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25)화 (25/70)

25화

역시나 도하였다.

“타세요.”

“괜찮습니다.”

세연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도하에게 고개를 저었다.

“곧 집 근처로 가는 버스가 와요.”

“할 말 있어서 그래요.”

버스 타고 가겠다고 우길 수 없게 하는 단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연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푹신한 좌석에 몸을 기댔다.

“어느 방향입니까.”

“사당역이요.”

차를 출발시킨 도하가 물었다.

“발목 괜찮습니까.”

“네.”

무심코 대답한 세연은 잠시 멈칫한 뒤 도하를 쳐다보았다.

서오가 말한 대로였다. 휴게실 안을 들여다본 모양인지 도하는 그녀가 다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발을 쳐다보느라 아래로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세연의 얼굴에 닿았다.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짧아진 말투 때문인지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제 눈에 박힌 강렬한 시선에 세연은 발목의 통증도 잊어버렸다.

“……정말 괜찮아요.”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춰 오는 도하로 인해 세연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오른발을 뒤로 뺀 상태에서 왼발과 교차하듯이 겹쳤다.

이거 보라며.

“그렇다면야.”

도하가 정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알고도 넘어가 준다는 듯해 세연의 두 뺨이 찬 공기를 오래 맞은 것처럼 붉어졌다.

“저어, 서오에게 들었던 말이 있어요.”

“…….”

“제가 휴게실에 있을 때 대표님도 근처에 계셨다고요…….”

휴게실에 혼자 있었던 게 아니다 보니, 그때 도하가 기척을 내지 않고 발길을 돌린 이유에 관해 세연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랬죠.”

괜히 도하의 눈치를 보게 되는 세연과 달리 그는 생각났다는 듯 무던하게 반응했다.

“제가 다쳤다는 걸 그때 아신 거네요.”

그가 그랬듯이 태연하게 반응하고자 세연은 빙그레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있고.”

나직이 끊는 말이 궁금증을 자아내 세연은 도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보지 않았더라도 모를 수가 없겠더라고요.”

“…….”

“세연 씨가 날 너무 챙겨 줘서 내 귀에까지 들려오지 뭡니까.”

귓가에 닿는 목소리 끝이 비죽 올라가 있었다.

“제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그녀의 느낌이 정확한 듯 정면을 보던 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의미로 불만이라는 겁니다.”

“어떤…….”

“날 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앞으로 그런 일 있거든 무시해요.”

그는 담백하게 말했지만, 듣는 세연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상대해 봤자 세연 씨 기운만 빠집니다. 그치들은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까요.”

귓가를 잔잔하게 파고드는 음성이 한겨울 공기처럼 건조했다.

그리고 속된 말을 구사한 도하의 표정은 시리도록 차가워 보였다.

칭찬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충고하는지도 안다.

저번처럼 그녈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오늘따라 울컥했다.

‘발목이 시큰거려서 그래.’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이다. 그렇게 핑계를 대 보았지만, 세연은 욱하는 감정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세연이 단호하게 말하자 도하가 정방에 둔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시선이 부딪힌다.

“대표님도 은다영 씨가 제게 했던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잖아요.”

세연은 동공이 확장되듯이 색감이 또렷하게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의사를 밝혔다.

그에게 그녀의 마음이 잘 전달되게 또렷이.

“저도 그래요.”

그가 그녀를 걱정한 것처럼 그녀도 그랬노라고.

“아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앞으로 또 그런 일을 마주하게 돼도 나 몰라라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대표님이 절 위해서 그랬듯이요.”

무표정한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녀의 눈을 잡아채듯이 붙잡은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울리는 엔진 소리 외에는 사위가 조용했다. 세연은 괜히 목구멍이 간지러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을 다물 만큼 그 사람들이 무섭지도 않았어요.”

자신의 목소리라도 들려야 숨이 트일 것 같았다. 세연은 야무지게 쥔 양손으로 두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대표님을 욕보이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그에게 동의를 끌어내려 그녀는 ‘의리’에 악센트를 주었다.

“…….”

도하의 단정한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는 생각에 세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의리라…….”

일직선을 이은 입술 라인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하긴 반대였어도 나 역시 그랬을 테죠.”

인정하는 목소리가 밤의 숲처럼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얼핏 혼잣말하는 것처럼 낮게 내려앉은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 세연은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네?”

“세연 씨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면 나도 참지 못했을 거란 소리였어요.”

그녀가 한 말을 그도 한 것뿐인데 심장이 요동쳤다.

차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지럽다.

뚝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선연했다. 세연은 눈을 깜빡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느낌이 떨쳐지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본 어둑한 차창의 밖이 어수선한 마음을 투영하는 듯해 세연은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우리……,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감각에 잠식되지 않으려 내뱉은 말이었다. 그저 허우적거림이었다.

“환장하게.”

공연히 돌아온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나직했다. 

세연은 눈을 깜빡이며 옆을 응시했다.

말실수한 것처럼 그가 섬세한 손가락에 비해 큰 손으로 하관을 가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는 알려 줄 마음이 없는지 입을 막고 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던 걸까.

말해 주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어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입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오늘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서 동의할 수 없군요.”

핸들을 쥐지 않은 다른 손가락이 휠을 두드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부터 떠올려 봐요.”

그와 엮인 다사다난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곤경에 처한 도하를 도운 것부터 시작해 작은 오해로 빚어진 사건까지.

“세연 씨가 모르는 일도 있고.”

“예??”

내가 모르는 일이라니.

점과 점을 잇는 사건의 순서에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이 끼어 있다는 것이 놀라워 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담백하게 웃는 도하가 시야에 들어찬다.

“알고 싶어도 참아요. 비밀이니까.”

그에 관해 알고 싶어도 그녀가 파헤쳐서는 안 될 영역이라는 걸 안다.

그가 말해 줄 때까지는.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도하를 채근할 수 없기에 세연은 입을 닫았다.

정적에 적응될 무렵이었다. 곧추세운 허리를 느슨하게 둔 세연에게 도하가 서근서근한 어조로 물어 왔다.

“어느 방향으로 들어설까요?”

“좌측으로요. 그리고 계속 직진하시면 되세요.”

다 와 가는 동네에 세연은 가로등 불빛 너머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에 살아요. 내릴게요.”

서서히 속도를 줄인 세단이 멈추자 세연은 안전벨트를 풀고 빙그레 웃었다.

“태워 주셔서 편하게 왔어요.”

그녀의 웃음에 그가 입꼬리를 그윽하게 올렸다.

“이거 받아요.”

도하가 검은 봉투를 세연의 품에 안겼다.

“세연 씨가 필요한 것들 사 뒀습니다.”

저를 생각해서 그가 준비했다는 것에 세연은 심장이 콩콩 뛰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가볍게 숙인 고개를 들자 그가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슬쩍 지어 보였다.

“나야말로 고마워요. 오늘도 그렇고요.”

* * *

그렇게 도하와 헤어진 세연이 막 집에 들어설 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으로 기프티콘이 발송되었다.

이 동네에 있는 치킨 매장의 걸로 했으니 오늘 시켜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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