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안도하며 세연이 감사 인사를 전하자 혜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단 유정 씨를 소파에 눕히죠.”
“네.”
세연은 혜선과 힘을 합해 유정을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눕혔다.
“이제 어떡한담.”
왼뺨에 손을 댄 혜선이 곯아떨어진 유정을 난처하게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세연의 두 눈에 카페로 들어오는 이가 보였다.
“서오야!”
“어, 세연아. 팀장님도 계셨네요. 그리고…… 유정이? 유정이 왜 쓰러진 거야?”
세연에게로 다가가다 두 다리를 뻗어 누워 있는 유정을 발견한 서오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홉떠졌다.
“서오 네 도움이 필요해.”
어수룩한 서오가 이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일 때가 있을까. 서오의 양어깨를 짚은 세연은 침착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유정이 잠든 것뿐이야. 알다시피 하루 꼬박 잠 못 자고 수정안에 매달렸잖아. 당직실에 데려가 눕혀 줄 수 있을까?”
“내, 내가?”
“응, 지금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어렵겠나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혜선이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하자 서오가 다부지게 등을 돌려 무릎을 반쯤 굽혔다.
“고마워.”
세연은 혜선과 함께 유정을 부축하여 서오의 등에 업혔다.
“끄응!”
일어서는 서오의 입술에서 약간 힘에 부치는 듯한 숨소리가 났지만 일단은 성공이었다.
다만, 걷는 모양새가 꽤나 불안정해 보여 세연은 혹시 몰라 유정의 두 팔을 서오의 양어깨에 걸치게 하고는 혜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올라가 보겠습니다.”
“안 도와줘도 되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사무실에서 봐요.”
“네.”
걸음을 내딛는 순간, 세연의 눈가가 미약하게 찡그려졌다.
오른쪽 발목이 아릿했다. 균형을 잡느라 하체에 힘을 준 탓인지 발목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오른쪽 다리에 힘을 뺀 세연은 천천히 발을 떼며 걸었다.
* * *
세연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보았던 혜선은 도하의 몫의 커피를 사 가지고 대표실에 들렀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도하에게 커피를 건넨 그녀는 자신이 본 상황을 전했다.
“게임 회사 클로스 사원들인데 그 사장과 친분이 있거든. 자리 마련해서 주의시킬게.”
“놔둬요. 선배.”
혜선은 도하가 몇 안 되게 편하게 지내는 지인이었다.
친조부의 압박에 반항하듯이 TS 그룹과 라이벌인 기업에 입사하면서 혜선과 인연을 쌓았다.
모 기업에 뼈를 묻고자 했으면 경영 전담 부서로 들어갔겠으나 도하는 마케팅 기획팀에 지원했다. 조부의 의지만 꺾으면 퇴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창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혜선의 눈에 도하가 들었다.
혜선은 도하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알아보고 카피라이터로의 능력을 무한히 펼칠 수 있게 서포트해 주었다.
[이도하 너 재능 있어.]
후배가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도 시샘하지 않고 가족들도 반대한 일을 응원해 준 혜선이 없었다면 도하는 미련 없이 한국 땅을 떠났을 것이었다.
도하에게 혜선은 트라우마를 심어 준 친누나보다 가까운 사람이었고, 혜선 또한 열 살 어린 도하를 친동생처럼 진심으로 위해 주고 챙겼다.
조부에게 TS 그룹을 이을 마음이 없다고 시위할 명목으로 설립한 제이온 대표직에 임하면서 둘의 직급은 바뀌었으나, 서로를 향한 신뢰는 변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라도 있어?”
굳은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은 대답에 혜선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남의 말 따윈 신경 안 써요. 다만, 정세연 씨에게 감사 인사는 해야겠죠?”
그러길 바라는 듯한 어조였다. 혜선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게 된 이상 고마움 표시는 하는 게 좋겠지. 모른 체할 수 있는데 널 두둔하다 실랑이로 번진 거니까.”
“뭘 주면 좋을까요?”
“선물이라도 하게?”
혜선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이 도하가 입술을 잠시 다물었다 느릿하게 뗐다.
“그 편이 깔끔하니까요.”
“그럴 것까지야. 고맙다는 말로도 성의는 전해져. 다쳤다고 해도 너 때문은 아니고…….”
“다쳤다고요?”
전해 듣지 못한 말에 도하의 눈동자가 찰나 커지자 혜선은 빠트린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아, 그 사람들이 가고 나서 생긴 일로 좀 다쳤어. 갑자기 쓰러지는 최유정 씨를 붙잡다가 하필 발목이 삔 모양이야.”
큰일이 아닌데도 도하의 딱딱한 표정은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았다.
* * *
‘아으.’
서오에게 유정을 맡기고 세연은 15층에서 내렸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전해져 저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점점 아파지네.’
파스를 뿌리고 싶은데 탕비실에 있나 모르겠다.
“세연아.”
벽을 짚고서 걷는 그녀의 어깨에 진형의 손이 올라왔다.
팔뚝으로 떨어지는 어깨의 곡선대로 쓰다듬는 손길에 세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튕기며 고개를 돌렸다.
세연의 어깨에서 손을 뗀 진형이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너 다리 다쳤어? 걸음이 왜 그래?”
“넘어져서 접질렸어요.”
“왼쪽? 오른쪽?”
“오른쪽이요.”
“많이 아프겠다. 근데 어디로 가려던 거였어?”
“탕비실요. 응급 약품 있어요?”
“글쎄다. 가서 봐야겠는데 부축해 줄까?”
“그래 줄 수 있어요? 걸을 순 있는데 좀 통증이 있어요.”
“내가 너무 야박한 애인으로 보였나 봐. 공과 사는 지키자는 편이지만 아픈 애인을 모른 척할 만큼 몰인정하지 않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 장난쳐 본 거였어.”
분위기가 무겁지 않게 웃은 진형이 세연의 팔을 그의 어깨로 두르게 했다.
그동안 애인인 진형과 스킨십 없이 너무 담백하게 지내서일까. 세연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두르는 손길이 좀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기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좀 더 붙어 봐.”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는 그녀 때문에 자세가 불편한 진형이 뻣뻣한 팔을 그에게로 당겼다.
“이, 렇게요?”
직장 동료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낼 순 없잖아.
생각을 고쳐먹은 세연은 진형이 고쳐 주는 자세대로 이행했다.
“더 가까이. 그래. 그렇게. 이래야 걷기 편하지.”
서로의 몸을 밀착해 진형과 탕비실로 걸음 하게 된 세연은 원형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진형이 다른 의자를 가지고 와 그녀의 다리 앞에 놓았다.
“발 올려 둬. 파스 있나 뒤져 볼게.”
진형이 서랍을 뒤질 동안 세연은 린넨 슬랙스 바지의 밑단을 접어 올렸다.
“있네. 스프레이 파스야.”
진형이 약통을 흔들자 달칵달칵 소리가 났다.
“거의 다 썼나 봐. 일단 뿌려 볼게.”
치익- 차가운 액체가 분사되었지만 조금 나오곤 칙칙 공기가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어떡하지?”
“그래도 조금 시원해졌어요.”
세연이 바지 밑단을 펴는데 진형이 갑작스레 그녀의 오른 다리를 잡아 왔다.
“내가 주물러 줄게.”
“네? 괜찮아요……!”
진형이 종아리를 쥐는 손아귀를 펴지 않자 세연은 잡힌 다리의 무릎을 접어 뒤로 물렸다.
아직은 그녀의 몸을 덥석덥석 만지는 접촉에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세연은 살면서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단순한 호감으로 시작된 첫 연애라 그런지 대개 진형과 이어지는 행위가 어색하고 서툴러서 조심스러웠다.
“싫으면 할 수 없지.”
완고하게 버티는 몸짓에 진형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싫은 게 아니고, 정말 괜찮아서 그래요. 그리고 파스 뿌려져서 선배 손에 묻잖아요.”
“그거야 씻으면 되는 거고. 혼자 일어설 수 있지? 난 분리수거함에 스프레이를 버리고 올게.”
진형이 나가자 슬쩍 안도의 숨을 내쉰 세연은 다리 앞에 있는 원형 의자에 두 손을 짚고서 조심히 일어났다.
살짝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뎌 보자 스프레이의 차가운 느낌 덕분인지 훨씬 걷기 편했다.
“세연아.”
진형이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서오였다.
“너도 커피 마시러 왔어?”
유정을 당직실에 데려다주고 내려온 서오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 아까 발목을 삐었거든. 진형 선배님이 파스 찾아 주셔서 막 뿌린 참이야.”
“어라? 대표님이 아니고?”
“응?”
대표님이 왜 나오는 거지?
“커피 마시려고 왔다가 휴게실 입구에서 대표님을 보았거든.”
“그랬어?”
“응, 업무차 내려왔다가 휴게실에 들렀나 했지. 그냥 지나간 걸, 내가 착각했나 보다.”
* * *
“세연아, 미안해.”
한 시간 잠깐 눈 붙이고 돌아온 유정은 세연이 발목을 다쳤다는 걸 알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이. 인대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조금 삔 것뿐이야. 넌 몸 어때?”
“자고 일어났더니 훨 낫네.”
“퇴근까지 업무 볼 수 있겠어?”
“쓰러졌다고 연약하게 보인다면 나야 좋은데 슬프게도 몸이 말짱하네.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니까.”
쉬지도 못하게 애매하게 컨디션이 안 좋다며 유정이 아쉬워하자 세연은 조그맣게 웃었다. 그러나 겉과는 다르게 세연의 마음은 딴 데로 가 있었다.
‘대표님이 봤을까…….’
보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진형과 있는 모습을 도하가 안 봤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연은 가슴속에 뭉치는 텁텁한 한숨을 슬그머니 내뱉었다.
“후우.”
“안 가?”
퇴근 준비를 5분 전에 끝내 놓았던 진형이 일어서며 세연의 모니터를 곁눈질했다.
“내일까지인 업무 마무리하고 가려고요.”
“무리하지 말고.”
“네. 조심히 가세요.”
PB 브랜드 기획 의도에 따른 아이디어를 다 정리하고 나서야 모니터를 끈 세연은 사옥 정문을 쭉 나서면 보이는 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아직 불편한 발목 때문에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옆에서 쬐는 불빛이 시야를 가리자 세연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버스라고 생각해 일어나는 그녀의 앞에 멈춘 건 외제 차였다.
“정세연 씨.”
반쯤 열려 있는 차창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리자 세연은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