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퇴근을 앞둔 10분 전.
기획부의 황성수 팀장이 제작부로 넘어와 소리쳤다.
“다들, 스탑!”
슬슬 퇴근하려던 직원들이 다급한 목소리에 아닐 거야……, 하는 표정으로 황성수 팀장을 쳐다보았지만,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이 예상 적중이었다.
“G브랜드 사에서 승인이 떨어진 기획안 다시 수정 요청이 들어왔어요.”
“으아악.”
제작 1팀은 연속 철야로 시달린 결과물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서류를 던지며 괴로워했다.
“같이 수고하자고.”
평상시에도 제때 퇴근을 하지 못하는 비딩 팀이 퀭한 몰골로 파이팅을 외쳤다.
혜선이 산만한 주변을 정리했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회의실로 모여요.”
“흐어어어.”
“그리고 인력 보충 부탁할게요. 제작 2팀. 지원할 분 있나요?”
독수리같이 매서운 혜선의 시선이 한 방향에 꽂히자 제작 2팀 팀원들은 황급히 각자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뭔 날이야.’
퇴근하려던 세연은 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팔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른 광고주에게 시달리는 건 2팀도 마찬가지.
“저도 하겠습니다.”
그러하니 신입인 세연과 서오가 바쁘게 돌아가는 직원들의 일감을 거들어야 했다.
“커피 부탁할게요. 그리고 대표님께 연락해서 현 상황 보고 올리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각된 기획안 Ver1∼7 회사 공용 메일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열 명 인원에 맞춰 뽑아 줘요.”
“예.”
혜선의 지시를 세연과 서오가 받아 바삐 처리했다.
“으어, 내가 자료물 프린트할게.”
“그래.”
세연은 제 키폰을 들어 대표실로 연결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퇴근 시간이라 강 비서가 아닌 석호가 받았다.
“유 비서님. 제작 2팀 정세연입니다.”
-세연 씨. 퇴근 안 하셨네요?
주말에 그 일이 있고 나서 친밀감이 형성되었는지 석호가 반색하자, 세연은 편히 용건을 전했다.
“G브랜드 사 최종 기획안이 수정 요청이 떨어졌습니다. 대표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바로 보고 드릴게요.
용건을 전한 세연은 탕비실에서 인원수대로 커피를 탔다. 그러고 나서 회의실로 향할 때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세연 씨.”
세연이 고개를 돌리자 등 뒤에 서 있는 강 비서가 방긋 웃고 있었다.
“바쁜가 봐요. 제가 좀 들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무겁지도 않은데요.”
어제 변조했던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연은 골똘히 생각했다.
‘무슨 일로 왔지?’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강 비서가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어제 제가 한 일이 걸려서요. 부딪히고도 사과 못 했잖아요. 정말 미안했어요.”
“……사과하시려고 직접 내려오신 건가요?”
“그럼요?”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듯 강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했다는 생각은 바로 했는데 기분 나쁜 일이 있다 보니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어요.”
화를 못 내게 하는 고단수 수법에 세연은 의심쩍은 기분을 접고서 표면적으로는 강 비서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러곤 세연이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그녀의 엉덩이를 퍽 쳤다.
“앗.”
“미안해요!”
눈살을 찌푸린 세연이 뒤돌아보자, 강 비서가 어깨에 멘 백을 자랑하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크로스백 끈이 길다 보니 문제가 생겼네요. 뒤돌다가 세연 씨의 엉덩이를 쳤나봐요.”
“이건 고의로 하신 거 아닌가요?”
“정세연 씨.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물론 기분이 나쁘신 건 이해해요.”
사람 속을 뒤집으려는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붙잡고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상대하지 말자.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강 비서로 인해 시간을 꽤 지체한 세연은 다급히 발길을 돌려 회의실로 향했다.
“처음 기획안이 나은 것 같다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회의실 문을 열자 AE의 말을 듣고 있는 도하가 세연의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기획안과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방향을 원하니 Ver. 1에서 착안점을 찾아야겠군요.”
세연은 도하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도하의 시선이 세연의 얼굴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준 커피를 마신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커피를 건네고는 몇 발자국 걸었을까.
“전화 받고 오죠.”
뒤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울려 세연은 문을 닫지 않고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곧 문을 통과한 그가 회의실 문을 닫더니 빠르게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느닷없이 가까워지는 도하의 기습에 세연의 눈이 커지면서 흔들렸다.
“화장실에 갑시다.”
“네에?”
세연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끔벅였다.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그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정세연 씨 치마 뒤에 뭐가 묻어 있습니다.”
그 말에 얼굴이 홧홧해진 세연은 두 손을 뒤로 넘겨 엉덩이를 짚었다.
하지만 축축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봤지만 당연히 보일 리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확인해 봐요. 내가 뒤를 가려 줄게요.”
다들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퇴근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는 사람이 없어서 세연은 제 뒤를 바짝 붙다시피 한 도하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이런 작태를 보고서 이상하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발 보는 사람이 없기를.’
그리 바랐건만 하필이면 부서를 나오는 서오가 세연과 도하를 발견했다.
“어, 어어엇…….”
서오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빨리 화장실에 가서 확인하는 게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세연은 걸음을 빨리해 눈을 껌뻑이는 서오를 지나쳤다.
그리고 화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도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후딱 인사만 하고 화장실에 냅다 들어간 세연은 벌게진 얼굴로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뒤돌아 고개만 돌리자.
‘이게 뭐야……!’
와인색 스커트라 눈에 띄진 않지만 조금만 유심히 봐도 뭐가 묻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명도가 낮은 얼룩이 엉덩이 주변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도하를 스토킹한 이력만 봐도 정신머리가 이상한 여자였다.
이런 짓을 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얼룩을 지우는 것이 더 급했다.
둥근 얼룩은 그날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연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간단한 손세탁으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빨아 봤자 몇 분 안에 마르지도 않겠고.”
편하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유정은 회의실에 있어서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정세연 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문 너머 들려온 도하의 목소리에 세연의 머리가 굳었다.
“잠시 나와 봐요.”
머리 가동이 잠시 멈춰진 세연은 입술을 깨물며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붙잡았다.
세연은 몸을 낮춘 채로 슬쩍 문을 밀어 시야만 보이는 공간을 확보했다.
“저어, 그게 이건…….”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도하의 표정이 그녀의 사정을 배려하는 듯이 담담했다.
“잠시 뒤로 가 있어요.”
도하를 믿는 세연은 순순히 뒤로 비켰다.
그러자 그가 문을 반쯤 열어 팔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맥코트가 들려 있었다.
“입고 나와요.”
“제가 어떻게…….”
세연은 다시 벌게진 얼굴을 저었다. 누가 봐도 남자 옷이었고, 이게 누구의 것인지는 명확했다.
“그럼 그대로 나올 겁니까.”
그녀의 거부에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다른 방안이 있냐고 묻는 목소리가 언뜻 날카롭게 들렸다.
하지만 선뜻 맥코트를 받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를 목격하게 된 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게?
오해받기 좋은 상황이었다.
“세연 씨의 자리에 가 보니 허리에 묶을 만한 카디건도 없더군요.”
아까 도하는 맥코트를 걸치고 있지 않았었다. 본인의 겉옷을 가지러 대표실로 올라가기 전에 그녀의 자리까지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다른 남자 걸 입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눈빛에 세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팔 아픕니다.”
팔이 아프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그는 뻔뻔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내가 입혀 주길 바라는 겁니까?”
“입어요! 입으려고 했어요.”
바로 실천할 기세에 세연은 도하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팔이 빠져나가자마자 등으로 문을 닫은 세연은 넉넉한 슬리브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무슨 향수를 쓰시지?’
그윽한 향기가 폐부에 새겨진 것처럼 심장이 뻐근했다.
‘비가 오고 난 뒤의 밤공기를 맡는 것 같아.’
킁킁거리고 싶어지는 체향이었다.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세연은 두 손을 모아 코 밑에 소맷단을 대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회의실로 가 있죠. 천천히 나와요.”
세연은 제가 한 짓을 깨닫고서 화들짝 놀랐다. 숙였던 고개를 급히 들다 뒤통수를 문에 부딪혔다.
“으으.”
“무슨 소리입니까.”
꽤 크게 울린 소리를 듣고서 걸음을 돌린 도하가 문 앞에서 기척을 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를 보기가 부끄러운 세연은 얼얼한 머리를 쓰다듬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조심히 나와요.”
“네에…….”
세연은 간신히 차린 정신을 부여잡고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도하의 장신이 훤칠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크다니.
그의 몸에 파묻힌 기분이라 세연은 코트를 벗어 허리에 둘렀다.
하지만 모양새가 더 이상했다.
도로 코트를 걸친 세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 부서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연이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
‘감히 도하 씨의 옷을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