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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2)화 (12/70)

12화

재단한 슈트를 걸치고 커다란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 있자니 정세연,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팠다.

숨 쉬는 일마저 귀찮게 느껴지는 무기력증이 덮칠 때마다 입에 털어 넣던 약병이 눈에 들어왔으나 이번만큼은 손대지 않았다.

신경 안정제를 먹는 것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았다.

도하는 일찍이 집을 나섰다.

대표실에 앉아 서류를 보면서도 입꼬리가 근질거렸다. 가슴 부근도 간질간질했다.

심장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감정을, 도하는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정의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비상구 계단을 통해 제작부서로 향했다.

휴게 용도로 사용되는 복도로 나온 도하는 이리로 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진형이 뒤를 힐긋 쳐다보고는 세연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거부하지 않고 진형을 따라 슬그머니 웃었다.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연인 관계.

기어코 사귄단 말이지.

심장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그녀를 기다리며 느낀 즐거움이 씻겨 나가듯이 사라졌다.

그의 비밀을 발설한 것도 아닌데 그에 상응하듯이 기분이 더러웠다.

도하는 둘이 저를 발견하기 전에 몸을 돌렸다.

연인으로서 나누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는 발길을 빨리했다.

“흐억, 놀라라. 왜 거기서 나오냐. 또 1층부터 계단 타고 올라왔어?”

엘리베이터 옆 칸의 출입구로 나온 도하를 본 석호가 기가 질린 듯이 고개를 젓다가 마주한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 표정 왜 그렇게 살벌해? 누구 하나 잡을 것처럼. 헉. 그거 나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불러. 당장.”

“엑, 누굴?”

구겨진 눈썹을 펴지 않은 도하가 싸느란 목소리로 말했다.

“정세연.”

* * *

RRR……!

세연의 책상에 설치된 키폰이 울렸다. 자리에 앉으려던 세연은 얼른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았다.

“네. 제작 2팀의 정세연입니다.”

-세연 씨. 안녕하세요. 제 목소리 알겠나요?

“유 비서님?”

-네. 접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께서 보자고 하시네요.

“지금요?”

-네. 바로 와 줬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올라갈게요.”

오늘 안에 대표실을 방문하려고 했던 세연은 출근한 지 30분 만에 소환당했다.

도하를 기다리게 한 것 같아서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20층 행선지를 누르고는 벽면의 거울로 차림새를 확인했다.

루즈 핏의 실크 셔츠와 적당한 길이의 랩스커트. 무난한 오피스 룩이었다.

진형을 만나면서 들었던 말 때문인지 살짝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다리가 은근 눈에 밟혔다.

[세연아. 예전보다 살쪘어?]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헐렁하지 않은 치마의 뒷부분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보여요?]

[안일하게 생각하다간 살 금방 붙어. 관리해야겠다.]

들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도하를 보러 가는 이 순간 예전보다 작아진 듯한 착용감이 괜히 의식되었다.

“……식이 조절이라도 해 볼까.”

뼈대가 가늘어서 어떤 옷을 입어도 늘씬한 태가 났다. 그리고 먹는 양에 비해 살이 안 찌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슬슬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표님처럼 계단 운동이라도 해 보자. 먹는 양도 줄이고.’

자동으로 열린 문에 내리자 데스크에 앉아 있는 석호가 보였다.

“들어가면 됩니다. 차는 뭘로 드릴까요?”

“아무 티백이나 주셔도 되어요.”

다이어트를 생각해서 석호에게 티백을 부탁한 세연은 대표실을 똑똑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는 거겠지?

똑똑 다시금 노크하고선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세연은 미처 손잡이를 잡은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빨려 들어가다시피 한 세연의 얼굴이 널찍한 몸에 박듯이 닿았다.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 내리꽂히는 시선에 세연은 도하에게 헤드 샷을 날린 것을 깨닫고는 뒤로 빠르게 물러나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또 실수했다.

수난의 시대도 아니고.

“들어와요.”

정신을 차리라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등을 돌린 도하를 보자, 집무실 안이 삭막해 보였다.

햇빛이 드는데도 따스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제와 다른 건조한 공기가 숨구멍을 턱턱 막히게 했다.

처음 와 본 듯한 기분.

세연은 소파에 앉아 마주한 고요한 눈동자와 서늘한 표정에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다.

미소가 곁들어지지 않은 이도하는 그녀가 모르는,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압니까.”

웃음기를 뺀 목소리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얼어붙은 것 같은 입을 파르르 떨면서 세연은 대답했다.

“어제의 일로 부르신 게 아닌가요?”

“맞습니다. 정세연 사원.”

직급을 언급하는 말투는 눈앞의 남자가 어렵게 여겨야 하는 대표임을 여실히 알려 주었다.

조금은 그와 친해진 것 같았는데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창피했다.

“받아요.”

금박 인쇄로 회사 로고가 찍힌 고급스러운 봉투였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평평한 봉투에 당이 떨어지는 것처럼 기분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사례금입니다.”

그녀의 실수를 한 번 눈감아 주기로 그에게 약속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받으라는 눈빛은 고요했다.

사나운 비바람을 맞은 것처럼 세연의 심장이 흔들렸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줄 것 같지 않은 얼굴은 온기 없이 견고했다.

“감, 사합니다.”

아프게 조이는 목구멍을 간신히 열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들린 봉투의 끝을 잡았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봉투는 공기처럼 가벼웠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의 진동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나가 봐요.”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이것으로 용건은 끝이라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용 책상에 앉았다.

그와 그녀는 다른 대화를 나눌 만큼 사적인 영역이 겹치지 않았다.

저러는 게 당연한 건데도 마음이 착잡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그의 행동이 저를 기억에서 지운 것 같아, 속이 콱 막혔다.

차가운 무심함에 떠밀리듯이 나온 세연은 차를 들고 오는 석호를 보고도 웃지 못했다.

“엇. 벌써 가시게요?”

“네.”

“그러지 말고 차 마시고 가세요. 차와 어울릴 쿠키도 가져왔, 으엇, 그거 뜨거워요!”

격조 있는 찻잔을 든 세연은 뜨거운 김이 폴폴 날리는 차를 식히지도 않고 마셨다.

혀가 아릴 만큼 뜨거운 것이 식도로 내려가는 감각이 싸했다.

눈시울에 눈물이 고였다.

“안 뜨거워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화끈화끈한 혀를 깨문 세연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조……금……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뜨거운 것 같은데.”

아릿한 혀보다 심장 부근이 더 아팠다.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으니까.

“감사히 잘 마실게요.”

“뜨겁다니까요! 천천히 마셔요.”

석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으나 세연은 눈에 고인 눈물을 쏙 빼게 뜨거움을 참아 내며 잔을 끝까지 비워 냈다.

“잘, 읏. 마셨습니다.”

시야를 불투명하게 가리는 눈물 때문에 석호의 걱정 어린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석호가 뭐라 하기 전에 세연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 * *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도하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세연은 우울했다.

“세연 씨.”

타인을 의식한 호칭을 쓴 진형이 복도를 눈짓하며 나갔다.

몇 분 있다가 세연이 복도로 발걸음하자 진형이 자판기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하듯이 세연의 뒤를 쳐다본 진형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동전 없어? 300원이 모자라네.”

“없어요.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요.”

“그러면 나중에 갚을게. 네 카드로 사 주면 안 될까? 지갑을 놔두고 와서.”

“어떤 거요?”

세연은 핸드폰 케이스 수납 칸에서 카드를 꺼냈다.

“헤이즐넛 커피로. 너도 마실래?”

진형이 버튼을 누르자 세연은 인식 슬롯에 카드를 찍었다.

“전 물 마시면 돼요.”

“다이어트하려고?”

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형이 활짝 웃었다.

“잘 생각했어. 여기서 조금만 빼면 더 예쁠 거야.”

진형이 뽑은 커피를 호록 소리 내어 마시면서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네가 사 준 거라서 더 맛있다.”

언제 내가 사 준 거로 되었지?

처음 말과 달랐지만 천 원도 되지 않는 값이었다. 누가 얼마 썼느니 안 썼느니, 연애 초반에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아 놔뒀다.

“스크립트 초안 끝냈어?”

“조금만 손보면 돼요.”

“시간 좀 있으니까 보고 피드백 해 줄게.”

세연을 지나친 진형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이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투입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에서 얼음과 남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진형은 그녀가 오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부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가 모르고 질척한 바닥을 지나가다 넘어질 수 있어 보여, 모른 척하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화장실 창고에 있는 대걸레로 닦아야겠다.’고 생각한 차였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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