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1)화 (11/70)

11화

상사에게 무릎베개한 세연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요.”

그때, 석호가 뒤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세연 씨, 미안합니다. 갑자기 앞 차량이 급정지하지 뭡니까. 급브레이크를 밟아도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핸들을 꺾었어요.”

“네에, 전 괜찮아요.”

세연은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매만지면서 부끄러운 얼굴을 숨겼다.

그의 허벅지는 살집 없이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찔러 보면 튕길 것 같은 몸에 닿았던 머리는 의외로 아프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서둘러 몸을 세웠지만 원래 앉은 자리에서 멀어져 있어 살짝만 움직여도 그의 몸과 닿을 정도였다.

세연이 옆으로 엉덩이를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러고 있는 저를 보는 시선에 세연은 결국 마음을 충동질하는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도하를 마주 보자, 그의 눈 색이 그을린 것처럼 연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만큼 탁해져 있었다.

‘화났나 봐.’

누가 봐도 심기가 뒤틀린 눈빛이었다.

세연은 호흡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가 낮은 숨을 얕게 흘리면서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하지만 창가에 비친 그의 시선은 미동 없이 그녀에게로 닿아 있었다.

어둑한 바깥을 오히려 훤하게 보이게 한 눈동자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어 세연의 심장이 숨 막히는 정적을 뚫을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다 왔어요.”

숨을 트게 하는 소리가 반가웠다.

도하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세연은 서둘러 멈춘 차에서 내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손을 잡아채는 것처럼 강하게 울렸다.

“내일, 날 찾아와요.”

* * *

“형한테 안 가 봐도 되겠어?”

석호의 부친은 TS 그룹 총수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담 의사였다.

주치의 유명우 박사는 이건우 회장의 사택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도하와 같은 또래인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어른들이 맺어 준 사이였으나 도하의 인생에서 꺼져 본 적이 없는 석호는 그의 가족도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의 사고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장애가 완전히 낫지 못했음을 아는 이는 소수였다.

석호와 그의 형, 그리고 이제 정세연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약 남아 있어. 먹고 자면 돼.”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무던히도 노력한 결과 불안 장애는 호전되었으나, 오늘과 같은 불시의 사고가 일어나면 공황 상태로 이어졌다.

뜻하지 않은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트라우마가 발동된 것이다.

[혹시 있어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참새처럼 조잘조잘 말을 붙이는 이가 정세연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부른 노래는, 정말이지 웃겼다.

[치킨! 치킨! 치킨아∼ 기다려. 내가 널 영접하러 갈게!]

가사는 그렇다 치고, 불안정한 음과 엉터리 박자를 생각하자 맥락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 나오냐? 남은 심각한데.”

“웃긴 걸 어떡해.”

“대체 뭐가 웃긴지 모르겠다만, 웃는 거 보니 괜찮은 건 확실하네.”

그녀와 있었던 일을 알려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일 계약서 들고 올 필요없어.”

“어째서? 그 여자를 뭘 믿고?”

그의 약점이 될 오늘의 일은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를 경쟁자로 삼는 그의 누나가 숨통을 조여 올 거였다.

또한, 가족의 귀에 들어가면 그를 후계자 자리로 끌어들이려는 할아버지는 물론 조부에게 눌려 사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참견을 받게 될 것이었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씌워 모든 일에 간섭하겠지.’

빨리 결혼하라든가. 다시 본가로 들어오라든가. 갖가지 이유로 그를 피곤하게 할 터.

가족도 믿지 못하는데, 정세연은 믿어지나.

그 여자를 믿는다고 해도 사람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었고, 안 좋은 상황이 닥치면 타인의 불행을 기회로 삼는 것도 사람이었다.

필요로 사람을 곁에 두는 그 역시도 자신만 믿었다.

자신의 안목을 믿었고, 그것에 따른 결과를 회피하지 않고 부딪쳤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맡겨 보려고.”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어서.

“아까부터 책임 타령이네. 그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나 없나 정도는 알아볼게.”

“아니. 알아도 내가 알아봐. 관심 꺼.”

타인이 자신의 것에 손댄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치솟았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너까지 개입되면 짜증 날 것 같거든.”

“뭔 소리래? 지 생각해 줘도 난리야. 마음대로 하셔.”

동갑 상사 모시기 참 힘들다며 그간의 고충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까다롭고 예민한 상사를 둔 친구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도하는 묵묵히 불평불만을 들어 주기만 했다.

지문 인식 절차를 걸치고 집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정적이 웬일로 달갑지 않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도하는 혼자 자기에 너른 침대에 누웠다.

씻고 바로 잠드는 패턴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감돌았다.

조용한 그만의 공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곧 밝혀졌다.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 때문이었다.

피곤한데 그의 머리에 눌러앉은 정세연 때문에 눈꺼풀이 내려앉지 않았다. 잠을 방해하러 온 세연을 밀어내려 도하는 어릴 때도 하지 않았던 짓을 일삼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대표님!’

내쫓았다고 생각한 정세연이 또 나타나, 폴짝 뛰는 세 마리째의 양을 잡았다.

‘제가 줄게요!’

예뻐 보이는 미소로 그에게 양을 넘겨준다.

못 이기겠네.

픽, 웃음이 나온 그는 메에, 하고 우는 양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고선 무어라 떠들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며 저를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시 빙그레 웃고.

주로 웃는 그녀의 다양한 표정이 노곤한 졸음을 불러들였다.

‘도하야.’

‘누나아!’

‘심심하지 않아? 누나가 놀아 줄까?’

‘응, 응! 놀아 줘.’

‘뭐 하고 놀까? 그래! 숨바꼭질 놀이 하자. 엄마 아빠가 못 찾게 숨는 거야. 도하 할 수 있지?’

‘응. 나 잘할 수 있어.’

‘그러면 2층 티룸 수납장에 들어가 있어.’

‘나 혼자?’

‘도하 혼자서 잘하잖아. 뭐든.’

‘…….’

‘누나가 부를 때까지 나오면 안 돼.’

‘으응, 근데 누나는?’

‘누나는, 저어기. 서재에 숨어 있을게. 엄마 아빠가 불러도 절대 여기에 있다고 소리 내지 마.’

‘무서운데…….’

‘울지 않으면 엄마가 나한테만 준 오르골 줄게. 도하가 갖고 싶어 했잖아.’

‘진짜?’

‘진짜. 약속 지킬 수 있지?’

‘응! 대신 빨리 찾아야 해.’

‘그럼! 엄마 아빠가 도하 빨리 찾아 줄 거야.’

찰칵.

‘누나? 어? 왜 잠갔어?’

‘쉿. 조용히 하기로 했잖아. 100초만 세고 있어.’

‘누나, 나 숨이 안 쉬어져. 머리도 아파……, 누나아…….’

어린아이의 신음이 어지럽게 울렸다.

소리쳐. 열어 달라고!

의식이 거의 없는 어린 그의 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가 내는 말소리는 먼발치에서 외치는 것처럼 저 어린 자신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그를 보기만 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이 심해지자 곧 사방이 암전되었다.

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빌어먹을 악몽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는데 희미한 시야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안으로 깃든 빛 한 줄기에서 먼지 같은 빛 조각이 무언가를 감싼 채 반짝반짝 발하고 있었다.

뭔가 싶어 자세히 보자…….

‘치킨! 치킨! 치킨아∼ 기다려. 내가 널 영접하러 갈게!’

띠리링……!

눈이 확 떠졌다. 그러자 사방으로 뻗친 햇살이 얼굴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쨍한 눈부심에 도하는 빛을 받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린 채 몸 전체를 크게 떨었다.

“하.”

웃음이 짤막하게 터졌다.

컨디션이 저조하거나 어제와 같은 사고가 터진 날엔 빠지지 않고 무의식을 침범하던 악몽의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끝내 열리지 않는 문에 절망하며 의식이 끊기는 것.

그런데 오늘의 꿈은 달랐다.

아주 많이.

도하는 땀으로 젖은 몸을 일으켰다.

트라우마로 남은 후유증의 발병은 제이온을 설립하기 전에 알아차렸다.

몇 년간 다녔던 회사에서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불안 증세가 덮쳤다.

그 전까지는 몰랐다.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타고 있으면 괜찮았으니까.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이상 증세를 알아차렸지만, 약을 복용하거나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물리적인 상처가 아니었다.

이후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악몽이 잔재처럼 따라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만큼 고역인 게 또 있을까.

기억력이 뛰어난 그는 누나와 나눈 대화의 내용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누나는 태평하게 잊었을 기억을 그러안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훗.”

세연의 노래가 얼마나 머릿속에 박혔는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꿈의 끝자락에서 본 치킨에 도하는 자취처럼 웃음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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