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몸을 돌린 세연의 시선이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도하에게 닿았다.
부리부리한 눈빛이 그녀에게 향해 있고, 웃음기가 제거된 표정은 석상처럼 딱딱해 선뜻 다가갈 수 없게 했다.
공들여서 깎은 듯이 날카로운 선을 잇는 이목구비가 주는 인상에 세연은 잔뜩 긴장했다.
저를 보는 눈동자가 깜빡이지 않고 있어 왠지 움직이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 보고 싶지 않은가 봐.’
가슴이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와 단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기뻤는데.
이런 맘을 그가 알아차린 것일까.
도하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한 세연은 그를 쫓아가 해명하고 싶었다.
그의 비밀을 악의적으로 이용할 마음으로 기뻐한 게 아니라고. 결단코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 좋아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녀의 마음과 멀어진 상황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어휴. 누가 이랬대.”
대걸레를 가져온 청소 아주머니를 본 세연이 공손히 팔을 내밀었다.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놔둬요. 이게 내 일이에요.”
“제가 닦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게요. 바쁘실 텐데 다른 일 보세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럼 부탁해요.”
제 마음이 편하고자 하는 일인걸요.
도하에게 느낀 아쉬움과 섭섭함은 애인에게도 느껴 보지 못했다.
세연은 도하의 생각이 그득 찬 상태로 진형을 보기가 꺼려졌다.
진형의 얼굴을 맞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어 얼음이 녹아 더러워진 바닥을 걸레로 밀자 엉망인 마음이 조금은 깨끗해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으려고 하는데 손에 쥔 대걸레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 위로 겹쳐진 남자의 손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시야로 인상을 쓴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대표님? 어째서……”
“이걸 왜 하고 있습니까. 정세연 씨가 한 것도 아니면서.”
도하가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에 세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긴 왜 웃습니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꼬리에 닿아 있어, 상황과 맞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는 걸 깨달은 세연은 얼른 입매의 선을 단정하게 내렸다.
그가 돌아와서 기쁘다니.
감정이 도하에게 오롯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세연은 음울하게 눈꼬리를 내렸다.
“이럴 시간에 가서 일해요.”
“네…….”
대걸레를 갖다 놓으려고 제 앞으로 끌어당기는데 서느런 목소리가 닿았다.
“내 말 못 들었습니까.”
세연은 한껏 두 어깨를 좁혔다.
바들바들 떨리는 진동이 대걸레를 잡은 손 위로 전해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혼내는 거 아닙니다. 후. 내가 놓고 갈 테니 정세연 씨는, 들어가세요.”
이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과 반대로 도하와 엇갈리는 상황에서 세연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걸레에서 두 손을 뗐다.
그리고 부서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서 힐긋 그를 되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를 노려보는 듯이 주욱.
그래도 그녀를 바라봐 주고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아침보다 기분이 풀린 듯한 눈빛을 향해 눈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느라 늦었어요?”
그녀가 늦었다는 것에 짜증이 난 듯이 진형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대표님과 마주쳐서요.”
“대화라도 나눴어요?”
“네.”
“이야기할 것이 뭐가 있다고?”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겠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진형을 보고 있으면 인상을 쓸 것 같았다. 옆쪽으로는 일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세연은 딱딱하게 응수했다.
“각본 시안 메일로 보냈어요. 피드백은 가급적이면 오늘 주셨으면 해요.”
* * *
‘이거 마음에 안 든다.’
‘이건 별로?’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피드백이지만, 세연은 지적이 들어온 부분을 최선을 다해 보완했다.
“세연아.”
그리고 휴식 시간.
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고 탕비실로 이끌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하고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라니?”
“나 봤어. 대표님과 같이 있는 거. 대표님이 이렇게 네 뒤에 붙어 있었잖아.”
언제 본 건지 유정은 자세히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가까워 보이던데 아냐? 내게만 사실대로 말해 봐.”
“아니야. 그런 거. 미움 받은 거면 모를까.”
“뭐? 대표님에게 뭔 잘못 했길래? 혹시, 너한테 무슨 짓을 하셨어?”
“아냐! 그냥 내가 잘못한 일이 있어. 절대로 네가 생각한 그런 사이 아니야. 왜냐하면…….”
갑갑한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아주 조오금만.
“실은 나, 구진형 씨와 사귀어.”
“에에? 구진형 씨가 너한테 마음 없다고 했던 걸 들었는데?”
“한동안 비밀 연애 하기로 해서 그렇게 말 맞췄어.”
“페이크였네. 와. 구진형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잘하네. 후임은 무슨.”
“내 평판 나빠질까 봐서 그런 거야.”
“뭐, 너희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기는 한데. 나중에 밝히면 다들 쇼킹하겠다.”
“비밀인 거 알지?”
“알쥐, 알쥐.”
유정에게 말하고 나니 답답한 속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세연은 기운이 난 듯 미소를 머금고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제 준 프로틴 음료. 그거 어디서 샀어?”
“맛있지? 세일즈 쇼핑 앱 깔려 있어? 거기서 샀어. 지금 할인해서 팔아.”
“대용량으로 구매해 놔야겠다. 그거 마시니까 좀 든든하더라고. 다이어트하면서 마셔야겠어.”
“뺄 살이 어디에 있다고? 너 글래머러스 셰이프잖아. 내가 살을 빼야 하는데 네가 그러면 나는?!”
“살찐 것 같기도 하고 예전 옷이 작아진 느낌이라서. 그리고 집에 가면 뭘 먹게 되니까 경각심이 들더라고.”
어제 쫄쫄 굶주린 배에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꽉꽉 채워 넣었더니 아랫배가 나온 것 같아 세연은 복부에 힘을 주었다.
“우우. 나도 해야 할 것 같잖아.”
“같이 하자.”
“그럴까? 근데 우리 이러면서 뭘 마시고 있네.”
탕비실에서 나온 둘의 손에 차가운 음료 병이 들려 있었다.
배고프면 물을 마셔야 하는데 습관이 무섭다고. 대화하면서 저도 모르게 단 것에 손이 간 세연은 이미 입에 댄 비타민 음료를 깔끔히 비우고는 웃었다.
“내일부터 하면 돼.”
* * *
주말은 회사에서 다 하지 못한 일로 바빴다.
그리고 월요일 오전 회의 시간.
“세연 씨에게 맡기길 잘했네요. 그런데 로고를 잡는 영상에서 들어갈 음악이, 마이클 잭슨의 네요.”
“네. 저희와 광고주가 추구하는 콘셉트가 이 곡이 주는 메시지와 맞아떨어져 삽입곡으로 정했습니다.”
진형의 지적을 받은 부분이었기에 세연은 다운로드 받은 음악 파일에서 몇 초의 구간만 핸드폰으로 재생시켰다.
그러자 빨라진 선율을 타고 영어 가사가 흘러나왔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을 돌이켜 보고 스스로를 바꿔 보자는 내용이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종료 버튼을 누른 세연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나 자신부터 변하다. I'm gonna make a change. 변화를 만들어 보자. 그래서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 이러한 의미를 전할 수 있게 마이클 잭슨의 를 선택했습니다.”
“시도와 승리욕이 강한 현대인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겠군요. 리듬감 있어 9S 이미지와도 들어맞고요.”
회의적인 진형의 반응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안대로 스토리보드 진행합시다. 연출 콘티 작성은…….”
“잠시, 나도 봅시다. 정세연 씨의 결과물.”
고막을 묵직하게 때리는 목소리가 느닷없이 들리자 세연의 가슴이 펄쩍 뛰었다.
도하가 혜선에게서 이어받은 스크립트 시안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세연은 긴장감으로 전신이 굳었다.
두 손 모아 빌고 싶은 심정이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대표의 갑작스러운 참석에 뻣뻣하게 굳어 있어 회의실에는 시안을 넘기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러프 보드는 세연 씨에게 맡기죠.”
도하는 웃지 않고 그녀의 시안을 덮었다.
혹시라도 지적이 들어올까 마음을 졸였던 세연은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도하는 매체 팀의 보고서도 받아 보았다.
“예산안에 맞는 송출 매체들을 부킹 해 놓았군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도하가 미미하게 웃었다.
도하의 미소를 엿본 세연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내 시안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나 봐.’
무릎에 둔 두 손을 주먹 쥔 세연은 다음 회의 땐 도하의 환한 미소를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러프 보드라도 대표님의 성에 차게 완성시키자.’
* * *
드디어 끝냈다!
며칠간의 노력 끝에 러프 보드의 승인이 떨어졌다.
대표와 광고주의 컨펌도 받은 러프 보드는 AD의 도움을 받아 프레젠테이션 보드에서 촬영 콘티까지 완성되어 외부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한 세연은 가볍게 복도를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도하를 보았다.
그도 그녀를 인지했는지 서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세연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