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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8)화 (18/70)

18화

부끄러워서 진형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는 세연은 속으로 광광 울었다.

그래도 도하의 비밀을 지켰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린 세연은 고개를 위로 꺾어 위층을 응시했다.

‘괜찮으시려나?’

출근한 비서와 만났을 그가 걱정되었다.

* * *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해.”

한편, 석호는 도하가 말한 진실을 믿기 어려워 부정하고 있었다.

비교적 쉽게 도청기를 설치할 수 있는 강 비서가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도하가 폐소 공포증과 유사한 불안 증상을 보인 시초의 사건 때문이었다.

도하가 대기업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의식을 잃은 도하를 발견한 최초의 신고자가 강 비서였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시기라 도하가 과로로 쓰러졌다고만 알고 있는 강 비서는 그날의 일을 사람들에게 퍼트리지 않았다.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와 보상은 넉넉히 했고, 제이온을 차린 후 비서로서 지원한 강 비서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유세 씨가 도하를 스토킹 한 여자라고?’

웃을 때도 소리 없이 조용히 미소 짓는 강 비서와 음침한 짓을 저지른 스토커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석호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 *

도하는 믿기 힘들어하는 석호에게 사건의 전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15층 편집실 복도 CCTV에 찍힌 여자는 강 비서였어. 영상을 USB로 옮겨 놨으니까 확인해 봐.”

도하가 건넨 USB를 쥔 석호는 아직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심증은 90%야. 물론 100%란 없으니 강 비서가 아닐 수도 있어.”

도하가 제이온을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에 강 비서가 입사했다.

누군가 저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전부터 묘한 느낌을 받아 왔었다.

사방에 눈이 달린 듯한 꺼림칙한 기분.

하지만 도하는 그것을 기분 탓을 넘어 외상 후 스트레스로 연결 지었다.

그러던 차에 도청기가 우연히 발견되어 스토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자마자 마치 자신을 더 알아봐 달라는 듯이 그의 집으로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박스를 보낸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행위로 존재감을 뚜렷하게 밝혔다.

그동안은 스토커가 제 존재를 감춰 왔던 것이라는 게 느껴져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네가 알아봐. 아니라는 증거도 좋아. 강 비서의 행적 그리고 이력을 모조리 파헤쳐.”

“……알겠어.”

“표정 관리 잘 해.”

“나는, 너처럼…… 됐다. 말해 뭐 해.”

멍한 정신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석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하, 잠시만 숨 돌리고 나갈게.”

데스크로 돌아간 도하는 석호가 마음을 진정시키길 조용히 기다렸다.

“간다…….”

그리고 몇 분 후 석호가 비척거리며 대표실을 나섰다.

석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제거된 것이 아니기에 도하는 핏줄이 돋은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저 문을 열어 강 비서를 몰아세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줄 뿐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비서였다.

“저런 여자한테 일을 맡겼다니.”

치명적인 불찰이었다.

그를 음습하게 지켜본 여자가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자 도청 장치가 없음을 일일이 확인했는데도 엘리베이터에 탄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답답함을 못 참고 도하는 집무실 문을 반쯤 열었다.

어디로 갔는지 석호는 자리에 없었고, 도하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강 비서는 타자를 치고 있었다.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강 비서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 석호의 빈자리를 확인하고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보니 사실을 밝힌 입 안이 썼다.

* * *

진형의 일이 조금 남아 있어 같이 퇴근하지 못했다. 세연은 회사와 좀 떨어진 카페에서 진형을 만나기로 했다.

진형을 한 시간째 기다린 세연은 먼저 식당에 들어가 있으라는 메시지를 받고서 미리 봐 둔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답장을 보낸 후, 빈 테이블에 착석했다.

몇 분 뒤에 도착한 진형이 넥타이를 풀어서 옆 의자에 놔두었다.

“휴, 술 마셔도 될까?”

“많이 마시지 않으면요. 소주 시킬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이모님. 낙곱새 2인분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계란찜도 추가요.”

주문한 메뉴가 나올 동안, 세연은 무심히 지나친 일을 다시금 사과했다.

“어젠 죄송했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화장실 말고 다른 핑곗거리는 생각나지 않았던 세연의 얼굴이 벌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날 내팽개치고 갔나 싶었는데, 오해 풀렸으니까 그만 눈치 봐. 나 정말 아무렇지 않아.”

그사이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너도 마실래?”

진형이 소주병을 가볍게 흔들자 세연은 소주잔을 내밀었다.

진형이 키들거리며 소주잔에 맑은 이슬을 채웠다. 그러고서 그의 잔을 채운 진형이 쾌활하게 술을 비웠다.

“햐, 살 것 같다.”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세연은 잔을 비우자마자 술기운이 확 올라오는 듯했다.

그녀의 볼이 벌게진 것을 본 진형이 음울한 목소리로 설토했다.

“요새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어제 감정 조절이 안 됐어. 내가 잡은 손목 괜찮아?”

“네. 손자국도 없잖아요.”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진형이 어둑한 표정으로 술을 다시 마셔 대자 세연은 집안에 우환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 조심히 물었다.

“선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말에 진형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 있잖아요. 말해 봐요.”

세연이 진형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진형이 테이블에 팔을 대어 머리를 기대고선 세연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 들었어.”

“뭘요?”

“대표와 네가 나눴던 대화 말이야…….”

“대표님과요?!”

세연의 심장이 격하게 흔들거렸다.

도하와 그녀가 나눈 말들이 원체 많지 않았던가.

“스크립트 준비 중일 때 내 피드백을 받았잖아. 근데 왜 내 도움 받지 않았다고 했어?”

“아, 그거요.”

“그래. 그거. 내 조언이 도움 못 되었다는 것에 자격지심이 들었어. 서운하기도 했고…… 암튼 그렇다고.”

끝까지 못 들었구나, 앞 내용만 들었으면 섭섭했을 진형의 마음이 이해되어 세연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나쁜 마음으로 그런 말 한 게 아니었어요.”

“알아. 날 비하하려던 건 아니었겠지. 그도 그럴 게 대표에게 내가 부족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잖아.”

“선배에 비하면 제가 한참 배울 것도 많고 부족한데 왜 선배를 흠잡겠어요. 그리고 제 남자 친구잖아요.”

세연의 말에 진형이 히죽 웃었다.

“그렇지. 내 애인이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응어리진 기분이 다 풀렸는지 진형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저번처럼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 언제든지 봐 줄게.”

“네. 그럴게요.”

“이 오빠만 믿어.”

빈말이라도 고마워 세연은 빙그레 웃으며 진형과 알아 가는 과정을 위해 한 보 전진했다.

“선배. 생일은 언제예요?”

“내 생일 몰라?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

“알려 주면 잊지 않고 기억할게요.”

“나는 가을 남자지. 9월 11일! 잊지 마.”

“저장해 둘게요.”

세연은 진형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볍게 웃었다.

이러면서 서로에게 정이 들고 적응되는 거겠지.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마신 진형은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가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식당을 나갔다.

“술값이요.”

세연이 계산하고 나오자 미리 불러 둔 택시에 진형이 타고 있었다.

“선배, 잘 가요.”

“어? 너는?”

“전 술 깨게 걸어가려고요.”

“그래, 조심히 들어 가.”

택시가 샛길을 빠져나가자 세연은 천천히 정류소를 향해 걸었다. 도착한 버스에 오르니 눈꺼풀이 감길 것 같았다. 차가운 창문에 얼굴을 대고 눈을 부릅떴다.

* * *

다음 날.

늦게 자서인지 몸이 뻐근했다.

그 와중에 세연은 작은 실수까지 해 버려 수습하느라 늦게 퇴근하고야 말았다.

‘빨리 가서 자고 싶다아.’

아우성치는 피로감에 세연은 다소 멍한 정신으로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혼미한 정신이 번쩍 든 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였다.

진즉 세연을 알아본 도하가 날카로운 눈꼬리를 유하게 휘었다.

“대,”

엘리베이터에 도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챈 세연은 급히 입을 오므렸다.

도하의 옆 측 모서리에 서 있는 생머리의 여자.

보호 본능을 일으키게 호리호리한 몸매인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저 사람이……!’

깨달음이 온몸을 강타했다.

순간 놀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세연은 부단히도 노력하며 도하의 앞에 섰다.

시야에 들어찬 도하만 보여 순간 그의 비서이자 스토커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세연은 제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는 여자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퇴근하는 겁니까.”

도하가 부러 말을 걸어 준 덕분에 세연은 은근슬쩍 그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네.”

원래의 톤보다 높게 올려 변조한 목소리로 대답한 세연은 자신을 쳐다보는 비서를 응시했다.

“서로 인사해요.”

도하가 차분한 음성으로 강 비서를 소개했다.

“내 비서, 강유세 씨입니다.”

그러자 강 비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청순형의 여자는 단아하게 예뻤으나, 그 안에 든 본성을 알기에 결코 미소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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