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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29)화 (29/70)

29화

“어떻게 날 이렇게 취급해요? 정말로 내가, 대표님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버림받은 것처럼 강 비서가 붙잡힌 양팔을 버둥대며 그에게 매달리려고 했지만, 그런 강 비서를 보고도 도하의 낯빛은 삭막했다.

“착각이 심하군요. 내가 강 비서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까.”

도하의 두 눈에 어린 건조함은 맞은편에서 본 세연으로 하여금 사막의 황폐한 땅을 떠올리게 했다.

벌어진 일들을 담담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바싹 메말라 있다는 걸 세연은 알 수 있었다.

“나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강 비서를 응시하는 도하의 표정은 싸늘했지만 세연이 보기엔 더없이 지쳐 보였다.

“전 정말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강 비서는 끝까지 자신이 억울하다고 믿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니라고 해 봤자 당신을 믿을 이유도 없고요.”

“…….”

“내게 강 비서는 일개 비서에 불과하니까.”

건조한 비수에 악어의 눈물을 흘리던 강 비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적어도 비서로 있는 동안 날 훔쳐봤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조소한 목소리가 뒤이어 다른 말을 내뱉었다.

“풀어 주세요.”

계획한 생각을 이행하고자 도하는 강 비서를 붙들고 있는 두 경호원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냉큼 떨어지자 두 손이 풀린 강 비서가 기대를 품은 얼굴로 도하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원하는 프레임에 날 씌우지나 말고 확실한 증거를 대서 믿게 해 봐요.”

그럴 수 없을 것을 알기에 도하는 강 비서에게 관심이 떨어졌다는 듯이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고 몸을 틀었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세연에게 위협을 가할 시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강 비서의 원망을 세연에게 향하게 둬서는 안 되기에. 

그런 마음으로 도하는 강 비서와의 인연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듯이.

도하가 석호의 어깨를 툭 쳤다.

쓰게 웃은 석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자신의 감정만 중요한 여자였다. 강 비서에 대한 마음이 모래바람처럼 흩어졌다.

* * *

“수고 많았어요.”

차가 집 근처에 멈췄지만 세연은 차 안에서 내리지 않았다.

“대표님.”

그가 지친 낯빛을 그녀에게 고스란히 보였다. 완전히 어둠에 잠긴 것처럼 도하의 표정은 웃음기 없이 고요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드릴 게 있어요.”

“천천히 올라갔다 와요.”

“네.”

도하를 빨리 쉬게 하고픈 세연은 빠르게 계단을 밟아 2층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헉헉.”

10분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온 세연은 다시 차에 올랐다.

“대표님, 비타민이에요.”

때론 말보다 행동이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세연 딴에 고민하다 내민 건 비타 500이었다.

“오늘 멋졌어요. 그리고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그 엉뚱한 위로에 도하가 숨소리처럼 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힘드셨을 마음 이해해요. 품이라도 빌려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귀라도 빌려드릴게요.”

도하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자 세연은 더 용기를 내어 귓속말을 하듯이 속닥거렸다.

“저 듣고 있어요.”

세연이 장난스럽게 두 손을 모아  귓가에 대자, 도하가 가볍게 웃고는 운전석의 레버를 내렸다.

그러자 등받이가 뒷좌석으로 내려갔다. 편하게 기댄 그가 눈을 감았다.

“몇 년 전 강 비서가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진 날 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는 폐소 공포증이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못 타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한 게 맞나요?”

“심각한 건 아닙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이 도하는 단조롭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혼자 탑승하면 신경이 예민해지기는 해도 컨트롤은 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사고와 같은 예외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오래전에 엘리베이터 사고를 겪으셔서 그런가요?”

“비슷합니다. 어릴 적 창고나 다름없는 곳에 몇 시간이나 갇혀 있었으니까요. 내가 심각성을 인지한 건 강 비서가 날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 일로 강 비서와 악연으로 엮이게 되었으니 도하의 속은 말이 아닐 터였다.

“창문이 나 있지 않은 곳은 아무래도 기피가 되더군요.”

그녀는 왜 그가 지하 주차장의 비상구를 이용하지 못하는지 해답을 알아냈다. 1층 비상구 계단부터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지만 지하는 환기용으로 이용되는 구멍조차 없었다.

“성인이 돼서도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군요.”

피로한 눈을 큰 손으로 덮은 도하는 모래 산처럼 거대한 동시에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 것처럼 황폐해 보였다.

“전혀 한심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요. 대표님은 악조건을 극복하려고 하시잖아요. 부러 계단을 통해 움직이는 것도 그 일환 아닌가요?”

눈을 떠 고개를 돌린 그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표님은 분명히 정신적인 한계를 이겨 내실 거예요.”

그에 관해서는 세연은 의심하지 않고 도하를 믿었다.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자 그가 비타민 음료의 뚜껑을 열어 그녀가 보는 눈앞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것도 고마워요. 이제 뭘 마실 때마다 정세연 씨가 생각날 것 같군요.”

액체로 반질거리는 입술이, 그리고 그녀를 뚫어지게 보는 도하의 표정이 세연의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 한순간 허옇게 산화될 만큼 색정적이었다.

* * *

[대표님은 분명히 정신적인 한계를 이겨 내실 거예요.]

작은 새가 포로롱 어깨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날아온 작은 새를 마음껏 만지고 싶었다.

정세연은 햇살 같았다. 드리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밝은 빛.

세연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른 아침에 그는 집을 나서 아파트 단지 밖에 조성된 공원으로 향했다.

“도하 씨.”

새벽의 찬 기운을 맞는 도하의 앞에 익숙한 형체가 드리웠다. 도하의 눈살이 딱딱하게 구겨졌다.

“정말 지겹군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강 비서는 자신의 마음을 짓밟은 도하를 증오에 찬 눈길로 노려보았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강 비서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도하는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강 비서가 새삼 환멸스러웠다.

그는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쓰러졌던 것인데 그걸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다니.

누구와 달리 정세연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아픔을 알아주며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 주었다.

새콤달콤한 비타민의 맛이 떠올라 도하가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그러자 강 비서의 이성이 날아갔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 탓이야!”

강 비서가 외투 주머니에 숨긴 나이프를 꺼내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칼을 맞은 도하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 * *

“세연 씨! 대표실 비서, 강유세 씨라고 알아요?”

외부의 소식이 평사원들에게까지 알려졌다.

진상을 잠재우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떠올라 세연은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굴 기억해요.”

흥미 가득한 눈빛 속에서 세연은 무심한 낯으로 도하를 떠올리기 바빴다. 그러자 일의 전말을 꽤 자세히 알고 있는 한 직원이 입을 열었다.

“강 비서가 대표님을 오랫동안 스토킹해 왔대요.”

며칠이나 지속될 화젯거리에 어느 부서 할 것 없이 사내가 시끌시끌했다.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콧김까지 내뿜으며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던 팀 선배가 의아하게 여겼다.

“세연 씨는 안 놀라네?”

“그럴 리가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것뿐이에요.”

“그치? 나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의심을 피해 간 세연은 믹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서 모여 있는 무리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왔다.

“진짜 이래서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거야.”

“참하게 보이는 그 얼굴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문에 편승하여 사원들은 계속해서 말을 얹었다.

“대표님의 비서가 된 것도 흑심이 있었던 게 아니겠어요?”

“어후, 무서워. 내가 아는 사람이 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죠. 반성도 안 했다면서요?”

“유 비서님 말로는 오늘 아침에 대표님을 찾아가 상해까지 입혔대요. 완전 미친 거죠.”

“네?”

사무용 책상에 백을 내려놓던 세연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많, 많이 다치셨대요?”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까지 확인했던 그의 모습이 생생한데.

하루아침에 다쳤다는 말을 듣자 세연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세연이 유 비서와 친분이 있는 팀 선배에게 몸을 들이밀듯이 다가갔다. 그에 얼결에 몸을 물린 지 대리가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이다가 급히 저어 댔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 회사에 나오셨거든.”

다행이다. 잇새로 한숨을 고이 내뱉은 세연은 힘이 풀리는 두 다리를 어렵사리 움직여 의자에 주저앉았다.

“사람 잘못 둬서 뭔 난리인지.”

북소리처럼 널뛰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지만 도하의 멀쩡한 모습을 볼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왜 그러고 있어요?”

진형이 입구에 진을 치듯이 서 있는 부서 직원들 때문에 들어서지 못해 엉거주춤하였다.

“진형 씨! 들어 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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