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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6)화 (16/70)

16화

스토커가 그렇게 가까이에 있다니.

그녀의 놀람은 도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잠은 주무셨을까.’

딱히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도하와 헤어진 세연은 다음날 이른 시각에 회사로 출발했다.

8시도 되지 않아 드높은 사옥으로 들어선 세연의 두 눈이 한 곳에 멈추었다.

한산한 로비를 지나가는 도하를 본 것이다.

세연은 혹시라도 도하의 곁에 수상한 사람이 있나 눈을 부릅뜨곤 주변을 경계했다.

오늘도 계단을 이용할 듯 도하의 걸음은 엘리베이터 역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하부터 올라오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건가.’

짬짬이 시간 내서 운동한다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저번의 일로 엘리베이터를 못 타시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생각하는 사이에 그는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인사해도 되겠지.’

도하를 놓칠세라 세연은 다급하게 비상구로 들어간 그를 쫓았다.

“대표……!”

찰나 그녀의 손목이 휙 잡히더니 몸이 벽 쪽으로 밀쳐졌다.

단단한 면에 등이 아프게 부딪혀 세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세연의 얼굴에 바싹 붙은 사나운 얼굴이 그녀를 확인하곤 확연하게 눈이 커졌다.

놀란 듯한 도하가 자신이 붙잡은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내 그의 시선이 숨결이 겹치게 붙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깨달은 얼굴.

순식간에 닿은 부위를 떨어트린 도하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녀를 스토커로 착각한 모양이다. 한숨도 자지 못한 기색이 드러나는 눈 밑을 그가 큰 손으로 쓸어내렸다.

“머리, 괜찮습니까.”

벽에 부딪힌 소리가 꽤 크게 났던지라 도하는 세연의 머리에 시선을 두었다.

세연은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면서 방긋 웃었다.

“그렇게 아프지 않네요.”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는 믿지 못하는 듯 인상을 쓰곤 거리를 좁혔다.

“어디 봅시다.”

“네? 어디를요?”

“내 두 눈으로 살펴봐야 안심될 것 같습니다.”

세연은 음, 짧게 고민하다 머리를 숙였다.

“정말, 괜찮죠?”

머리를 감고 와서 다행이야.

도하의 시선이 세연의 머리를 훑고서 느릿하게 떨어졌다.

“나중에라도 이상 생기면 말해야 합니다.”

“네,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 진단서 뗄게요.”

키득, 웃으며 그녀가 낮춘 허리를 폈다.

도하에게서 전해지는 날 선 분위기가 부드럽게 걷혀 있자 말을 붙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보디가드 해 드릴까요?”

그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

그러자 간파하기 힘든 시선이 닿았다.

‘미운털이 박혔다고 생각했을 때라면 대표님이 날 못마땅하게 여기는 줄로만 알았을 거야.’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차가운 인상을 강인하게 비쳐 주는 눈매는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저절로 몸이 움찔거리게 되는 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누가 누굴 지키겠다는 건지.”

그녀의 몸을 내리훑는 그의 시선에서 전혀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불순한 목적 없이 지적하는 눈빛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어떻게 날 지키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세연은 평균 여성의 키였다.

엄마를 닮아 뼈대가 얇아서 그렇지 50kg 조금 넘는다.

살을 빼라던 진형과 다르게 도하가 자신을 가녀린 여자로 봐 주자 세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덮쳤을 때 꼼짝도 못 해서, 그다지 신용이 안 가는군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에 세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거야……, 대표님이 너무…….”

가늘게 늘어지는 세연의 시선이 도하의 다부진 몸에 가 있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내가 너무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대표님이 저보다 힘이 좋으시니까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그의 시선이 그녀가 보고 있는 그의 가슴팍에 슬쩍 닿았다.

그리고 픽, 하고 맺힌 웃음소리가 비상구를 울렸다.

그녀의 귓가가 벌게졌다.

저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도하에게 들킨 세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려던 말을 이었다.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어요! 그리고 누가 오는지 알 수 있고요.”

방범 카메라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것이다. 

슬쩍 올라간 입가를 손으로 덮은 그가 계단이 층층이 늘어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괜한 참견이라고 말하는 듯해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웃음기가 담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맡겨 보도록 하죠.”

* * *

[네!]

자신 있게 대답하던 목소리가 이명처럼 가시지 않았다.

15층에서 세연과 헤어진 도하는 제 뒤에서 헉헉대던 숨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웃음을 더는 참지 못하고 조용히 터트렸다.

“하,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치졸하게 굴었음을 인정한다.

누굴 사귀든 그녀의 자유였다.

꿈에 나타나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했던 그녀를 기다린 결과가 막 사귄 애인과 희희낙락하는 얼굴이었으니 비딱한 본성이 날카롭게 치들었던 것이다.

신경 안정제를 먹지 않은 부작용인지 급격히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기어이 그녀를 상처 입혔다.

굳이 불러내서 차갑게 굴 것까지야.

지금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그 자신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에게 가는 신경과 관심을 덜어 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사무실을 나가자 그는 그녀를 따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생각하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과해서 뭐 하게.

그리고 뭐라고 사과하게. 그조차도 설명 안 되는 기분을, 조잡하게 주절대어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도와준 그녀에게 마땅한 보상을 하면 속에 얹힌 짜증이 사라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속 시끄러운 결과만 낳았다.

굳이 회의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

그리고 구 대리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세연을 보자 도저히 신경 안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화를 내도 마땅한데 저를 걱정하는 얼굴을 볼 때면 그녀에게 했던 속 좁은 짓이 떠올랐다.

쓰게 웃은 그가 20층 비상문을 열었다.

그러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웠다.

도하를 발견한 강 비서가 안내 데스크에서 기립했다.

“대표님. 오늘은 조금 늦게 오셨네요.”

“강 비서는 평소보다 더 일찍 왔군요.”

“오늘 중으로 처리할 게 있어 일찍 왔습니다.”

석호가 도하의 개인적인 업무를 처리한다면 강 비서는 대표인 그의 스케줄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했다.

“걸어오신 모양이네요. 얼음물을 올릴까요?”

“10분 뒤로 부탁하죠. 유 비서가 출근하면 바로 얼굴 비치라고 전해요.”

“알겠습니다.”

강 비서가 단정하게 웃으며 화병을 들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단번에 파악했던 게 이래서였군.’

강 비서가 스토커라면 그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전날 확인을 거치지 못했다면 조용히 제 일만 하고 퇴근하는 강 비서를 끝까지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겉옷을 벗어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 둔 도하가 자리에 앉아 업무 서류를 들췄다.

그러자 정확히 10분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도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구두 소리가 불쾌하게 귓속을 후비자, 서류를 보고 있던 도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오늘의 주요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리잔을 데스크에 놓은 강 비서가 차분한 음성으로 도하의 신경을 긁었다.

“……이상입니다.”

일정을 리마인드 하는 목소리가 끊긴 후에도 나가지 않고 있는 강 비서를 도하가 쳐다보았다.

“안 나가고 뭐 합니까.”

“아, 물을 드시지 않고 계셔서요.”

“이런 것까지 확인받아야 하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편 도하가 냉소적으로 묻자 강 비서가 빠르게 고개를 저어 댔다.

“아닙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강 비서가 달라진 그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하게 무심한 낯을 유지하던 도하가 문이 닫히자마자 인상을 구기곤 유리잔을 들었다.

그의 집무실은 전면 유리창 말고도 왼 측에 외부로 열리는 프로젝트 창이 있었다.

도하는 경첩을 돌려 열린 틈새로 물을 부었다.

화단이 있는 방향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지도 않은 채 창문을 닫자 석호가 들이닥쳤다.

“나 불렀다면서. 아침부터 뭘 또 시키려고…….”

“문이나 닫아.”

“또 저기압이네. 뭔 일로 부른 거야?”

“소파 밑을 봐.”

“뭘 흘렸어?”

소파 밑을 확인하려 석호가 몸을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엉덩이만 올린 채 소파 아래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책상 밑도 확인해.”

“야, 이도하. 네가 해! 이 악덕 고용주야!”

“도청기가 있을 수도 있어.”

누군가 그를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의심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우연히 발견한 도청기 때문이었다.

“뭐? 또?!”

석호가 황급히 의자를 밀어내 책상 아래로 몸을 구겨 넣었다. 잠시 후 얼굴을 들어 올린다.

“없는데? 도청기 깔린 거 확실해?”

“있을 것 같아서 점검차 말해 본 거야.”

“야 이……”

차마 욕을 하지 못해 석호가 삿대질을 해 댔다.

“놀라지 말고 들어.”

“내가 놀라야 할 일이 있다고?”

도하의 진중한 목소리에 석호가 무릎을 털고선 성큼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듣고 나서 소리 지르지 말고.”

“……더 떨리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우리 김 여사가 네게 전화했냐?”

모친을 가장 무서워하는 석호가 떨리는 두 손을 겹치자 도하는 닫힌 문을 응시했다.

“알아냈어. 날 스토킹 한 여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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