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제가 봤을 때는 세연 씨의 뒤에 메모지가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름 모를 직원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밝혀졌지만 세연은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강 비서의 말만 믿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내가 잘못 본 거라면 합당한 보상 처리를 할 겁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도하의 피지컬은 압도적이었다.
“추후 진실이 가려지면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을 겁니다.”
웃음기 없는 표정과 저음이 주는 압박감에 못 이긴 듯 여자가 허옇게 뜬 얼굴을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연은 이토록 보는 눈들이 많은 상황에서 대범하게 악의를 보이는 여자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게 왜 이런 거죠? 우리 초면이잖아요.”
“흑.”
의심이 가는 점을 지적하자 여자는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그러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걸 보아 쉽게 실토할 것 같지가 않았다.
“말하지 않을 거면 경찰서에 가서 들을 수밖에 없네요.”
“죄송해요.”
진심 같지 않은 사과 한마디를 하고는 입을 다무는 여자의 작태에 세연은 더 화가 났다.
“강 비서.”
그 사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던 도하가 핸드폰 케이스를 닫았다.
“유 비서가 전화를 안 받는군요. 올라가서 출근했는지 확인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줄곧 도하를 주시하고 있던 강 비서가 다소곳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세연은 강 비서를 보낸 도하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이시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세연에게 도하가 강 비서를 떼어 낸 이유를 조용히 알려 주었다.
“보는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는 자백하지 않을 겁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도하가 뭘 원하는지 알아들은 세연은 거짓말이 들통난 여자에게 말했다.
“여긴 서로 불편할 테니 카페로 가요.”
* * *
“죄송합니다.”
“사과는 그만하고, 이유나 말해 줘요. 왜 제게 그랬는지를요.”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고집을 부리자 도하가 서늘히 경고했다.
“이렇게 나오면 당신에게 불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도하가 추궁하자 여자가 고개를 들어 ‘죄송합니다’만 내뱉던 입술을 열었다.
“은다영입니다.”
뭐야, 저 여자. 세연은 저는 무시하면서 도하의 말은 따르는 여자를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은다영 씨.”
“네…….”
“내게 잘못한 게 아닙니다. 처신 똑바로 하세요.”
살벌한 말투에 여자의 어깨가 떨렸다.
“……싫었어요. 볼 때마다 대표님의 곁에 붙어 있는 게.”
세연을 보는 시선에서 반성의 기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거예요?”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마다 둘이 붙어 있었잖아요! 이도하 대표님의 진가를 먼저 발견한 건 저예요! 제 모교에 초청된 대표님을 보고 첫눈에 반했단 말이에요.”
“…….”
“이후로 제이온에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매번 탈락했어요…….”
“…….”
“이번에야말로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면접에서 안타깝게 떨어졌어요…… 같은 공간에서라도 있고 싶어서 관심도 없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는데……. 흑, 당신만 아니었으면 내가 입사해 대표님 곁에 있었을 거예요!”
말하는 게 꼭…….
세연이 도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져 있었다.
세연은 은다영을 다시 보았다. 얼굴 생김새를 제외하면 생머리 하며 작은 체격에 전체적인 몸 선이 호리호리한 강 비서와 언뜻 보기에도 비슷해 보였다.
“날 따라다닌 게 그쪽이었습니까.”
부정하지 않는 여자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며 도하가 일어났다.
“이 여자에게서 더 들을 말이 없으니 나가죠.”
사과할 것 같지가 않아 보여 세연도 미련 없이 일어섰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도하에게 용서를 묻는 그녀의 뻔뻔한 작태에 세연은 눈살을 찡그렸다.
“왜 나를 보는 겁니까. 당신의 처분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자비 없는 말에 은다영이 세연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부탁할게요.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절 신고해 봤자 법적 처분은 할 수 없을 거예요.”
“민사 소송은 할 수 있겠죠.”
“소액으로 끝나고 말 건데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에요.”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잘 알아들었어요.”
길다가 똥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잘 참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어 세연은 빠르게 기분을 털어 낼 수 있었다.
“액땜했다고 칠래요.”
“저 여자는 알아서 좋지 않은 결과를 자초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듯해 세연은 실없이 웃었다.
나만의 편이 생긴 기분이랄까.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도하의 표정에 세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시선에서 기묘한 일렁거림이 전해지는 것 같아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말없이 그와 시선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기가 뜨거워지는 듯해 뺨에 열이 몰리고 있었다.
더운 입김이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순간 그의 입도 벌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언어를 잊은 것처럼 세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연 씨.”
“네? 네.”
얼결에 대답한 세연을 보며 도하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맥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도하의 미간 사이가 일그러졌다.
핸드폰을 확인한 그는 세연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저, 대표님 전화가 온 것 같은데요.”
“후.”
세연이 일러 줘서야 도하가 한숨을 짤막하게 내뱉고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어.”
허물없는 말투 속에 담긴 친근함에 세연은 도하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유 비서님이구나.’
세연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도하가 서슴없이 편안한 말투를 썼다.
“그래. 와.”
통화를 끝낸 도하가 가볍게 내뱉었다.
“여기는 석호한테 맡기죠.”
“해결된 게 아닌가요?”
세연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서 고개를 기울이는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아까와 미묘하게 달라진 듯했다.
몇 초 전에는 침을 꼴깍 삼키게 되는 야릇한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따스하게 다가왔다.
“세연 씨를 노린 저 여자는 날 스토킹한 여자가 아닙니다. 강 비서에게 사주를 받았을 겁니다.”
“은다영 씨와 강유세 씨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걸 파헤친다면 물증을 얻어 낼 수도 있겠네요!”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듯이 도하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피해 갈 수 없도록 자극할 겁니다. 궁지에 몰리면 본색을 드러내겠죠.”
강 비서의 진짜 모습을 밝힐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는 도하의 발언에 세연은 반색하며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알 수 있을까요?”
세연은 도하를 돕는 것을 넘어 자신을 이렇게까지 괴롭힌 강 비서에게 복수하고 싶은 의욕이 샘솟았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할 게 있습니다.”
강 비서에게 당한 만큼 돌려줄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세연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든 말씀하세요.”
그녀가 호기롭게 말하자 그의 입꼬리가 확연하게 올라갔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세연은 기대감보다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내 애인이 되어 줘요.”
* * *
세연은 다소 멍한 상태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세연 씨. 이상한 여자한테 걸렸다면서요?”
그새 이야기가 퍼졌는지 그녀의 주변으로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기획부 직원이 봤나 봐요. 대표님이 카리스마 있게 세연 씨를 노린 여자를 제압했다는 것도요.”
“그 모습을 우리가 봤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당사자인 세연 씨는 어떻겠어요? 세연 씨 그때 두근거렸죠?”
기대하는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세연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벌게진 자신의 얼굴로는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하가 그녀를 위해 나서 줬을 때는 이상하게 흘러간 상황에 치이느라 감동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얼추 정리되고 나니 박동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내 애인이 되어 줘요.]
[네? 애, 애인이요?]
[헷갈리게 말했군요. 하루만. 내 애인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심장에 박힌 말이 뽁 빠져 공기가 푸시식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정신을 차리기가 수월해졌다.
‘거기서 진심으로 놀라면 어쩌자는 거냐고.’
부탁이라고 했는데 고백처럼 받아들였던 자신이 너무 어이없어 세연은 아직도 벌렁벌렁한 심장을 부여잡았다.
거기서 ‘애인 있어서요…….’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세연 씨 얼굴만 봐도 알겠다. 불탄 고구마 같네.”
“……! 이건 그러니까!”
“알아요. 알아. 대표님 보고 안 두근거리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거죠. 정상 반응이니까 아무도 오해 안 해요.”
“하아, 그 훌륭한 얼굴 뒀다 뭐 하시는지.”
세연은 남들도 자신처럼 그에게 두근거린다는 것에 몰래 안도했다. 이제 도하의 사생활로 주제를 옮긴 직원들 사이에서 세연은 슬쩍 빠져나왔다.
석호에게 은다영의 처리를 넘긴 도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메모지를 시리게 쳐다보았다.
세연이 볼 수 없게 구긴 종이엔 근거 없는 비방이 적혀 있었다.
‘남자를 밝히는 여자라니.’
실소가 나올 만큼 어이없어 도하가 싸늘히 웃는데 석호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시인했어. 은다영이라는 여자가 널 오랫동안 미행한 장본인이라고.”
“그래서, 그 말만 믿고 강 비서를 조사하지 않겠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