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28)화 (28/70)

28화

연기라는 걸 알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전해 들은 게 없다 보니 세연은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숨 쉬어요.”

그의 말을 알아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내…… 내쉬었어요!”

과도하게 몰입한 도하가 여전히 가까이 있자 세연은 골이 띵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픽, 하고 터트린 얕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온몸을 간지럽히는 숨소리가 고막을 후비자 세연은 후딱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래 봤자 체어 등받이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긴장 풀고요.”

나직한 숨소리가 멀어진다.

뻣뻣하게 뭉친 몸을 슬쩍 건드리는 듯한 음성이 도하가 몸을 물림으로써 멀어지자 세연은 겨우 숨통을 트일 수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대강 상황이 정리된 방향을 쳐다보았다.

“놓으란 말 안 들려?”

은다영은 가드들에게 붙잡혀 문밖으로 내쫓기고 있었다.

강제로 퇴장당한 은다영의 모습이 아예 안 보이게 되자 도하가 절도 있게 팔을 올렸다.

홀 서버를 부르는 제스처에 근처에 있던 여직원이 공손히 다가왔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홀에 있는 분들에게 테이블 와인 제공 부탁드리죠.”

이 레스토랑의 매상이 올라가는 소리가 세연의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홀 서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청구서에 총 금액을 달아 놓겠습니다.”

“그리고 식은 요리 다시 내오세요.”

“네. 새 음식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을 태연하게 정리하는 도하를 멍하니 보던 세연은 다시금 제게 닿은 새까만 두 눈을 인지하고서 달뜬 숨을 죽였다.

아직 그녀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짙었다.

‘어우어우.’

도저히 맨정신으로 도하를 바라볼 수 없어 세연은 낯이 뜨거운 얼굴을 숙였다.

잿불을 품은 듯한 눈빛이 자신을 먹어 치워 불길을 키울 것 같아, 그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시작입니다.”

채찍과도 같은 목소리가 턱 밑으로 파고들자 세연의 고개가 흠칫거렸다.

나직한 목소리가 세연의 시선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세연은 눈물이 맺힐 것 같은 두 눈을 들어, 열이 뭉친 시선을 힘겹게 응시했다.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그녀의 속마음을 끄집어내려는 듯한 시선이 감당하기 벅찼지만 그녀에게 정해진 역할과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빙긋.

세연이 활짝 웃어 보이자 검은 눈동자가 칠흑 같은 밤처럼 어둑해졌다.

“날 보기만 해요.”

음울하게 들리는 음성이 주책없이 뛰고 있는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웃지 말고.”

제가 큰 실수라도 벌인 것처럼 질책이 담긴 음색에 세연의 입가에 띤 미소가 흐려졌다.

“이만하면 된 것 같군요.”

농밀한 기운을 거둔 도하가 딱딱하게 말하자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가 가는 복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었다.

* * *

‘드디어 혼자가 됐네.’

도하와 세연을 몰래 따라붙었던 유세의 입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감히 대표님에게 꼬리를 쳐?’

세연과 도하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봐야 했던 유세는 장기가 뒤틀리는 분노를 견뎌야 했다.

‘진짜로 찔렸으면 좋았을 텐데.’

가드들이 들이닥쳐 미수로 그친 일이 몹시도 아쉬웠다.

조용히 눈빛을 빛낸 유세는 세연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녀가 조심히 들어간 화장실에서는 손 씻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화장실에 손을 씻고 있는 세연과 자신밖에 없자 유세는 준비한 스프레이를 백에서 꺼냈다.

‘정세연! 네가 대표님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장갑을 낀 유세는 만반의 변장을 한 상태였다.

“정세연!”

제 목소리에 반응한 여자가 돌아보자, 뻔뻔한 얼굴에 스프레이를 사정없이 뿌렸다.

“아악!”

꼴좋다.

인체에 무해한 스프레이지만 시뻘건 액체를 뒤집어쓴 저 몰골로는 도하의 앞에 나설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야 저 얼굴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경찰이 개입되어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치밀하게, 신고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내가 느낀 감정을 되갚아 줄 거야.’

은다영의 뒤에 숨은 자신은 도하의 의심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마음 놓고 정세연 이년을 괴롭히기만 하면 된다.

그가 정세연을 오해하도록, 그리고 결국 제 사랑을 받아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도하 씨의 눈에 들려고 몇 년을 지켜봤는데 네깟 년에게 그를 넘겨줄 것 같아!’

도하가 세연을 쳐다보는 눈빛을 상기한 유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는 여자를 노려보고서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남자의 몸체를 맞닥뜨리곤 온몸을 굳혔다.

* * *

몇 분 전.

세연은 저와 같은 키에 같은 옷을 입은 여자를 화장실에서 마주했다.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시고 안에 들어가 계세요.”

도하가 고용한 경호원은 세연과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비슷한 체격과 반묶음의 헤어스타일로 뒤에서 보면 그녀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했다.

[세연 씨의 대역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세연 씨가 해 줄 일은 두 가지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를 보며 웃는 것, 그러고 나서 강 비서를 화장실로 유인하면 됩니다.]

30분간, 도하의 대표실에서 설명 들었던 상황대로였다. 세연은 제일 끝의 칸막이 안으로 몸을 숨겼다.

레스토랑에 있는 이들은 도하가 섭외한 연기자들이었다.

단 한 명, 도하가 초대하지 않은 이가 강 비서였다. 그리고 강 비서의 타깃은.

‘나겠지.’

마음의 준비를 한 세연은 흐트러지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닫힌 칸막이 너머 들리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는 강 비서의 심기를 드러내듯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정세연!”

세연의 귓가에 정확히 꽂힌 목소리는 표독스러웠다.

“아악!”

“…….”

세연은 강 비서가 부리나케 도망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칸막이에서 나와 제 대역을 한 여자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강 비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기함했다.

경호원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붉은 염색이라도 한 듯한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눈 괜찮아요?”

“으, 조금 따끔거리네요.”

“일단 이걸로 눈 주변 닦으세요.”

티슈를 몇 장 뽑아 물로 적셨다.

그것을 처참한 몰골이 된 경호원에게 내밀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섰다. 퇴로가 막힌 강 비서는 다른 경호원에게 붙잡힌 채 변장한 가발이 벗겨지고 있었다.

가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강 비서군요.”

도하는 입술을 사리문 강 비서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

하지만 강 비서의 입은 파르르 떨릴 뿐 열리지 않았다.

“대표님.”

세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강 비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멀쩡한 세연을 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윽고 세연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을 보고는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린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라고 변명도 하지 못할 겁니다.”

도하의 깔끔한 정리를 받아들일 수 없어 강 비서는 사정없이 깨문 입술을 열었다.

“대표님, 아닙니다. 오해가 있어요! 제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에요! 은다영, 그 여자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목이 메어서 말문이 막힌 것처럼 꺽꺽거린 강 비서가 처연하게 고개를 흔들자 도하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예상이 빗나가지 않군요. 그 말을 내가 믿어 줄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토록 저를 쫓아다녀 놓고 자신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모른다라. 자기 좋을 대로만 그를 보고 있던 강 비서의 작태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와요.”

도하의 시선이 닿는 코너에서 은다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패였던 은다영을 본 순간, 강 비서의 얼굴이 낭패로 일그러졌다.

“저는 이용당한 잘못밖에 없어요. 제가 피해자예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대표님! 저 여자가 절 협박한 증거도 있어요!”

강 비서는 되지도 않는 발악을 했다.

그녀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도하의 곁에서 강 비서의 뻔뻔한 실체를 직시하게 된 석호도 더는 그녀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

“은다영 씨.”

은다영을 부르는 음색이 혀끝에서 부드럽게 굴러졌다.

작위적이나 듣는 사람의 정신을 빼놓는 상냥한 목소리에 은다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네. 이도하 대표님…….”

“협조해 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스토커를 잡는 일이 수월해졌어요.”

“그럼…….”

“말씀드렸던 대로 은다영 씨에게 피해 갈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은다영을 끌어들인 데엔 당근과 채찍이 큰 몫을 했다.

석호를 통해서 그가 내건 조건은 은다영의 사생활이 까발려지기 전에 다른 회사를 알아봐 준다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은다영이 그 와중에 도하에게 추파의 미소를 던졌다.

골 빈 여자의 머리는 꽃밭이었다.

강 비서가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은다영을 노려보았다. 이는 도하가 원하는 방향이었다.

도하는 강 비서가 세연에게 가진 증오를 은다영에게 돌리고자 했다.

“더는 날 기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강 비서.”

여지없는 도하의 목소리에 강 비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히 호소했다.

“대표님, 정말 제가 아니에요! 절 좀 믿어 주세요! 이제껏 대표님을 보필하면서 제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나요?”

메아리처럼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외침이었다. 시끄럽기만 한 소리에 도하의 미간 사이가 튀어나올 것처럼 모아졌다.

“그리고 잊으셨어요? 제가 대표님을 구했잖아요! 제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 신고했겠죠.”

도하는 시큰둥하게 강 비서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도하의 무심한 어조가 강 비서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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