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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30)화 (30/70)

30화

전원을 켠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만 있던 세연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충동적으로 일어섰다.

‘이러지 말고 대표님을 보러 가자.’

그러나 20층으로 연결되는 비상구 문 앞에서 세연은 망설였다. 

연락 없이 찾아간 제 행동이 이상하게 비치지 않을까 싶었다.

몇 분째 비상구를 떠나지 못하는 세연의 머릿속에 석호의 얼굴이 전구처럼 반짝였다.

‘유 비서님이 있었지! 유 비서님에게 대표님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자.’

세연은 접견실로 이용되는 로비를 걸었다. 부지런히 사무를 보던 석호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세연 씨.”

세연을 본 석호가 반가운 내색을 띠었다.

“대표님이 다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자신의 방문에 석호가 무안을 주지 않자 세연은 안심하며 물었다.

“부러 알린 거긴 한데 화제 몰이는 확실히 됐네요.”

쓰게 웃은 석호가 대표실을 곁눈질했다.

“부상 투혼도 아니고 오늘 하루 정도는 집에서 쉬라고 했는데 자식이 기어코…….”

“내가 뭘.”

문을 열고 나온 도하는 세연의 시선이 머문 부위를 힐긋거리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스친 정도입니다.”

도하의 왼 손바닥이 붕대로 압박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프잖아요…….”

일상 생활하는데 불편할 만한 부상이었다. 세연은 가슴이 다 먹먹했다.

“이 정도 아픔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가 다친 손으로 눈썹의 반 마디를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녀를 그의 그림자 안에 두었다.

그리고 이맛살을 구기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닿으려던 손에 그녀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저래 봬도 괴물 같은 회복력을 자랑하니까 금방 아물 거예요.”

두 사람 가운데로 파고든 석호의 목소리에 도하의 팔이 부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내 얼굴을 만지려고 했던 것 같지?’

자신이 보고도 좀 현실성이 없게 느껴져 세연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눈꼬리에 액체가 맺히는 감각을 인지하고서 적잖이 놀랐다.

‘대표님이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한 거였어.’

세연은 그렁한 눈동자를 세게 깜빡이며 눈물을 빠르게 털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잘못하면 이상해질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넘기자 그가 다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곤 입을 열었다.

“상해를 가한 정황으로 강 비서를 잡아들였습니다. 이성을 잃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더군요.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로 인해 회사 안팎이 바빠져서 정신이 없어요. 새 비서도 뽑아야 하고 말이죠.”

슬쩍 웃어 보이고서 일어난 석호가 데스크 한편에 올려진 상자를 들었다.

“강 비서의 짐, 택배 보내고 올게.”

강 비서의 짐을 빼는 석호의 마음이 어떨지 모르지 않아 세연은 마음 쓰이는 목소리를 흘렸다.

“유 비서님 마음이 말이 아니겠어요.”

“알고 있었습니까.”

“저번에 우연히 만나서 사정을 들었거든요.”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은 말에 도하의 미간 사이가 중앙으로 굽어졌다.

“대표님,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세연은 도하를 향한 걱정을 내비쳤다.

“……그래야겠군요.”

이맛살을 한껏 찌푸린 그는 눈가마저 일그러뜨린 채였다.

* * *

이후 도하가 퇴근했다는 소식이 오후에 들려왔다.

하루 정도는 그가 안정을 취하길 바랐던 세연은 안도하며 순조롭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날부터 며칠은 도하를 보지 못했다.

그를 자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는 그녀가 느껴선 안 될 감정이었다.

묵묵히 주어진 일을 소화하면서 지내던 어느 평일의 낮.

“세연아.”

귓가에 진형의 목소리가 닿자, 일에 파묻혀 있던 세연은 고개를 들어 옆으로 돌렸다.

둘만의 시그널처럼 다정한 호칭을 부른 진형이 밖으로 나가자는 듯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갈게요.”

계속 일만 하려니 허리며 목이 찌뿌둥했다.

그렇지 않아도 쉬고 싶은 참이라 진형의 신호에 응했다.

하지만 비품실 말고 개방된 곳에서 진형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진형이 비밀 장소로 칭한 비품실은 청소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먼지내가 났다. 그런데다가 창문이 없어 실내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거기서 진형과 만날 때면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느낌보단 나쁜 비밀을 공유하는 듯했다.

“선배.”

그러한 갖은 이유가 맞물려 세연은 진형이 비품실 방향으로 몸을 틀자마자 서둘러 불러 세웠다.

“어, 왜?”

잠시 걸음을 멈춘 진형이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고 있는 세연을 보았다.

“우리 휴게실로 가는 게 어때요?”

세연은 방긋 웃어 보였다.

“휴게실에서 대화 나눠요.”

세연의 말을 들은 진형은 썩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선배와 제가 같이 있어도 이상하게 보일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떨떠름했다.

“불안하면 직장 후배로 대하듯 말해요.”

시야에 누군가가 있을 때 진형은 세연에게 존댓말을 고수하고는 했다.

“그럴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 남은 미련을 못 버린 듯 진형은 비품실을 힐끔거렸다.

누가 보면 비품실에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듯했다.

이해되지 않는 진형의 태도가 어이가 없기도 해 세연은 화도 나지 않았다.

공간 특성에 맞춰 아늑하게 꾸며진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휴게실과 이어진 탕비실에서도 기척이 없었다.

“뭐 마실래요?”

“믹스커피가 무난하겠다.”

탕비실에 들어선 세연은 믹스커피와 과일 차를 가지고 와, 소파에 앉아 있는 진형을 마주하며 앉았다.

“어제 뭐 했어?”

세연이 과일차를 한 모금 마시자 진형이 물어 왔다.

“어제요? 아, 맞아. 선배. 선배 CW 호텔에 방문했죠?”

“역시 너였구나.”

“선배도 날 봤어요?”

그를 봤을 때, 진형은 엘리베이터에 타 있었다.

진형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는데 언제 날 본 거지?

“너, 도?”

의아해서 물은 것인데 진형의 두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거렸다.

“네.”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집안 행사를 거기서 할 줄은 몰랐어요.”

“어어, 맞아. 실은 도착하신 어른들 맞이한다고 내려가다가 널 본 거야. 그런데 어떤 차를 타고 가던데, 누구랑 간 거야?”

누구 차냐고 은근히 물어보는 말투여서 세연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된 거냐면요…….”

강 비서의 만행이 밝혀진 상태였다. 강유세가 도하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직원이 없었다.

이제 말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연은 그간의 사정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대표님을 도와드리고자 동행했던 거였어요.”

도하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게 세연은 전반적인 과정을 뭉뚱그려 말했다.

“네 말은, 강 비서의 범행을 밝히려 대표와 사귄 척했다는 거네? 와, 진짜……, 할 말 없게 만든다.”

치솟는 화를 다스리려는 듯 진형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푸푸, 숨을 거칠게 터트렸다. 그리고 쉬이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지 그녀의 시야 내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질투심에서 야기된 감정이라고 보기에는 표출된 행동이 무작스러웠다.

행동을 봐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세연은 불안한 눈동자로 진형의 움직임을 좇았다.

진형이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보니 심장이 잔뜩 졸았다.

잔뜩 찡그린 진형의 얼굴을 보아 쉽게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짧은 보폭으로 왔다 갔다 하던 발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진형이 굳은 얼굴로 세연을 쳐다보았다.

“대체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시선은 물론 제게 향한 목소리가 상당히 사나워 세연은 자신이 놓친 부분에 관해 재깍 사과했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면 다야? 나한테 상의도 안 하고, 그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대표님의 일이다 보니 그분의 개인 사정을 털어놓기가 곤란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도 참 생각이 없다. 머리는 왜 달고 살아?”

잘못한 건 맞지만 사람의 존엄을 짓뭉개는 발언은 과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라고 되받아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서로의 감정만 더 악화될 뿐이라 세연은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남들한테 물어봐. 나라서 이러고 화 풀지, 다른 남자였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이러든 저러든 결국 그녀의 탓으로 결론 나는 상황이었다.

“세연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만 있자 자신도 심했다고 느낀 듯, 진형이 평소의 톤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날이 선 목소리를 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입장 생각해서 이만하는데, 너도 내가 서운해 할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야 해.”

“……이해해요.”

“그래, 이해했으면 됐어. 근데, 뭘 받기로 했어?”

“네?”

“응?”

진형의 말이 일순 이해되지 않아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네가 이도하 대표를 도와줬다니까 하는 말이야.”

당황한 얼굴로 진형이 세연의 눈앞에서 손을 휙휙 가로저었다.

그제야 세연은 진형이 하고자 한 말을 깨달았다.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서요.”

“그래서 안 받기로 했다고? 이도하 대표도 그러자고 해?”

“감사 인사를 전하셨고, 안 준다고 하신 게 아니라 그에 관해서 별말 없으신 거였어요.”

“그게 그거지. 어휴 너도 참…….”

진형이 한숨을 거하게 내쉬며 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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