 않는다는 건 네 몸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너희 눈에도 예뻐 보여?”

믿기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것처럼 진형의 표정이 심각성을 띠었다.

“말이라고. 근데 너희 눈에도, 라고 말한 거 보니 너도 마음이 있었네.”

히쭉거린 이 대리가 진심을 털어놓으라며 팔꿈치로 진형의 허리를 찔렀다.

“하지 마.”

이 대리의 손길을 뿌리치며 진형은 날 선 어조로 물었다.

“나 진짜 진지해서 그래. 묻는 말에나 대답해 봐.”

“눈깔이 삐었어? 세연 씨 미인이잖아. 원래도 예쁜데 요즘따라 분위기도 그렇고 여성스러워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래.”

“너도? 나도 그렇게 느꼈잖아.”

……그렇단 말이지.

“너네 신체적 사정은 궁금하지 않으니까, 나 빼고 떠들다가 와.”

뒤에서 야야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형은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두 대리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진형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예쁘다고, 정세연이?’

세연이가 예쁜 거야 모르지 않았다.

한때 세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흘렀지 않은가.

예쁘장한 얼굴과 늘씬한 체형보다는, 비상한 머리와 상냥한 마음씨 같은 것밖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러니 세연의 외모는 좀처럼 인식되지 않았다.

주아가 있으니 여자가 고플 정도로 몸이 달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

제작부서로 들어선 진형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세연의 옆얼굴을 보고서 몰래 군침을 삼켰다.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눈매와 측면에서 보아도 촉촉한 입술. 이어 높게 올라간 콧대와 작은 콧방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담은 작은 얼굴의 피부색조차 야릇하게 보여 잠잠하던 성욕이 들끓었다.

자신이 느낀 게 틀리지 않았다.

세연이 너무 예뻐 보이는 게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정세연?!]

호텔 로비를 걷는 여자는 분명, 세연이 맞았다.

그런데 장소의 차이 때문인지, 세연의 얼굴과 그녀를 감싼 분위기가 평소와는 무척 달라 보였다.

회사에서 보았던 화장을 다시 고쳤는지 뺨이 발그레해져 있었고, 눈물이 고인 듯 축축한 눈동자는 호텔 회전문에 닿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세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를 다행히 보지 못한 채였다.

[뭐야, 누구랑 온 거야.]

그때, 검은 외제 차가 회전문 너머의 밖에서 멈추었다.

그 차를 보고 세연이 미소를 머금자 물오른 외모가 더욱 화사하게 피었다.

회전문을 통과해 차에 올라탄 세연은 금방 진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차 주인이 이도하 대표란 말이지.’

원래부터 도하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싫어할 이유가 또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세연이 알게 모르게 이도하를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도하의 외모와 그가 가진 것들이 부러웠는데, 자신의 것인 세연이마저 도하에게 남자로서 끌리고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배가 아팠다.

‘물론 이도하가 세연이를 좋아할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현실성을 떼어 놓아도 빈정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연이의 마음이 도하에게 가는 건,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빼앗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존나 싫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세연의 옆자리인 자신의 책상에 앉은 진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자신의 외모도 잘생긴 편이었다.

‘주말에 데이트 신청을 할까.’

그가 왔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세연을 보면서 어떻게 기분을 풀어 줘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아, 이번 주는 안 되겠다.’

잡혀 있는 일정을 떠올려 보니 주말을 뺀 다음 주 일정밖에 여유가 없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 되지. 은밀하게 말이야.’

진형은 몸을 동하게 하는 세연을 음흉하게 쳐다보았다.

세연이는 내 애인이야.

도하는 물론, 다른 놈들에게도 주기 싫었다.

세연의 마음과 몸을 자신에게 묶어 놓을 방법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 * *

주말은 왜 이리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월요일부터 빡세게 굴러지는 회사 일정에 세연은 출근하자마자 주말이 그리워졌다.

“세연 씨.”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편 진형을 쳐다보았다.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 진형이 왼쪽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비품실에 재작년 기획안들을 모아 둔 파일이 있거든요. 찾아 줄래요?”

“알겠습니다.”

바삐 비품실로 들어선 세연은 년도가 적힌 층의 선반을 올려다보았다.

뭘 밟고 올라가야 할 높이였다.

의자 같은 게 없나 싶어 뒤돌려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기척 없이 껴안았다.

뒤에서부터 덮치는 포옹에 세연의 가슴이 팔짝 뛰었다.

“꺄아아!”

비명을 냅다 지른 세연은 팔을 뻗어 아무 파일이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돌아보는 즉시 보이는 머리통을 퍽퍽 가격했다.

“억억! 나, 나야!”

“선배……?!”

자신을 껴안았던 남자의 정체를 인지한 세연은 내리치려던 팔을 급히 멈추었다.

진형은 두 팔로 머리를 막고선 슬그머니 눈을 올려 보였다.

“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진형이 숙인 허리를 펴며 그녀에게 맞은 머리를 한 손으로 살며시 눌렀다.

“당연히 너와 같이 있으려고 한 핑계지. 쓰읍. 아파라…….”

“어디 봐요.”

두꺼운 파일에 찍힌 정수리를 보려 세연은 까치발을 살짝 들었다. 그러고서 머리카락의 결을 한쪽으로 넘겼다.

“피 나?”

진형의 머리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리 보니 머리숱이 눈에 띄게 성글어 있었다.

“피는 안 나고 부었는지 약간 불긋해요.”

“진짜 아팠어. 앞으론 무작정 때리지 마. 조심성 없게.”

눈물이 난 듯 진형이 안경을 벗고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볍게 눌렀다.

“진짜로 미안해요. 다음엔 사람 확인하고 때릴게요.”

진형이 많이 아파하자 때린 죄가 있어 세연은 안경을 다시 착용하는 진형의 눈치를 봤다.

“세연아…….”

햇빛이 잘 들지 않은 곳이라서 그런지 그녀를 보는 눈동자가 어두워 보였다. 

세연은 묘한 거부감이 일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 맡아지는 탁한 공기도 괜히 불쾌해 복도로 나가고 싶었다.

먼지가 코 밑으로 떠도는 것 같아 콧잔등을 찡그리는데 진형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뭐, 뭐야.’

진형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세연은 순발력 있게 뒤로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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