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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4)화 (14/70)

14화

‘기분이 나빠 보여도 인사는 해야겠지.’

그녀를 보는 게 좋지 않은지 그는 서늘한 표정과 시선으로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연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고개를 꾸벅거렸다.

“늦게까지 수고하십니다.”

“…….”

고갯짓하지 않기에 무시하려나 싶었는데 그녀를 지나치려던 도하가 문득 멈추었다.

“정세연 씨.”

원치 않게 도하의 옆에 서게 된 세연은 서늘하게 다가온 제 이름에 몸을 틀었다.

“예. 대표님.”

“최종 기획안 보았습니다.”

“아, 네! 걸리는 요소가 있나요?”

가이드라인이 되는 촬영 콘티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세연은 마른 침을 삼키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각 샷에 각본의 콘셉트를 잘 담아냈더군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정반대였다.

사적인 감정을 끌고 오지 않은 도하의 평가에 세연의 표정은 확 밝아졌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을 줄 몰랐던 뜻밖의 칭찬에 미소를 머금는데 그가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누가 있나?’

그의 시선을 따라 제작 팀과 비딩 팀이 같이 쓰는 사무실을 응시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에 눈길을 돌린 도하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뭘 잘못 봤습니다.”

서느런 인상을 바꾸는 입매에 주변이 환해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회의 땐 시간이 없어서 말 못 했지만 캐치프레이즈도 구매욕을 일으키게 잘 적었더군요.”

열심히 한 결과물에 그가 칭찬을 늘어놓자 굉장히 기뻤다.

세연은 주체 없이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게 이상하게 보였을까.

저를 보는 도하의 시선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이 닿아 있어 세연은 제 얼굴을 슬쩍 매만졌다.

‘화장이 번졌나? 거울이라도 보고 나오는 건데.’

도하의 시선을 의식한 세연은 입가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의 눈동자가 더욱 뚫어지게 그녀의 얼굴에 맴도는 것 같았다.

“듣자 하니.”

다시 이어진 목소리에 세연은 잘 듣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수가 구진형 씨라고 들었습니다.”

선배 이야기가 왜 나오지? 의아해졌지만 세연은 살짝 기울어진 고개를 얼른 바로 해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구진형 씨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네? 아닙니다.”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가 싶어 세연은 결연히 고개를 젓다가 급히 사족을 덧붙였다.

“사실은 조금은 도움받았습니다. 진형 선배님에게 스크립트 피드백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SB로 디벨롭할 때 AD의 조언도 많이 받았습니다.”

“힘들었겠군요.”

차분히 고개를 까닥인 도하가 듣기 좋은 말을 내뱉었다.

“할 땐 힘들었는데 보람 있었습니다.”

진심인 말에 도하가 웃음이라고 칭할 수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공들인 티가 났습니다. 앞으로도 세연 씨가 잘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딩 팀 보충 인력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네?! 제가요?”

“예. 정세연 씨가 말입니다.”

좋은 기회였지만 선뜻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맡겨진 일을 처리하는 것도 급급했다.

“싫다면 안 해도 됩니다.”

“싫은 게 아니라…….”

세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제 생각을 드러냈다.

“비딩 팀원들에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잘 해낼 자신도 없고……. 물론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실수라도 했다간 통상 한 달 넘게 매달린 일의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으니까요.”

실패로 돌아오면 그게 그녀의 탓일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세연은 선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하의 안색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정세연 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니 내 제안은 철회하죠.”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세연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도하가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복도를 쭉 지나 벽면을 돌았다.

편집실 아니면 매체 팀에 용무가 있는 듯했다.

우연히 도하의 칭찬을 듣게 된 세연은 혈색이 도는 얼굴로 뒤돌다, 다급하게 제 곁을 지나가는 여직원의 얼굴을 보고는 무심히 생각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무심코 걷던 세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분명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도 뒤통수가 익숙했다.

셋팅펌을 하지 않은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얼핏 본 얼굴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압니다. 날 따라붙었다는 걸. 안 지는 얼마 안 되었고, 꼬리를 잡기 위해 계단을 이용했던 겁니다.]

뇌리에 내리박힌 도하의 목소리가 상기되자마자 세연은 입을 벌렸다.

몇 주 지난 일이지만 그녀의 눈썰미는 꽤 정확한 편이었다.

‘어떡하지?’

도하는 스토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는다면…….

세연의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쫓아가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망설이게 된다.

[붙잡는다고 해도 실상 처벌이 어려워요. 후. 보안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은 이곳에서는 더더욱.]

[확실한 증거물이 없다면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적당한 곳으로 유인하려고 했는데.]

전에 도하의 계획을 망쳤던 세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도하를 쫓고 있다는 가능성이 커졌다.

‘맞아! 복도에 보안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대표가 저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아까 전 귀띔이라도 해 주었을 거야.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그가 일부러 스토커를 유인하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긴 생머리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서 흔들렸다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스토커가 아닐 수도 있지만 느낌이 안 좋았다.

세연은 다급하게 뛰었다. 모퉁이를 돌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강한 손아귀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손목을 움켜쥔 힘이 거칠어 세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 손을 잡은 이를 확인했다.

“정세연.”

불만이 있는 듯이 표정을 구기고 있는 진형이었다.

“선배. 아파요.”

그 말에 진형이 그녀의 손목이 벌게지도록 잡은 손을 떨어뜨렸다.

“나랑 이야기…….”

“미안해요. 선배. 내일 이야기해요.”

“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정말 미안해요.”

도하가 간 길을 밟은 여자가 신경 쓰여 세연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도하와 수상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편집실과 매체부서 말고 화장실이 있기는 했다.

“정세연 씨?”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는 그녀의 뒤로 중저음이 닿았다.

도하의 목소리는 귓가를 울리게 묵직했다.

고개를 돌린 세연은 편집실에서 나온 도하를 바라보며 안도한 가슴 중앙으로 손을 올렸다.

“하아.”

심장 안쪽을 빠듯하게 채운 불안감이 빠르게 사라지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도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도하의 그림자가 졌다.

“저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순간 정리되지 않는데 그가 가슴 위로 둔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심장이 아픈 겁니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그는 더 이상 무표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진짜로 아픈 것처럼 뛰었다.

진형에게 잡힌 부위였지만 도하의 손에 쥐어진 손목 부근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습니다.”

그녀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손의 힘을 뺀 그는 분명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도하의 마음을 알게 된 세연은 자그맣게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에요.”

세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도하가 손목을 쥔 손가락을 빠르게 폈다.

언뜻 당황하는 것 같은 기색이 그의 얼굴에 어린 것 같았다.

그녀의 시야에 근접하게 맺힌 그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왜 안 가고 여기에 있습니까.”

거칠게 낯을 문지른 도하의 얼굴은 붉은 기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실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요.”

그가 앞머리를 이마에 붙게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런 그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향해 있었다.

도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된 세연은 벌게진 얼굴로 부정했다.

“아니에요! 화장실 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모른 체해 주겠다는 듯한 도하의 선심에 세연은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알긴 뭘 아는 거냐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체면이 서지 않았다.

“진짜예요! 배 아파서 온 게 아니라, 대표님을 쫓아온 겁니다.”

성급하게 내뱉은 말에 둘을 둘러싼 분위기가 팽팽히 굳었다.

날 선 느낌을 자아내는 눈매에 일조하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날, 왜 따라왔습니까.”

한 자를 끊어서 낸 목소리에 세연은 제가 한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된 거냐면! 대표님께서 가고 난 뒤에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여성을 봤습니다.”

재빠르게 말실수를 정정하자 눈동자의 미동이 멈추곤 시멘트를 부은 것처럼 그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후, 소리.

‘내가 또 뭔가 실수를 했나?’

세연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도하를 보았다.

찬바람이 그를 감싸고 있는 듯해 그가 말을 붙일 때까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하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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