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9)화 (19/70)

19화

“카피라이터 정세연입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신입이군요. 제가 며칠 일이 있어 못 나온 관계로 처음 뵙네요. 이도하 대표님을 보좌하고 있어요. 대표실에서 뵐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이렇게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해요.”

선입견 때문인지 말 속에도 가시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곱게 들리지 않는 인사말에 세연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세연에게 관심을 끈 듯 강 비서가 도하에게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송파구로 가시나요?”

“오늘은 본가에 들를 예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도중에 절 내려 주실 수 없을까요?”

“미안하지만 피해가 갈 수 있어 동행은 무리입니다.”

“네? 피해요?”

“이상한 여자가 날 미행하고 있습니다. 나와 있는 모습을 보이면 강 비서를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스토커가 자신이라는 걸 밝힐 수 없는 강 비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져 있자 세연은 내심 통쾌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세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먼저 세연이, 그 뒤를 이어 강 비서가 내렸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별말 없이 고개를 까닥인 도하를 보고서 세연은 발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강 비서는 세연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꽤 아픈 타격감에 세연의 눈살이 구겨졌다.

사과하지 않고 모른 척 앞서가는 강 비서의 행동을 본 세연의 생각이 깊어졌다.

‘왜 날 견제하는 거지?’

그녀를 쫓던 사람이 나라는 걸 안 게 아닐까.

하지만 세연은 강 비서를 붙잡고 뭐라 따지지 못했다.

의심할 여지가 있도록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아린 어깨를 문지르며 건물을 나오자 날이 저물어 밤기운이 싸늘했다.

세연은 카디건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정류소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으려는데 두 불빛이 눈가를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버스가 오고 있었다.

세연은 제 앞에 멈춘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몇 초 후 거리로 나온 한 사람.

세연이 탄 버스가 따라잡을 수 없게 멀어지자 도하는 고요히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렸다.

* * *

주말은 화창했다.

더운 오후를 피해 세연은 일찍이 아침 조깅을 하러 나왔다.

버스를 타고 회사 근처 호수 공원을 찾았다.

호수는 청명한 하늘이 드리우는 햇살로 인해 윤슬이 반짝거렸다.

눈요기할 것이 근방에 천지라, 이곳에서의 운동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연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조경 길로 달렸다. 한 바퀴를 다 돌자 이마에 기분 좋은 땀이 맺혔다.

“세연 씨.”

세연은 순간 옆 시야를 꿰어 찬 사람을 보고 놀라 멈춰 섰다.

“유 비서님?”

“우연히 만나니 더 반갑네요.”

“그러게요. 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집이 멀지는 않은데 머리 비울 겸 호텔에서 잤다가 운동하러 나왔어요.”

보면 볼수록 좋은 사람 같았다.

넉살 좋은 석호가 불편하지 않게 말을 걸자 세연은 그와 발 맞춰 걸었다.

“휴.”

틈틈이 말을 거는 사이사이 석호는 근심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민이 있으신가요?”

침울한 표정을 힐긋거리길 몇 번, 세연은 석호가 한숨을 열 번째 내쉬었을 때 물었다.

그러자 석호가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그게, 네.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거든요…….”

그게 뭔지 물어봐 달라고 하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본다.

“어떤 고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요.”

몇 마디로 종지부가 날 주제가 아닌지라 세연은 옆으로 몇 걸음 걸으면 보이는 빈 벤치로 가서 앉았다.

석호도 벤치의 끝자리에 앉았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어색하게 웃었다.

먼저 세연의 입이 열렸다.

“왜 이루어질 수가 없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제 친구를 좋아하는 여자거든요.”

‘친구의 여자를 사랑했네.’ 라는 가사가 떠올랐다. 석호를 보는 세연의 시선이 짠해졌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하셔야겠네요. 친구든 친구분의 애인이든.”

“실은 친구의 애인은 아니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친구를 사랑하는 쪽이에요.”

“그런 거라면 가능성 없지 않잖아요! 여성분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면 되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구는 것보다는 현실적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뭐가 걸려서 그래요?”

“음, 세연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석호가 비장하게 말하자 세연은 긴장감에 굳은 얼굴을 끄덕였다.

“네. 들을 준비가 됐어요.”

“도하한테 관련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었는데, 엊그제 도하와 같이 있었다면서요.”

“네. 그래서 대표님을 스토킹한 사람이 석호 씨와 같은 비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설명하기가 쉽겠네요. 제 짝사랑 상대가 바로 그 비서예요.”

“네, 네?! 그게 정말인가요?”

세연의 입과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그렇게 되었네요…….”

쓰게 웃는 석호를 보면서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뗐다.

“그, 이렇게 될 줄 모르셨잖아요. 석호 씨 잘못 아니에요.”

위로가 되었을까, 석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하늘처럼 청명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세연 씨는 정말 좋은 분이네요.”

흔한 칭찬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과 학우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넌 착하다. 라는 말을 들어 온 세연은 입에 발린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야 뭣도 모르고 기뻐했지만 특출난 게 없는 그녀에게 건성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부터는 썩.

하지만 석호가 하는 말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 내뱉은 빈말이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였다.

“석호 씨도 좋은 사람인걸요.”

세연이 빙긋 웃자 석호가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좋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약간 까무잡잡한 귓가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금 세연과 시선을 맞댄 석호가 남은 속내도 털어놓았다.

“그렇다 보니 미련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강유세 씨의 실체를 보는 게……, 두렵다고 할까.”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이기 싫은 듯 고개를 숙이는 석호를 보면서 세연은 진중하게 말을 골라 물었다.

“강유세 씨가 왜 좋으세요?”

“어…… 상, 상냥해서요?”

이런 질문을 들을지 몰랐는지 석호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가 이내 확신이 어린 어조로 다시 말했다.

“상냥한 모습에서 끌렸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요?”

“……도하를 도와주었었고 또 시답잖은 제 농담에도 웃어 준다든가……, 하.”

말하면서 좁아진 그의 미간을 석호가 거칠게 문질렀다.

“내가 강유세 씨를 좋아하게 된 모습이 거짓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네요. 사랑한다면 본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그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난 그렇게 포용력이 넓은 남자가 아닌가 봐요. 더군다나 스토커라니……, 그건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요?”

“석호 씨는 이미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세연은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확신을 더해 주었다.

“강유세 씨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고 석호 씨 자신의 탓으로 몰고 있잖아요.”

석호의 굳었던 표정이 빠르게 풀어졌다.

“날 좋게 봐 주는 말에 힘이 나네요.”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석호가 일어나 세연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어요. 강유세 씨를 좋아하는 마음이 정리된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려고요. 고마워요. 세연 씨.”

“마땅히 감사 인사 받을게요.”

“네? 하하.”

홀가분한 웃음소리가 명쾌했다.

“시간 빼앗은 몫까지 추후에 보답하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볼게요.”

“네. 석호 씨도 주말 잘 보내세요.”

마음을 굳힌 석호가 빠르게 벤치 뒤에 난 징검다리를 밟았다.

그리고 세연은 깍지를 낀 두 손을 길게 위로 뻗으면서 일어났다.

“다시 시작해 볼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달리 석호의 사정을 생각하니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슬며시 떠오른 미소를 지운 세연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 * *

월요일 아침.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세연은 회사 로비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에 의해 떠밀린 세연은 앞으로 쏠려 휘청거렸다.

딱딱한 벽에 부딪히기 전 다급히 팔로 지탱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얼굴을 받을 뻔했다. 세연은 저를 민 여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어디 다친 곳 없나요?”

타 회사 여직원이 눈썹과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사과하자 세연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고의로 한 것도 아니고.

“네. 부딪힌 곳 없어요.”

그 말에 여자가 깊게 안도하며 다시금 사과하고는 옆 엘리베이터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비켜요.”

점심을 먹고 유정과 로비를 걷는 중이었다. 뭐가 급한지 뛰어가는 여직원과 세연이 부딪혔다.

“조심해!”

유정이 팔을 붙잡아 준 덕분에 세연은 사람들이 많은 로비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후아. 고마워.”

유정이 사과 없이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여자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저 여자 뭐야! 가다가 확! 넘어져라.”

“우리 회사 사람 아니었던 것 같지?”

“얼굴 못 봐서 모르겠지만 목소리론 아닌 것 같았어.”

아침의 일이 생각난 세연은 미간을 좁혔다.

“오늘 일진이 안 좋네.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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