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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27)화 (27/70)

27화

‘이러니 강 비서가 대표님께 집착한 거겠지.’

강 비서의 행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사람을 홀리게 하고 그만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내 얼굴 보면 재미있습니까.”

“……!”

들켰다.

“죄송해요. 보려고 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만.”

그거나 저거나, 도하를 보고 있던 건 맞으니 얼결에 자백해 버린 세연이 벌게진 얼굴을 떨궜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섞인 차분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발은 괜찮습니까.”

몸을 간지럽히는 음성에 세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을 심어 주는 눈매가 대답을 기다리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세연은 오른발의 뒤꿈치를 들어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덕분에요.”

문제없다고 직접 보여 주자 도하의 눈매가 선연하게 휘어졌다.

그가 보여 주는 미소에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리나케 단속했다.

애인이 있는 몸인데 다른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반응해서는 안 되었다.

* * *

강 비서를 속이기 위한 작전 실행은 세연이 대표실 문을 여는 순간 시작될 예정이었다.

본격적인 눈속임은 도하가 예약한 호텔에서 이루어지고, 그 전반에 관해 세연은 간략히 전해 들었다.

[세연 씨의 대역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세연 씨가 해 줄 일은 두 가지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를 보며 웃는 것, 그러고 나서 강 비서를 화장실로 유인하면 됩니다.]

몇 사람이 엮이는 상황인지라 실수하면 어쩌지 싶었다. 속내를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 상태를 어찌 알았는지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말해 주었다.

30분을 꽉 채워 대표실을 나온 세연을, 강 비서가 쳐다보면서 빙긋 웃었다.

“세연 씨. 조심해서 들어가요.”

강 비서의 두 눈에서 전운이 감돌았다. 별거 아닌 말이 불안하게 들렸다.

“네. 수고하세요.”

몸속을 저미는 듯한 살기를 마주한 세연은 소름이 돋았지만, 꿋꿋하게 마주 웃어 주곤 돌아섰다.

“정세연.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가다 복도에 서 있는 진형에게 붙잡혔다.

“대표님께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런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말이야…….”

난처한 듯 진형이 말끔하게 올린 이마를 긁적였다.

“시간 되면 전자 PB 상품들 프로모션 정리를 해 줄 수 있을까?”

“월말까지 하면 되는 일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 개인 사정 때문에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거든. 데드라인을 맞추려면 일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진형의 사정은 알겠지만, 세연은 도하와 잡아 둔 약속을 미룰 수 없었다.

“죄송해요. 저도 일이 생겨서 오늘은 무리예요.”

“급한 일이야?”

“네. 취소할 수 없어요.”

“하아. 어쩌지…….”

“죄송해요.”

진형의 한숨이 꽤 커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과의 말이 튀어 나왔다.

“아냐.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다른 팀원한테 부탁해 봐야겠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어, 아. 가족 행사 때문에. 설명하긴 좀 그런데 시간만 잡아먹는 문제가 생겨서 며칠 일찍 들어가 봐야 해. 엇, 민 대리!”

마침 지나가던 동료를 붙잡는 진형을 보면서 세연은 어쩌면 내일 그의 업무를 거들어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오지 않기를 내심 바랐는데.

“알았어. 공짜로 해 줄 순 없고, 다음에 술 사.”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어. 고맙다.”

휴, 바람대로 민 대리가 진형의 일을 가져가자 세연은 속으로 안도하며 부서로 돌아갔다.

* * *

남산타워처럼 랜드마크가 된 CW 호텔.

도하와 호텔 정문에서 마주한 세연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뭉갰다.

그녀는 출근한 그대로인데 그는 대표실에서 본 옷차림과 다른 스타일의 슈트로 갈아입고서 헤어스타일까지 손본 듯했다.

“집에 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급히 몸을 돌린 세연의 팔을 도하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지금 이대로도 아름답습니다.”

의미 없는 말일 텐데도 그녀의 얼굴에 열이 쏠렸다.

‘이건 연기야. 강 비서를 속이기 위한 거라고.’

어딘가에서 그녀와 그를 보고 있을 시선이 의식되었다. 강 비서의 눈이 완전히 뒤집힐 게 예상이 가고도 남아 세연은 작게 몸을 떨었다.

‘응?’

자연스럽게 손을 겹쳐 오는 도하를 따라 걸어가던 세연은 문득 시야에 걸린 남자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진형……, 선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진형이 꽤 예쁘장한 여자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왜 그럽니까.”

진형을 본 게 맞는지 확인하려 세연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와 나란히 걷던 도하가 멈춰 서서 물었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그때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몇 초 되지 않은 사이였다. 진형은 갓 스물을 넘겨 보이는 여자를 보면서 그녀에게는 보인 적 없는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다.

‘가족 행사가 있다고 했지. 이 호텔에서 치르는 건가…….’

언뜻 봐도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다.

친척 동생일 듯싶었다.

“우연치곤 공교롭군요.”

“네?”

우묵하게 팬 듯한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가 이내 입꼬리와 동시에 올라갔다.

“나도 낯익은 얼굴을 봐서 말입니다.”

* * *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라운지 레스토랑은 전면으로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우연치곤 공교롭군요.]

5성급 호텔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다고 한 데엔 다른 까닭이 있는 거겠지.’

그녀와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다분한 단어 선택에 세연은 짐작했다.

‘진형 선배를 봤구나.’

그녀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지만 그는 왜 에둘러댔을까.

“먹어요.”

투명한 글라스에 비친 입술이 야릇한 빛깔을 띠면서 비스듬히 올라갔다.

보는 사람을 휘어잡는 강인한 시선에 아랫배가 뭔가로 가득 찬 듯이 조여들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붙였다.

자신을 응시하며 붉은 와인을 입가에 댄 그가 음미하는 것이 마치 저인 것만 같았다.

혼자만의 착각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입 안의 수분을 달아나게 하는 감각을 통제할 수 없어 마른침을 삼켰다.

은밀한 기류에 갇힌 듯 서로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저 여자는 안 돼요!”

클래식 음악을 밀어내는 외침에 몽롱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꿀꺽.

지금 뭘 한 거지.

한 입도 대지 않은 와인에 취한 기분이었다.

미쳤다.

대단히 미친 거다.

어떻게, 진형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에게 현혹될 수가 있는 건지.

“저예요. 대표님!”

망연한 상상에 사로잡힐 수 없게 하는 육성.

나는, 지금 이도하 대표의 대리 애인이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대표가 아닌 남자로서 세연도 몰랐던 욕망을 깨웠다. 세연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밀어내듯이 불청객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입한 은다영이 작정하고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제가 대표님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고작 저런 여자와 만나게 둘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소동이 일어나자 주변이 정지된 듯 일순 조용해졌다.

“절대로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요!”

은다영의 처절한 외침은 도하에게 닿지 못했다.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그는 은다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니까 내가 오해하지.’

자신 말고는 다른 건 눈에 안 보이는 듯한 도하의 연기력이 과했다.

세연은 자신이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 게 제 잘못은 아니라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너무해요! 어떻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면서…….”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건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나는 대표님을 포기 못 해요! 저런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은다영은 토트백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들었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홀 서버들이 은다영을 만류했지만 칼이 있다 보니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고 있었다.

“뭐 합니까. 미친 여자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던 도하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홀 서버들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저 여자만 없으면!”

냉랭한 시선마저 제게 향하지 않자 은다영은 뾰족한 칼날을 세연에게 겨누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연은 어떻게 된 건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불시에 판판한 등판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기에 청각에만 의지해야 했다.

“아악! 이거 놔!”

실패한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시야를 휘어잡은 뒤태가 방향을 바꿔 너른 가슴팍을 내보였다.

‘안녕?’

반갑게 인사하듯이 널찍한 상판이 가까워지자 세연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보고도 몰라? 치정 싸움이지.”

“손님, 핸드폰 촬영은 안 됩니다.”

“다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라마 촬영 같아. 정말 멋지다. 뭐 하는 사람일까.”

“쉿. 조용히 해 봐.”

몇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외에 몸에 전해지는 촉감은 없었다.

묘한 긴장감이 전신을 압박하자 세연은 내리누르듯이 감은 눈을 슬그머니 치켜떴다.

내쉬려던 숨이 기도로 훅 넘어간다.

도하는 한 손은 테이블을, 다른 손은 세연이 앉은 다이닝 체어 팔걸이를 짚은 채였다. 그녀를 가둔 도하의 얼굴이 그녀의 코끝을 스칠 것만 같았다. 긴장감에 숨을 멈춘 세연과 달리 그는 탁한 숨을 흘리며 집요하게 세연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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