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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5)화 (15/70)

15화

“스토커라고 생각한 거군요.”

“네. 비상구에서 대표님의 뒤를 밟던 여자의 뒤통수와 유사했어요.”

“확실합니까.”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확인을 해 보는 편이 좋으니까요…….”

“추측대로라면 그 여자가 화장실로 들어간 게 되겠군요.”

“길이 막혀 있고 매체 팀 직원도 아니었어요. 자세히는 아니지만, 얼굴을 봤거든요.”

“그렇군요.”

도하가 고개를 무심하게 끄덕였다.

그와 관련된 일인데도 관심 없다는 듯한 태연한 태도를 직면하자 세연은 도하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타 부서 직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했나 봅니다.”

그가 걱정되어서 그런 건데 그녀가 한 일이 쓸데없는 행위로 느껴지게 하는 지적에 속이 쓰라렸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없고. 이런 일이 있거든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아요.”

제 사과를 성의 없게 돌려주는 도하에게 서운해 세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답 안 합니까.”

“네…… 그러겠습니다.”

바보 같아. 이런 말을 듣자고 그를 따라온 거야?

그를 위해서 한 일인데 칭찬은커녕 질타하는 도하를 더 보고 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글픔을 참으며 세연은 고개를 돌렸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또 뭐가 남아 있다는 건지.

당돌하게 묻고 싶었지만 울컥한 표정이 감춰지지 않아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의할 게 있습니다. 대표실로 올라가죠.”

* * *

도하에게 붙잡힌 세연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였다.

기어이 그와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정세연 씨.”

“…….”

“고개 들어 봐요.”

세연은 눈을 깜빡거렸다.

자세히 들어야 알 수 있는 웃음기가 그녀의 귓가에 닿아서였다.

그가 웃고 있다니.

천천히 고개를 들자 도하의 표정은 미소와 가까웠다.

다시 눈을 깜빡거려도 그의 입가에 걸린 곡선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화나신 게 아닌가요?”

그가 20층에서 멈춰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통과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일부러 그런 겁니다.”

“네? 뭣 때문에요??”

“세연 씨의 추측이 맞아떨어져서요.”

그를 따라간 여성이 스토커가 맞다는 소리였다.

세연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왜…….”

“퇴로를 막고자 그랬습니다. 잡혀도 딴말로 빠져나갈 수 있어서 말이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짤막한 뒷말도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맺혔다.

* * *

‘갔나?’

여자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시야가 확보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지만, 도하도 제 계획을 방해한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둘이 복도에 없다는 확신이 들자 여자는 대범하게 문을 열고 중얼거렸다.

“그 여자 뭐야.”

저번에도 내 일을 망치더니.

도하를 쫓아왔는데 그가 보이지 않자 화장실에 숨은 게 다행이었다.

“훗, 들켰다고 해도 둘러댈 말이 있지만.”

그녀는 이도하의 주변을 맴돌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위해 제이온에 입사했다.

“급해져서 이 화장실 썼다고 하면 뭐라 하겠어.”

제 이미지가 좀 깨지겠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속이 상해 여자는 눈살을 구겼다.

도하와 단둘이 만남을 가장하려던 기회를 날려 버리게 된 것도 분했다.

“아까 본 여자인 게 분명한데…….”

도하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제 일을 방해한 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의심을 피해 가려 세면대에 물을 틀어 놓고 손을 씻는 척하느라 도하의 목소리도 다 듣지 못했었다.

“누구인지 걸리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거야.”

* * *

도하는 소파에 앉자마자 사과를 건네 왔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도하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된 세연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대표님께서 나쁜 마음으로 그러신 게 아니잖아요.”

그녀의 마음에 자리한 설움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영문을 몰랐을 땐 섭섭했지만요.”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도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차라리 화를 내요.”

“제가 화를 내야 하나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들리지 않는 숨을 토해 낸 것처럼 그의 입술이 열렸다가 빠르게 닫혔다.

그가 꼰 다리의 무릎에 깍지를 낀 손을 풀었다.

“정세연 씨의 입장에선 화를 낼 일입니다. 선의로 한 일을 내가 무가치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하는 말이 그녀가 화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이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가 화가 나 있는 거라고 오해했을 정도로 마주한 표정은 딱딱했다. 

“섭섭했다니까요? 대표님을 걱정해서 한 일인데, 혼났으니까요.”

인상을 지그시 쓰는 도하를 보고도 세연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웃음이 나왔다.

세연이 빙그레 웃자 검은 눈동자가 짙게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날, 걱정했다는 겁니까.”

마주한 눈길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눈동자에 고여 있는 듯했다. 세연은 도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힘을 준 목을 울렸다.

“네, 당연하잖아요.”

“후, 정세연 씨는…….”

귓속을 느릿하게 파고드는 제 이름이 감미롭게 들려 세연은 귓불을 문지르고 싶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숨 내뱉은 그가 공백을 둔 채 마른 입가를 문질렀다.

‘아까도 저러시더니.’

아무래도 습관인 듯했다.

도하가 말을 끊은 사이, 세연은 그의 음성이 전해지는 것처럼 간지러운 귀밑을 슬쩍 긁었다.

그러곤 시선을 돌리자 그녀처럼 어딘가 간지러운 듯이 목덜미를 쓰다듬은 도하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인정했다.

“……나도입니다.”

“네?”

“…….”

“앞말을 못 들어서요. 다시 말해 주세요.”

그녀가 되묻자 그가 오른쪽 눈썹을 살짝 가리는 앞 머리칼의 끝마디를 이마 뒤로 넘겼다.

“정세연 씨가 걱정돼서, 그랬다는 겁니다.”

말 중간이 너무 생략되었지만, 말귀를 알아듣는 데 지장은 없었다.

세연은 작게 웃었다.

“화장실 안을 살피지 못하게 한 게 절 걱정해서였다는 거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그가 생략한 말을 짚자, 그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인간이니 가능성을 열어 둔 것뿐입니다.”

그녀를 걱정한 것을 합리화하듯이 말한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부터 날 따라다녔는지 알지 못해도 상습범인 건 알고 있습니다. 정상인 범주에 벗어났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죠.”

세연은 고개를 꺾다시피 올려야 보이는 도하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있는 도하의 시선은 세연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누군지 알아볼 겁니다.”

그는 그녀가 앉은 소파 너머의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로 다시 가시게요?”

“계속 있을 리가 없죠.”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한심하다는 기색 없이 단조로웠다.

“관제실에 가시려는 건가요?”

맞다는 듯이 그가 일어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누군지 알아야 대응할 수 있으니, 증거 확보로 제압할 수를 마련해 둬야죠.”

지피지기해 선제공격할 모양이다.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너무 늦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돌아가요.”

“마음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에요.”

세연은 고개를 저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돕고 싶은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저번에도 했던 말이지만, 오늘뿐만 아니라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

그녀를 향한 그의 분위기가 느슨히 풀어져 있는 상황을 날려 버릴 수 없었다.

“제 말은, 대표님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입 뒀다 뭐 하냐 싶은 세연은 도하가 저에 대해 오해한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사건과 스토커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흥미로 여기지 않는다고.

“그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엷은 주름살이 그의 미간에 패어 있었다.

속마음을 꺼낼 수 없게끔 하던 냉랭한 분위기와는 결이 달랐다.

“그럼…….”

“협조 부탁하죠.”

도하의 입꼬리가 은은하게 올라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도하는 웃음이 곁들어진 그의 얼굴이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네! 뭐든 시켜만 주세요!”

흔쾌히 떨어진 도하의 허락에 세연은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1층에 있는 관제실은 제이온 외 다른 회사들도 통제하고 있어 허락된 몇 명만 출입이 가능했다.

제이온 대표인 도하는 그곳을 드나들 수 있는 보안 카드를 지니고 있었다.

관제실에 들어간 도하는 하나뿐인 의자에 세연을 앉히곤, 능숙하게 그들이 있었던 공간을 비추는 CCTV 영상을 찾아냈다.

“이 여자.”

화장실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자를 본 도하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아는 사이인가요?”

영상을 찾느라 숙였던 몸을 세운 도하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냐고 물을 수 없게 심각해 보이는 그를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는 잠시 후 나직이 떨어진 말에 입을 크게 벌렸다.

“대표실 담당 인포메이션 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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