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7)화 (17/70)

17화

“목소리 낮춰.”

“업!”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덮은 석호가 침을 삼키고는 말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알아낸 건데? 어디에 사는 누구야?”

“강 비서.”

“……하필이면 강, 잠깐, 몇 분 전에 내가 인사했던 강유세 씨?!”

닫힌 문을 돌아보며 재깍 입을 다문 석호가 허리를 앞으로 쭉 빼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유, 유세 씨가 정말로??”

“그래.”

도하의 담담한 목소리에 석호는 얼이 빠졌다.

강 비서는 석호의 짝사랑 상대였다.

* * *

‘흐아아.’

세연은 데스크에 이마를 기대어 엎어졌다.

‘대표님은 숨찬 기색 없이 올라가시던데.’

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던 세연의 얼굴은 군고구마처럼 벌게져 있었다.

괜히 그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카라 카디건을 벗고 있으니 시원하기는 하지만 채 갈무리되지 않은 호흡에 세연은 끄으 소리를 내며 다리를 주물럭거렸다.

풀어 주지 않으면 알이 밸 것 같았다.

아파도 종아리를 열심히 지압해 주고 있는데 여유로운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

고개만 돌려 밖과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 부스를 확인하자 혜선이 들어오고 있었다.

세연은 데스크 아래에 벗어 둔 단화를 얼른 신고서 일어났다.

“팀장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혜선이 기척을 낸 세연을 보곤 살짝 커진 눈을 깜빡였다.

“세연 씨.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요?”

“어쩌다 보니 일찍 눈이 떠져서요. 팀장님은 이 시간에 출근하세요?”

“젊었을 때부터 루틴이 잡혀 있어서요. 알람 맞추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게 되네요.”

차분하게 안으로 말려 있는 단발을 한 혜선이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브라운 헤어 컬러와 매칭 되는 색조 메이크업을 하고 캐주얼 정장을 입은 혜선은 30대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40대였다.

세연은 보이는 것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한 혜선이 존경스러웠다.

옷차림 매뉴얼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매일 출근할 때 뭐 입을지가 걱정인데 혜선은 그런 고민 없이 걸치는 옷을 자기 스타일로 소화했다.

“그런데 얼굴이 벌겋네요?”

“조금 더워서요.”

세연이 손바닥으로 열이 식지 않은 뺨을 부채질하자 혜선이 벽에 부착된 에어컨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곧 시원해질 거예요. 더우면 에어컨 틀고 있어요.”

“네. 그러겠습니다.”

세연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선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혜선의 미소에 세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혜선은 당당하고 나이가 무색하게 아름다웠다.

롤 모델인 혜선이 데스크를 정리하기 시작하자, 세연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물티슈로 자기 책상을 닦았다.

크게 어지른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정리하니 시간이 꽤 걸렸다.

“으으.”

제 주변만 치울 수 없어 세연은 눈에 뜨이는 쓰레기들을 모아 복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한쪽 팔을 벽에 짚고서 뭉친 다리를 툭툭 쳤다.

“굽 있는 걸 신고 왔으면 발뒤꿈치 다 까졌겠다.”

단화 신은 내 자신을 칭찬한다.

“세연아. 안녕.”

세연은 숙인 허리를 펴고 돌아보았다.

백팩을 멘 서오가 어색하게 손을 들면서 알은체했다.

“쥐 났어?”

아직은 반말이 어색한지 말투가 빳빳했다. 숫기 없는 서오는 척 봐도 막내과라 괜히 놀려 주고 싶게 생겼다.

“내가 불편해?”

“아아니!!”

“그래?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세연은 시무룩하게 얼굴을 떨구곤 중얼거렸다.

“전혀 아니야! 그, 내가 여자 사람에게 면역이 없다 보니까 그런 거야. 믿어 줘! 정말이야!”

여자 사람이 뭐야. 웃음을 참으며 세연은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난처해하는 서오가 보여 결국 푸흐, 하고 웃음보가 터졌다.

“알았어.”

그 웃음소리를 들은 서오가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놀린 거였어?”

“응.”

세연은 쌈박하게 대답했다.

“진심인 줄 알고 진짜 당황했잖아!”

“이제야 말투가 편해졌네.”

“어. 그, 렇네.”

세연이 노린 수에 넘어간 서오가 어리벙벙하게 수긍했다.

‘서오 같은 남동생이 있다면 재미있을 텐데.’

외동이라서 외로울 때가 있었던 세연은 동갑인 서오의 행동이 마냥 귀여웠다.

“들어가자.”

“어어…….”

같은 제작 2팀이라 자리 배치도 가까웠다. 세연은 서오의 책상을 보곤 감탄했다.

“깨끗하게 쓰네.”

“군대에서 습관이 들어서 말이야. 정리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집중도 안 되고 불안해.”

“아, 군대.”

그녀의 아빠도 집 안이 어질러지는 걸 두고 보지 못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는 말이 ‘여기가 군대였다면 말이야.’로 시작되었다.

물티슈를 한 장 꺼낸 서오가 먼지도 안 나올 것 같은 책상을 열심히 닦아 냈다.

“그래서 오자마자 닦아.”

“어, 그래. 수고해.”

세연은 남은 시간 동안 그간 바빠서 읽지 못한 웹소설을 보기로 했다.

《나쁜 상사를 길들이는 법》

잘생기고 뭐든 퍼펙트한 남주 묘사를 읽고 있자니 애인인 진형보다 도하가 떠올랐다.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스펙이나 외모가 뛰어나서 생각나는 것일 거다.

세연은 계단에 올라갔을 때 본 도하의 훤칠한 뒤태를 자신도 모르게 떠올렸다.

4층까지는 그나마 도하의 속도에 맞출 수 있었는데 5층부터는 그의 뒤를 따르는 신세가 되었다.

앞서가는 도하의 듬직한 등판에 눈길이 절로 갔지만 이내 핑글핑글 돌기 시작하는 시야와 바들바들 떨리는 두 다리 때문에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보았으니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었다.

세연은 웹소설의 남주처럼 완벽한 도하의 뒷맵시를 떠올리고는 볼을 붉게 물들였다.

“야호!”

“흐앗.”

“리액션 굿!”

세연이 화들짝 놀라며 귀를 막곤 옆을 보자 유정이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친해지고 나니 유정은 격 없는 장난을 치곤 했다.

너도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세연은 유정의 허리를 찔렀다.

“깨하하하! 야우. 나 간지럼 잘 탄단 말이야.”

“난 네 웃음소리에 또 한 번 놀랐어! 다들 우리 쳐다보잖아.”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뭐 어때!”

유정이 활기차게 씩 웃자 세연은 그만 유정의 발랄한 폭소가 뒤늦게 떠올라 주체 못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자 유정이 물어 왔다.

“뭐 읽고 있었어?”

“로맨스 소설.”

“그걸 왜 봐. 알콩달콩한 연애 하고 있는 얘가.”

“어음.”

“반응이 왜 그래?”

유정이 낌새를 눈치채곤 속닥거렸다.

“왜, 연애 전선에 문제가 생겼어?”

“싸운 건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데이트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달달한 연애가 뭔지 잘 모르겠어.”

“……데이트를 안 했다고? 리얼? 사귀는 거 맞아?”

“바쁘잖아. 그런 데다가 선배한테 개인 사정이 생겨서 캔슬 되고, 암튼 그렇다 보니 회사에서 얼굴 보는 게 다야.”

“암만 그래도…… 구진형 씨가 아무래도 널…….”

“응?”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튼 사귄 지가 언제인데 데이트 한 번 못 해 본 건 아니지.”

“그렇게 이상해? 손은 잡아 봤는데.”

“쌔쌔쌔만 한 게 자랑이다.”

쌔쌔쌔…….

“뭔 연인이 회사에서만 보는 게 말이 돼? 밖에서 봐야 정들고 사랑이 샘솟지. 추억도 생기고! 오늘 저녁 같이 하자고 그래.”

유정의 박력에 밀려 세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점심 때 확인할 거야.”

파이팅! 유정의 응원에 힘을 입은 세연은 진형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진형 선배는 오늘 늦게 오네.’

정시 출근까지 5분 남았다. 그런데도 빈자리인 진형의 데스크를 훑던 세연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아차! 어제!’

도하의 사정에 엮이다 보니 진형과의 일을 잊고 있었던 세연은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화가 나 있어 보이던데……!’

무슨 일인지 이야기도 못 들어 주고! 그러고도 애인이니.

진형을 소홀히 여긴 것 같아 세연은 반성했다.

‘좋아하는 거라도 사 주면서 말을 트자.’

하지만 진형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를 깨달은 세연의 눈가가 자잘하게 떨렸다.

대학교 때야 관심이 없다 보니 몰랐다 쳐도, 연애하는 기본자세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생일은 언제지?’

헛! 세연은 문득 어제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생일이었던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한다고 속으로 외치는 중에 세연의 옆 의자가 뒤로 움직였다.

“선배님.”

냉큼 시선을 돌리자 진형의 표정은 의외로 밝아 보였다.

“세연 씨.”

“예.”

“휴게실로 와 줄래요?”

고개를 끄덕인 세연은 진형을 따라나서 휴게실로 이동했다.

탕비실과 이어진 휴게실은 각 층마다 있는데 아침이라 아무도 없었다.

이를 확인한 진형이 말을 놓았다.

“세연아. 저녁에 시간 있어?”

“그럼요. 시간 돼요.”

“드디어 시간 맞아서 다행이네. 오늘 저녁 같이 할래?”

“좋아요.”

세연이 흔쾌히 응하자 진형이 심사숙고하듯이 입을 다물다가 느리게 뗐다.

“물어볼 게 있는데.”

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형이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한 세연은 마음 준비를 마친 말을 꺼냈다.

“아, 그게, 배가, 아파서요…….”

사실대로 말하려면 도하의 사정을 짧게나마 설명해야 하는데 그럴 수야 없는 세연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생리적인 현상으로 얼버무렸다.

“그, 그럴 수도 있지…… 많이 급했나 봐.”

“네에.”

흑흑. 이 연애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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